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불멸의 패왕-21화 (21/243)

21화 대신들의 마음을 잃다

* * *

송성, 조당.

용상에 앉은 황제의 표정은 매우 굳어 있었다.

밑에 있던 대신들은 연신 좌불안석이었다.

태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변성이 하루 만에 패해 함락되었다고? 고선무는? 고선무는 무얼 했단 말이냐?!”

무릎 꿇은 장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모두 흩어졌습니다. 대원수의 군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도망쳐서 진군을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일부 백성은 진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진군은 무인지경으로 국경을 넘고 있습니다.”

우측 맨 앞에 선 유 승상이 탄식을 토해냈다.

“나라가 어지러운 마당에 설상가상 진군까지……?”

다른 대신들도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백성은 물론 군사들마저 싸우려고 하지 않다니. 모두가 우리 송국에 큰 실망을 한 것 같습니다. 이 또한 고해가 꾸민 짓이라면 참으로 가공스러울 노릇입니다.”

“처음 결정부터 잘못되었습니다. 고송은포가 털렸을 때 백성을 격려하지 말고 엄벌했어야 합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으니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일만 잘 처리했어도 민심이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들은 끊임없이 태자를 성토했다.

태자는 노기가 치밀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를 악문 태자는 황제에게 몸을 돌렸다.

“부황, 제 잘못입니다. 고해에 대한 적개심이 앞선 나머지 전한이 충고한 요사스러운 말만 들었습니다. 제가 전한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그저 후회막급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유 승상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전한? 전한이라.”

“왜 그러십니까, 승상?”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유 승상을 바라보았다.

“전한, 전한, 전(田)……? 이런!”

전한의 이름을 되뇌던 유 승상의 표정이 급변했다.

“폐하! 소인은 전한이 누구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전한의 전(田)자는 구(口)에 십(十)자로 되어 있고, 고(古)씨 역시 구자와 십자가 합쳐진 모양입니다. 십자가 가운데에 있다는 것과 위에 있다는 차이일 뿐이지요.”

황제는 두 눈썹을 떨며 물었다.

“전한? 고한? 그럼 전한이 고해의 수양아들인 고한이라는 건가?”

모든 대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자도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전한이 고해의 사람이라는 것은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해의 수양아들일 줄이야!

이것은 즉, 자신이 고해의 수양아들의 말만 듣고 고집을 피웠단 이야기가 된다.

이리되면 황제의 진노를 모면할 길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해!”

황제가 파르르 떨며 고해의 이름을 씹었다.

유 승상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폐하! 상황이 이리된 이상 서슴없이 고하겠습니다. 쳐들어온 진군을 막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백성들을 위로해 주어야만 합니다.”

황제는 불이 떨어지는 눈으로 유 승상을 직시했다.

“승상, 말해보시오! 어떻게 위로해 주면 좋겠소? 성난 민심을 다독여 백성으로 하여금 전쟁에 나가게 할 수만 한다면 짐은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소!”

유 승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백성들이 상인들에게 빼앗은 금품을 다시 돌려주는 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간도 없습니다. 국고를 털어도 보상을 해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백성에게 전하라! 그들이 자원해서 진군을 막는다면 짐도 그들의 요구를 가능한 한 들어줄 것이다!”

다급해진 황제는 어떤 조건이라도 수용할 작정이었다.

유 승상이 냉정한 기색으로 말했다.

“백성의 화를 달래고 원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모자를 없애고 실책을 범한 자도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백성의 믿음을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주모자? 주모자라면 고해와 고한 아닌가?”

“예, 폐하.”

“그들을 어떻게 찾아서 죽인단 말인가?”

유 승상은 태자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주모자를 찾을 수 없다면…… 그 아래 단계도 괜찮습니다. 큰 실책을 범한 자에게 책임이 돌아가야 합니다. 애당초 백성을 도적으로 만든 자가 누구입니까? 그리한 자의 책임을 반드시 추궁해야만 합니다.”

장내에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눈치 빠른 태자는 유 승상의 말뜻을 금방 깨달았다.

아연실색한 그가 벼락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유 승상! 지금 부황께 나를 죽이라고 요구하는 거요?”

방 태사의 안색 역시 해쓱해졌다.

“유 승상, 그게 무슨 말이시오?”

유 승상은 흐린 얼굴로 말했다.

“태자는 나라를 물려받아야 하는데 어찌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오히려 문제가 더욱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태자의 안색이 조금 펴졌다.

“그럼……?”

“애당초 태자의 제안에 바로 넘어간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결국은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함이었습니다. 폐하, 이번 사건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유 승상은 말과 함께 시선을 방 태사에게 돌렸다.

“그 혼란한 틈에 하인을 시켜 물건을 약탈하게 해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사람이 바로…… 방 태사입니다. 방 태사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대신들이 놀라서 웅성거렸다.

방 태사가 분노하며 소리쳤다.

“승상, 네 이놈! 폐하의 윤허(?)에 힘입어 한몫 챙긴 사람이 어디 나 혼자였단 말이냐?! 네놈도 나 못지않게 약탈하지 않았는가?! 여기 있는 대신 중 약탈하지 않은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가?!”

유 승상도 지지 않고 말했다.

“누구도 방 태사만큼은 챙기지 않았소! 한번 나가 보시오! 약탈당한 자들이 태사의 죄상을 떠들고 다니고 있소! 상소장에는 태사가 약탈한 목록을 나열해서 적어 놓았더이다! 우리 중 어느 누가 당신만큼 백성의 미움을 받고 있소?!”

한바탕 격렬히 비토하던 유 승상은, 돌연 방 태사를 향해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였다.

