소설리스트

불멸의 패왕-14화 (14/243)

14화 위세상실

* * *

호뢰관 외곽.

팔십만 송군은 호뢰관으로부터 십리 외곽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날 아침, 송군은 저마다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병사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거지? 이 편지는 내 동생이 보낸 편지가 아니야!”

주변에 있던 다른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어이, 칼자국. 뭐야?”

“무슨 일이야?”

칼자국의 손에는 서선 한 통이 들려 있었다.

그 서신을 보며 칼자국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 여동생 서신이잖아. 뭐가 문제야?”

병사들이 의아한 듯 말했다.

하지만 칼자국의 안색은 어두웠다.

“동생은 나를 오빠라고 부른 적이 없어. 그런데 이 서신은…….”

다른 병사들을 뚱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보았다.

칼자국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계속 말했다.

“우리 남매는 쌍둥이인데, 항상 서로의 이름을 불렀어. 그런데, 여기 한번 보라고. 갑자기 오빠라니? 이거 아무래도 내 여동생이 보낸 게 아닌 것 같아.”

병사들이 피식 웃었다.

괜한 호들갑 떨지 말라는 웃음이었다.

병사 하나가 칼자국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자네 생각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그럼에도 칼자국은 망연한 듯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대머리 병사가 놀란 소리를 냈다.

“어?”

병사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대머리, 너는 또 왜?”

대머리는 서신을 펼쳐 병사들에게 보여주었다.

앞서 칼자국이 받은 서신과 그 내용이 동일했다.

심지어 서체나 기호마저 복사한 것처럼 똑같았다.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칼자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건 절대 여동생 서신이 아니야. 누군가 모방한 것 같아!”

병사들은 저마다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다.

홀연, 칼자국이 험상궂은 얼굴로 말했다.

“설마…… 이거 고해의 음모 아닐까?”

대머리가 화난 음성으로 반박했다.

“개소리! 대원수는 전 병사 식솔들한테 통지했다고 하셨어. 그런데 무슨 당치도 않은 고해의 음모야?”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서신이 가짜라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다수의 병사가 서신을 받았기 때문에 덜컥 의심이 들었다.

그들은 하나둘씩 서신을 펼쳐 확인해 보았다.

“응? 이거 가짜잖아?!”

“내 서신은 진짜인데?”

“내가 받은 건 아니라고!”

또다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송군을 덮쳐왔다.

* * *

고해는 높은 전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사뭇 굳어 있었다.

뒤에 있던 고한이 말했다.

“이틀 안에 전쟁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고해는 음! 소리와 함께 대답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적군의 군심을 흔들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번 일에 달렸다. 송군 식솔들의 서신 문제는 잘 처리했느냐? 모두 괜찮다고 믿어도 되겠지?”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상인을 보내 교란 작전을 펼치는 동안, 고선무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상인들이 병사 식솔의 서신을 가져오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수습될까요? 팔만 통의 편지 내용을 조금만 수정했을 뿐입니다.”

고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잘했다. 단 열 통의 서신이 가짜라는 사실만 알려져도 놈들은 우왕좌왕할 거다.”

“그래도 팔십만 대군입니다. 서신을 팔만 통만 보냈는데 너무 적은 것 아닙니까?”

고해는 입술 끝을 씰룩였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을 흐리는 법이지.”

“아!”

“진짜면 또 어때? 서신에 고정 격식이 있느냐?”

고해는 흡족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의심이란 한번 시작되면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 여기저기 가짜 서신이 나오는데 자기 서신의 진위 여부를 어찌 장담한단 말이냐? 진짜를 받은 자도 가짜라고 의심할 테지. 그렇게 의심은 눈덩이처럼 커지는 게야. 하하하!”

* * *

고선무 진영의 대원수 천막.

고선무는 최대한 서둘러 송성에서 달려온 상황이었다.

그런데 태자가 적의 투항병을 모조리 죽였다는 말에 그만 기력이 다 빠지는 심정이었다.

고선무가 반간계에 속았다고 하자 태자는 안색이 변했다.

“그럼 멍청한 염탐꾼이 엉터리 정보를 들고 왔단 말인가?!”

체면이 깎인 태자도 자책했다.

