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선천경(先天經) 1
* * *
진양의가 이끄는 진군은 송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약간의 저항이 있었으나, 그마저 얼마 가지 못했다.
진군이 도착하자 성문이 활짝 열리고 안에서 관료들이 나왔다.
그들은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올렸다.
“어서들 오십시오. 여러분을 노심초사로 기다렸습니다.”
환영하는 그들의 눈빛에는 애타는 간절함이 있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결이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이른바 무혈입성.
진양의는 내심 크게 놀랐다.
사실 군사를 데리고 출전했을 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송국에 들어와 보니 모든 예상이 빗나가고 있었다.
진천산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진군은 송의 강토를 수월하게 점령해 갔다.
아니, 점령이라는 표현조차 너무 과격하다.
그저 슬슬 이동하면서 땅을 줍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세상에, 이런 전쟁이 다 있다니!’
진양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 * *
송황제는 기둥에 머리를 들이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방 태사를 처형했더니 또 다른 악몽이 시작되었다.
각지에서 하루 종일 급보가 날아들었다.
물론 좋은 소식은 하나도 없었다.
하루하루 영토가 줄어들고 있었다.
진군은 피해를 거의 입지 않고 송성을 향해 다가왔다.
대신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황제조차 그들의 속내를 몰랐다.
대신들 역시 죄목이 적힌 서찰을 누군가로부터 받았다.
‘큰일이다!’
대신들은 불판 위의 개미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방 태사까지 죽였는데, 자신들이라고 무사하겠는가?
대신들은 허겁지겁 모여 논의했다.
자신의 살길을 찾기 위해.
그 시각.
황실 밖에서는 수많은 백성이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전국 각 성지에서 찾아온 백성, 그리고 송성의 백성까지 합세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황제가 방책을 찾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용상에 앉아 백성의 애원을 듣자니 어찌하면 좋을지 계속 고민했지만 최선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조용히 문이 열리더니 대신들이 황실로 들어왔다.
대신들을 이끌고 다가오는 자는 유 승상이었다.
황제는 무거운 얼굴로 맞이했다.
“다들 왔소? 오늘의 이 형세를 어찌하면 좋겠소? 듣자 하니 오 일 후면 진군이 송성에 이른다고 하는구려.”
대신들은 눈치를 보며 쉽사리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유 승상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 죄를 지어야 할 것 같사옵니다.”
황제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유 승상은 몸을 돌리더니 밖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 없느냐! 폐하를 끌어내리고, 성문을 전부 열어 진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황제가 벌떡 일어나서 눈을 부라렸다.
“뭐 하는 짓인가?!”
유 승상은 절을 올리며 비통하게 대답했다.
“폐하! 소인들도 이제 어쩔 수 없사옵니다! 도저히 고해를 감당할 방법이 없으니, 폐하께서 도와주십시오!”
대신들도 일제히 절을 하며 외쳤다.
“폐하께서 도와주십시오!”
황제는 수염까지 떨며 진노했다.
“너희, 너희가 어찌 감히……! 너희가 신하 된 몸으로 만승지존(천자)인 짐을 능멸하고도 무사할 줄 아는가?!”
유 승상이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서 어질지 못하시고 사리에 밝지 않으시니, 소인을 포함한 모든 대신들도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폐하의 친위병들도 제압되었습니다.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그리고 모두를 위해 폐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황제는 비틀거리다 결국 용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의 대(代)에 이르러 대송국이 끝난단 말인가?
황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대신들의 마음이 돌아섰다.
이제 황제는 모든 것을 잃었고, 더는 황제가 아닌 것이다.
* * *
진군의 행보는 이보다 더 평탄할 수는 없었다.
이건 전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여행이라 불러야만 했다.
오는 길에 많은 우대를 받은 진군은 호기가 흘러넘쳤다.
진양의는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처음 출전할 때와 지금의 기분을 비교한다면 능히 상전벽해라 할 만했다.
옆에서 진천산이 탄식하듯 말했다.
“아! 진태극, 바보 녀석. 처음부터 고해를 불렀으면 죽지도 않았을 텐데.”
이제 진천산은 고해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친이 거론되자 진양의는 비애를 느꼈다.
“애석하지만 그것도 선친의 자업자득이겠지요.”
