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민심을 잃다.
또다시 날이 환하게 밝았다.
송성의 약탈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한껏 욕심을 채운 자도 있었지만, 배고픈 자는 훨씬 더 많았다.
“우라질! 또 한발 늦었네!”
“또 없나? 숨겨진 고해네 점포 또 없어?”
여섯 개의 점포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폭도들은 굶주린 들개처럼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다녔다.
어딘가에 금은보화들이 널려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한순간.
털컹!
길가 한곳의 문이 마치 어서 오라는 듯 활짝 열렸다.
사내 하나가 방금 문이 열린 금포를 노려보고 있었다.
“명량금포? 여기도 고해네 점포가 틀림없을 거야!”
그의 말은 폭도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굶주린 들개처럼 약탈에 환장한 폭도들은 눈이 뒤집혔다.
“고해네 점포가 틀림없어!”
“여기 금이 무진장하대!”
“와! 이번에는 여기다!”
폭도는 명량금포로 쳐들어갔다.
막 문을 열었던 명량금포의 주인은 대경실색했다.
“우리 금포는 고해와 관련 없다! 어이! 당장 손 못 떼?! 가져가지 마! 이건 불법이란 말이다!”
누군가가 주인의 등짝을 후려쳤다.
금포 주인은 억!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폭도의 약탈 잔치가 시작되었다.
한 명이 서랍에서 금을 꺼내면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갔다.
누군가가 상자에서 돈을 꺼내면 다시 수십 명이 몰려들었다.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약탈하기 위해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덤벼들었다.
“하하하! 나도 이제 부자다!!”
“낄낄! 이 금거북 좀 보라고!”
“나는 금반지며 금목걸이를 얻었지!”
명량금포는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이곳이 고해네 점포가 확실할까?
맞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폭도들에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약탈할 값진 금품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저기도 고해네 점포다,라고 말하기만 그걸로 충분했다.
빼앗자! 네 것은 내 것이다!
아침 햇살 아래 송성 전체가 미쳐버렸다.
자욱한 연기와 거센 불길이 사방으로 번져갔다.
백성은 이제 더 이상 백성이 아니었다.
점포만이 아니었다.
몇몇 귀족들도 백성들에게 털렸다.
콰당!!
대문이 강제로 열렸고, 폭도들이 물밀듯이 안으로 쳐들어갔다.
“무, 무슨 짓이냐?!”
“으악! 썩 꺼지지 못할까?! 악!”
귀족들의 저택에서 비명이 이어졌다.
* * *
폭동 소식은 황실까지 전해졌다.
모든 대신들은 급히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황제가 용좌의 팔걸이를 손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송성이 왜 이 모양이 된 것이냐?! 군사들은 지금 뭐 하고 있는가?! 왜 폭동을 진압하지 않는 것이지?!”
한 관료가 무릎 꿇고 말했다.
“폐하! 큰일입니다. 소인이 군사들을 통제하려 했으나, 일부만 명에 따르고 나, 나머지는…… 그만 폭도로 돌변해 약탈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태자는 기겁했다.
“뭐요?!”
대신들의 얼굴 또한 파랗게 질렸다.
관료가 이마를 바닥에 대고 말했다.
“저희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조용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미쳐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태자는 한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고해…… 이것도 고해의 음모란 말인가?”
태자의 음성은 허탈하기만 했다.
이제 백성은 없었다.
모두가 도둑이고 강도였다.
송성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야흐로, 송국은 주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서 도둑과 강도가 설치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 * *
한편, 변성의 고선무는 진영 높은 곳에서 사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절반에 가까운 군사가 약탈에 정신없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고선무는 몸서리를 쳤다.
집집마다 불길이 일렁이고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비명과 고함, 울음소리가 끝없이 들려왔다.
지옥은 따로 있지 않았다.
바로…… 여기가 지옥이었다.
변성의 백성은 이제 고해의 군사들이었다.
고해의 명이면 바로 송성을 공격할 듯했다.