고선무는 내심 욕하면서도 짐짓 태자를 위로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고해가 적이 된 이후부터 편할 날이 없군요. 또 다른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니 속히 호뢰관을 무너뜨리고 고해를 처리해야겠습니다.”

태자가 눈을 치켜뜨며 결연하게 말했다.

“좋소. 고해는 갈가리 찢겨 죽을 거요!”

태자는 아들에 관한 일을 꾹 참고 있었다.

송성에 다녀온 자들, 예를 들어 임충 같은 놈의 표정만 봐도 아들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때, 병사 하나가 다급히 천막으로 들어왔다.

“대원수, 보고드립니다!”

고선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대비하는 의미에서 고선무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무슨 일이냐?”

“병사들이 난리입니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병사의 말에 태자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게 무슨 소리냐? 어찌 된 일인지 고하라!”

임충이 병사에게 명령했다.

“병사들이 말하길, 집에서 온 서신이 가짜라고 합니다!”

순간 고선무는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금방 모든 것을 알아챈 고선무는 깊게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서신 문제를 방심했구나. 부저추신(釜底抽薪)이라……. 고해가 이런 음모를 꾸밀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앞서 그 상인들을 죽였어야 했거늘!”

부저추신이란, 솥 밑의 장작을 빼낸다는 뜻.

다시 말해, 적의 계략을 근본적으로 막는다는 의미였다.

태자와 고선무는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고해.

그놈은 대체 어떤 요술을 부리는 작자인가?

그놈이 팔십만 송군으로 하여금 계속 스스로 분란에 빠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

고선무는 이를 질끈 깨물며 말했다.

“그나마 팔십만 대군이라 다행이구나. 좀 더 늦었으면 송군 전체가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그때였다.

와아아!!!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간간이 엄청난 욕설도 들려왔다.

겁 많은 태자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고선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같이 나갑시다.”

* * *

호뢰관의 성루 위.

백발의 고진은 벽에 기대어 남쪽을 응시했다.

언제나처럼 진천산과 진양의가 뒤에 서 있었다.

진양의가 고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관내는 이미 정리를 마쳤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듣자 하니 고선무도 돌아왔다고 합니다. 곧 팔십만 송군이 총공격을 해올 것 같습니다만.”

고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의부님께서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이제는 고선무가 와도 소용없습니다. 우린 그저, 하하하! 의부님 말씀만 따르면 됩니다. 팔십만 대군? 곧 엉망진창이 될 겁니다.”

진양의가 물었다.

“어떤 준비를 하셨단 말이오?”

고진은 조용히 남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진천산이 물었다.

“기억하기로 사흘 전인가, 한 사십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호뢰관을 나가던데……. 전부 고씨 일족이더군. 그 사람들, 어디에 뭘 하러 간 것이지? 보아하니 별 능력도 없는 자들 같던데.”

고진이 웃으며 말했다.

“산적질 하러 갔지요. 나중에 연기로 신호를 보낼 겁니다.”

“산적질?”

진천산과 진양의는 서로 마주 보며 망연자실했다.

* * *

고선무 진영.

수많은 서신을 조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모든 노력을 다해 서신들을 확인했다.

그 결과 하루 만에 대략적인 상황을 알아냈다.

대진영 앞에는 고선무, 황태자, 임충 등이 나란히 섰다.

그들 앞에는 팔십만 대군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고선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막 돌아왔는데 또 이런 일로 너희와 마주하여 유감스럽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기를 바란다. 최초로 발견된 가짜 서신은 엊그제 상인한테서 온 편지다. 그 상인들 중에는 고해 쪽 사람도 있었다. 알겠는가? 이 또한 너희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고해의 계략이다.”

한 병사가 소리 높여 다그쳤다.

“가짜 서신은 고해가 보낸 상인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관병이 가져온 제 서신은 왜 가짜입니까?”

고선무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은 질문이다.”

일단 그는 병사들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내가 먼저 네게 물으마. 너는 네가 받은 서신이 가짜라고 정말 확신하느냐? 혹시 다른 사람의 서신이 가짜라고 하니 너의 서신도 가짜처럼 보이는 건 아니겠지?”

고선무의 질문에 그 병사는 말문이 막혔다.