“사내대장부는 자신의 일에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오! 충신은 사사로운 목숨보다 대의를 생각해야 하오! 방 태사! 지금이야말로 존망의 위기에 달한 우리 송국을 위할 순간이오! 부디 나라를 위해 태사께서 결단해 주시오!”

다른 대신들도 허리를 숙이며 일제히 외쳤다.

“방 태사! 나라를 위해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방 태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네 이놈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황제는 찌푸린 얼굴로 고심하는 듯 보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선은 줄곧 방 태사에게 향해 있었다.

방 태사는 황제에게 넙죽 절하며 간절히 말했다.

“황상! 소인이 지시하긴 했으나, 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조백관들도 저와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 그러했듯 전부 고해의 음모입니다! 부디 통촉하소서!”

황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유 승상이 다시 한번 방 태사를 재촉했다.

“방 태사! 온 나라가 태사의 결단만을 고대하고 있소! 태사가 결단하지 않으면 우리 대송국은 회생할 가망이 없소이다! 이렇게 빌거니와, 부디 대의를 위해 결단하시오!”

모든 대신들도 다시 한번 절을 했다.

“방 태사! 나라를 위해 귀한 목숨 초개와 같이 희생해 주시오!”

방 태사는 벌벌 떨며 입을 달싹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을 지지해주던 대신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제자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자신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순간, 방 태사는 고해가 이 조당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 태사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때, 황제가 용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계단을 내려온 황제는 방 태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껏 예의를 갖춘 황제가 말했다.

“태사. 나라가 어렵소. 모두를 위한 길로 가주시오.”

방 태사는 온몸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고해가 백성만이 아니라 황제까지 쥐고 흔드는구나!’

방 태사는 비틀비틀 물러서더니 절망한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으하하하하하!”

잠시 후 웃음을 멈춘 방 태사가 황제에게 말했다.

“소인이 송황제를 삼대에 이르도록 모시면서 송국을 위해 칠십 년을 바쳤습니다. 온갖 풍상고초를 다 겪으면서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해결했는지 모릅니다. 허나, 돌아온 것은 결국……!”

황제인들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다른 길이 없었다.

황제는 물에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연꽃 뿌리라도 잡고 싶었다.

잠시 말이 없던 방 태사가 입을 열었다.

“폐하. 소인은 폐하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저 고해가 너무 무서울 뿐입니다. 소인도 이제는 나이가 많아 오래 살기는 힘듭니다. 부디 제 목숨으로 우리 송국에 천운이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처연히 말을 끝낸 방 태사는 관모를 벗었다.

“태사!”

모든 사람들이 방 태사를 향해 절을 했다.

* * *

다음 날.

방 태사의 죄목을 나열한 방문이 시장 입구에 나붙었다.

시장 입구는 구경하러 나온 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형장을 가리키며 떠들었다.

“방 태사다!”

“저놈 때문에 우리 집이 망했어!”

“폐하가 방 태사 집을 압수하고 재산을 돌려준대!”

방 태사는 형벌대에 무릎을 꿇고 흉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망나니가 다가오고, 영패가 던져졌다.

“사(死)!”

순간, 방 태사가 원한에 찬 저주를 토해냈다.

“고해! 저승에 가서라도 꼭 복수할 것이니라!!”

칼이 번쩍! 떨어져 내렸다.

피가 하늘로 튀고, 방 태사는 쓰러졌다.

직전까지 시끄럽던 소란이 어느덧 숙연한 적막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나라의 태사가 백성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처형되었다.

피를 목도한 백성들은 조금씩 냉정을 되찾았다.

희생양이 된 방 태사로 인해 원망이 어느 정도는 해소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로써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좋으련만…….

인파 속에서 지켜보던 고해와 고한은 미소를 지었다.

고해가 낭랑한 어조로 말했다.

“됐군. 방 태사가 죽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야지.”

* * *

송나라, 용성.

방 태사의 처형 소식은 곧바로 나라 전체에 퍼졌다.

각 성의 성주들 역시 그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용성 성주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재물 좀 약탈했다고 방 태사를 처형했단 말인가? 스승인 방 태사를 폐하가?”

소식을 전했던 집사는 근심에 찬 모습이었다.

“성주님, 설마 우리도……?”

성주가 버럭 소리쳤다.

“말조심해라! 방 태사는 도가 지나쳐서 백성들한테 원성을 샀어. 우리는 괜찮다. 아무도 모르니까.”

그때, 하인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성주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 성주는 재수 없다고 여기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하인이 종이 한 장을 성주에게 건넸다.

“보십시오. 용성 전체에 괴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누가 이러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를 펼쳐서 읽어본 성주는 갑자기 식은땀을 흘렸다.

“어, 어떻게 된 일이냐? 이 물건들이 전부 내가 지시해서 약탈한 것이라고? 이걸 쓴 놈이 누구지? 어떻게 이토록 자세히 나열할 수 있단 말이냐…….”

집사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고해가 아닐까요? 처음부터 작정하고 우리의 모든 걸 주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인도 덜덜 떨며 보고했다.

“성주님. 제가 듣기로 많은 사람들이 소장을 들고 송성으로 갔다 합니다.”

“뭐? 소장?”

성주는 눈앞이 핑 도는 걸 느꼈다.

방 태사 같은 대신도 민심의 분노를 사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마당이다.

하물며 성주는 일개 지방관에 지나지 않으니, 이번에 걸려들면 살아남을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울상이 된 집사가 말했다.

“성주님, 이제 어떡합니까? 진군도 쳐들어오고 있는데요.”

성주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넋 놓고 있어봤자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결심을 굳힌 성주가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 송국 황실을 따르는 건 의미가 없다. 관료들에게 전해라. 우리 용성의 모두는 진국에 투항할 것이다.”

집사와 하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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