고선무는 호뢰관의 진영에 폭동이 일어났을 때도 자신의 팔십만 대군을 고해가 거느린 것만 같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송국의 온 백성이 고해의 손아귀에서 조종되고 있었다.
팔십만 대군의 변심도 고선무를 떨게 만들었는데, 하물며 지금 온 백성의 광란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고선무는 깊고 어두운 늪으로 빠져든 기분이었다.
“고해…… 그 한 사람이 육 국을 멸망시키는구나!”
저도 모르게 두려움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 * *
삼 일 후.
송국은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조용해졌다.
온 나라의 점포란 곳은 거의 약탈당해 살 수 있는 물건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청하종에서 나섰다.
당주라 불린 흑의 여인과 유년대사를 시작으로 청하종주, 송갑종주도 변성에 와서 고선무를 만났다.
고선무는 손님들을 공손하게 맞이했다.
흑의 여인은 변성 꼭대기에 서서 성안을 내려다보았다.
변성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오직 찬바람만 거리에 있는 낙엽을 쓸며 지나갔다.
거리에는 어쩌다 가끔 한두 사람이 보일 정도로 적막했다.
마치 폐허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문득, 흑의 여인이 감탄하며 말했다.
“벌써 한 달이나 되었네.”
유년대사는 착잡한 기색이었다.
“고해는 요괴나 다름이 없군요. 한 달 사이 나라의 민심을 이렇게 흔들어 놓다니. 무섭습니다.”
송갑종주가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민심을 잃다니요! 아직 백성들이 있잖습니까?”
고선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백성은 있으나 민심이 타락했습니다. 백성은 더 이상 송국의 강산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송갑종주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고선무는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약탈자는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송국에 대한 충성심을 완전히 잃었다고 장담은 못 하지만, 스스로 도둑질을 하며 나라를 망친 게 그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겠습니까?”
청하종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송국 백성은 나라를 위하지 않는다라?”
“사실입니다. 우리 진영의 군사들조차 싸우기 싫어합니다. 그래도 몇몇은 어려워진 나라를 위해 싸우려는 자가 있긴 하나, 어려운 일입니다. 고해가 있는 한은 말이지요.”
“하하하! 그렇군.”
청하종주가 박장대소했다.
유년대사도 감탄했다.
“백성을 도적으로 타락시킨다? 고해의 이 한 수는 실로 절묘하군요!”
송갑종주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이제 방법이 없는 건가?”
고선무가 말했다.
“더 무서운 사실이 있습니다. 진국이 군사를 움직여 공격이라도 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장날 것입니다. 지금 송국은 단기간에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청하종주가 유쾌한 듯 말했다.
“오 일 전에 진천산에게 들었는데, 고해가 진황에게 십오만 병력으로 출정하라고 했다더군. 겨우 십오만으로 어떻게 송국을 치냐고 했는데…… 고선무, 자네 말을 들으니 대충 이해를 하겠구만.”
고선무가 한숨을 쉬었다.
“고해는 하나부터 열까지 계산하고 책략을 세웠을 것입니다. 십오만 진군은 송국에 한을 품은 자들이지요. 그들이 지금의 송국을 공략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합니다.”
송갑종주가 분노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등신 같은 송황제! 대체 국정 운영을 어떻게 한 거야?!”
그의 기분이야 어떻든, 여인은 흥분한 표정이었다.
“고해는 지금 송성에 있지 않을까?”
고선무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아직은 거기 있을 겁니다.”
흑의 여인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송성으로 가.”
* * *
송성의 고부.
송성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성안 전체에 적막만이 흘렀다.
고해는 고한이 전하는 외부의 상황을 듣고 있었다.
“의부, 멸송계획 중 첫 번째로 군심을 흔들었고, 두 번째로 민심을 흔들었으니 대성공입니다.”
이 한 달 동안 고한은 많은 것을 경험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까지 의부가 이토록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해는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진군이 송국으로 오고 있다. 이제 송국은 군심과 민심을 잃었으니 세 번째 계획으로 들어간다. 바로 대신들의 마음을 잃도록 하는 것이지.”