“그, 그건…….”

고선무는 확언하듯 다부지게 말했다.

“네가 받은 서신은 너의 식솔이 직접 쓴 것이 확실하다. 너는 다만 남들을 보며 반신반의하고 있을 뿐이다. 남이 죽는다고 너까지 죽을 텐가? 자기 생각을 분명히 해라.”

그 병사는 머리를 숙였다.

고선무는 수많은 병사들을 죽 훑어보았다.

“고백하겠다. 이것은 전부 내 실책이다. 그 상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아니었어. 어쨌든 너희 식솔은 안전할 것임을 내가 보장하마. 다른 건 의심해도 내 보장만큼은 반드시 믿어라.”

하지만 병사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의심했고, 누군가는 수긍했다.

고선무는 말을 이어갔다.

“너희가 고향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승리가 눈앞에 있다! 십 리 밖에 호뢰관이 있다! 그곳을 무너뜨리면 이 전쟁도 끝난다! 이제 한 발자국 남았는데 여기에서 포기할 것인가?!”

고선무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고해의 음모 때문에 패배를 자초할 텐가? 비겁한 자로 귀향하겠다는 것인가? 부모의 얼굴을 어찌 마주 볼 것이냐? 아내와 자식은 또 어찌 마주할 것인가!!”

병사들의 기색이 숙연해졌다.

고선무가 다시 한번 소리 높여 외쳤다.

“약속, 또 약속! 나는 이제까지 너희에게 많은 약속을 했다. 하지만 너희 믿음을 위해 다시 약속한다! 호뢰관만 넘으면, 귀향시켜 주겠다! 이제 마지막이다! 저 호뢰관만 넘으면 된다!!”

짧은 시간 병사들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그래도 이곳은 전장이며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다시 한번 병사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스스로를 독려했다.

병사들을 살핀 고선무는 내심 크게 안도했다.

아직은 자신의 위엄이 통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임충이 나서서 말했다.

“아직 이해가 안 가느냐? 대원수는 한다면 하는 분이시다. 대원수는 군령을 하늘과 같이 지키며, 내뱉은 말은 반드시 책임지는 분이시다! 그 황태손도 대원수께서 죽였지 않은가?!”

그 말에 태자의 얼굴이 비통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태자야 어쨌든 병사들은 크게 웅성거렸다.

그들은 임충이 거짓말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임충 스스로 황태손에 의해 식솔을 잃었다.

그래서 임충이 직접 선두에 나서서 정변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병사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대원수가 송정서도 죽였는데 이제 더 이상 무엇이 두렵겠는가?

고선무는 매듭짓는 뜻으로 호쾌하게 말했다.

“좋다! 이제 밥을 먹고 만반의 태세를 갖춰 호뢰관을 공격한다!”

병사들이 일제히 와! 하며 소리를 질렀다.

태자가 급히 말했다.

“이렇게 빨리? 대원수는 쉬지도 못했잖소? 하루 푹 쉬고 공격하는 게 어떻겠소?”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러했다.

고선무의 몰골은 초췌해 보였다.

먼 여정을 급히 오간 데다 귀환해서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다.

하지만 고선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고해의 음모가 점점 더 무서워지고 있습니다. 또 당하기 전에 먼저 호뢰관을 쳐서 무너트려야만 합니다. 이제 더는 시간을 지체시킬 수 없습니다.”

고해가 지휘봉을 잡은 순간부터 고선무는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불과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이처럼 상황이 꼬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고선무는 모든 명운을 걸고자 내심 이를 갈았다.

‘시간이 없다! 빨리 마지막 전투 준비를 해야 돼!’

바로 그때였다.

우와아!!!

갑자기 천지가 떠나가는 듯 우렁찬 함성이 터졌다.

그 이유는 멀리 작은 언덕에서 나타난 남루한 남자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분분히 옆으로 물러나며 그 남자에게 길을 내주고 있었다.

이 남루한 남자는 바로 송정서였다.

“저기 봐라!”

“황태…… 아니! 송정서다!”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

송정서의 등장에 팔십만 송군은 기절초풍했다.

임충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송정서를 본 순간 그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경련했다.

임충은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거렸다.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