고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백성이 풍비박산 난 지금 송국의 강산을 지킬 사람들이 또 누가 있느냐? 남은 건 대신과 귀족들이다. 만약 대신과 귀족들의 마음도 흔들린다면?”
고해는 자문자답했다.
“송국은 더 빠르고 쉽게 무너지겠지.”
후후후.
고해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 * *
송성, 황실 입구.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서 울부짖었다.
모두 얼굴빛이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폐하! 도적들을 체포하고 재물을 돌려주십시오!”
“폐하! 수많은 세금을 냈음에도 재산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폐하! 방 태사 하인이 우리 재산을 훔쳐 갔습니다!”
그들은 송국의 상인이었다.
저마다 소장(訴狀)을 들고와 황제가 처리해 주기를 탄원하고 있었다.
고해와 고한은 멀지 않은 다락방에 있었다.
둘은 지나가는 상인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고한이 멀리 있는 사람들을 짚으며 말했다.
“저 맨 앞에 있는 자들이 우리 사람입니다.”
고해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천천히 기다려 보자. 소장을 들고 오는 자들이 점점 많아질 테지. 송성뿐만 아니라 다른 성의 부자들도 달려올 것이다.”
“방 태사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솔직히 관상도 썩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지요. 하인을 시켜 점포를 약탈하다니!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하겠지만, 그래 봤자 이미 모든 증거가 수집되어 있습니다.”
고한이 그리 말하자, 고해도 피식 웃었다.
“방 태사. 그 쭈그렁 노인네가 그렇게 탐욕스러울 줄은 나도 몰랐다.”
“탐욕은 둘째치고, 다 늙은 자가 아이와 여자를 괴롭히는 건 도저히 못 봐주겠습니다. 열 명 넘는 아이와 여자가 그놈 손에 죽었다고 합니다.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인간이지요.”
“음! 그래서 벌을 받는 것이야.”
“의부, 송황제가 정말로 방 태사를 엄벌에 처할 수 있을까요? 그 작자는 명색이 송황제의 스승 아닙니까?”
“자신의 손자까지 죽이라 했던 사람이다. 과거 스승이었지만 지금 신하에 불과한 자를 왜 못 죽이겠느냐?”
고해의 판단에 고한이 동감했다.
“……하긴 그렇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고해가 불쑥 물었다.
“진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은 조당에 전해졌겠지?”
“아마 전해졌을 것입니다. 팔백 리 밖에서 빠르게 전진하고 있습니다.”
“일선의 송군이 순식간에 무너진 소식도 알려졌겠지. 딱할 노릇이군. 송국 사람들은 전쟁에 나서기를 원치 않는데, 송황제도 지금쯤이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고해는 다른 것에 대해 물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손해 본 자들이 누구일 것 같으냐?”
고한이 멀리 광장을 보면서 대답했다.
“황궁 앞에 엎드린 상인들과 약탈당한 자들이겠지요.”
“맞아. 저들을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까? 빼앗긴 물건을 다시 되찾아 줘야 하나?”
고한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불가합니다. 약탈자들은 빼앗은 금품을 숨겼을 겁니다. 이미 꿀꺽 삼킨 고기를 어떻게 다시 뱉으려 하겠습니까? 만약 강제로 빼앗는다면 또 폭동이 발생할 수밖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좋겠느냐?”
고한이 잠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책임을 물어야지요.”
“어떻게?”
“사람을 죽여 민심을 흔들고 백성의 분노를 일으켜야지요.”
“누굴 죽이면 좋을까?”
“백성이 날뛰면 송황제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누구든 죽일 수 있을 겁니다. 설사 태자라 해서 죽이지 못하겠습니까?”
대답하는 고한의 눈빛이 번뜩였다.
고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이 세 번째 계획이 제일 쉬운 것이지. 대세는 이미 기울어 뒤집기가 쉽지 않다. 우린 단지 순풍에 돛을 달고 빠르게 편안하게 나아가기만 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