진천산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둘 사이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느냐?”
“아시다시피, 고해는 사십 년 전 갑자기 등장했습니다. 부황께서는 고해를 높이 사서 곁에 두고 싶어 하셨지요. 그래서 당시 진국 최고의 미인이라던 진선아를 소개시켜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미인을 붙여 고해를 감시하기 위함이었겠군.”
“아마 그랬겠지요. 부황은 고해를 탐내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워하여 진선아를 시켜 고해의 모든 것을 보고하라고 지시했을 겁니다. 여하튼 진선아와 혼인한 고해는 부황과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진천산이 의아한 듯 물었다.
“고해가 네 선친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당연히 처음부터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해는 진선아에 대한 정이 깊어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선아도 고해의 정에 감화되어 부황의 지시를 따르지 않게 되었고요.”
“음!”
“그러는 동안 부황이 미혹되시어…….”
“미혹? 진선아에게 말인가?”
진양의가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
“예. 부황께서 어쩌다 그만 진선아에게 빠지시고 만 겁니다. 부황은 진선아를 곁에 두려고 했지만 진선아는 거절했지요. 부황은…… 진선아를 얻기 위해 고해를 죽이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진천산은 깜짝 놀랐다.
“뭣이?!”
진양의는 먼 곳을 보며 말했다.
“어느 날 부황은 매복을 펼쳐 고해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진선아가 끼어들면서 고해 대신 화살에 맞았다지 뭡니까.”
“그래서 진선아가 죽었느냐?”
“아닙니다. 하지만 상처 때문에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해가 어떻게 나왔겠습니까? 그는 복수를 다짐했겠죠. 하지만 진선아가 그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진양의는 다시 한숨을 쉬며 고개 저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황실에서 수양딸로 자랐기 때문에 고마움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잊지 않았지요, 그래서 고해의 복수를 만류한 것입니다.”
듣고 있던 진천산의 표정은 어느덧 숙연해졌다.
“고해는 결국 복수를 포기했지요. 하지만 그때부터 부황과는 사이가 멀어져 상인이 된 것입니다.”
진천산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진선아는 어찌 되었느냐?”
“십 년 전에 갑자기 죽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죽기 전 고해의 의붓아들 두 명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의붓아들?”
반문하는 진천산의 눈가에 이채가 번뜩였다.
“진선아가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그래도 고해는 재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를 이를 아이가 없어서 네 명의 의붓아들을 받아들였다고 하더군요. 그들의 이름이 진, 한, 당, 명이라고 합니다.”
“고진, 고한, 고당, 고명?”
“예. 아무튼 진선아가 죽고 나서 고당과 고명도 함께 사라졌다고 합니다. 진선아의 무덤은 현재 고부 안에 있습니다. 고진이 줄곧 고해의 옆을 지켰고, 고한은 송나라에 있었다고 합니다.”
진천산은 암암리에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태극의 자업자득이 맞구나.”
진천산은 씁쓸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때, 부하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보고드립니다. 곧 송성에 도착합니다.”
진천산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송황제는 저항할 것이 분명하다. 송의 강산을 어찌 손쉽게 내주려고 하겠느냐? 우리도 마땅한 대비를 갖춰야 할 것이다.”
진양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전투태세를 갖춰라!”
“예!”
한 장군이 대답과 함께 달려갔다.
진군은 조심스럽게 송성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행보였다.
송성이 바로 눈앞이니 큰 싸움을 각오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동안 나아가니 저 멀리 웅대한 송성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성문이 활짝 열리면서 문무백관들이 줄지어 나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유독 빼어난 풍모를 지닌 노인이 있었다.
두 손이 묶인 채 비통한 얼굴을 한 그는 다름 아닌 송황제였다.
진천산은 투구를 고쳐 쓰면서 중얼거렸다.
“내 살다 보니 이런 광경도 보는구나…….”
* * *
송성, 성루.
당주인 흑의 여인과 유년대사를 포함한 모두의 눈빛은 제각각이었다.
진양의와 진천산은 말할 나위조차 없었다.
송갑종주가 경멸하듯 말했다.
“임금을 팔아넘기다니! 대신들도 고해에게 매수당했군.”
고선무는 일그러진 얼굴로 즉시 반박했다.
“매수당한 것이 아니라 고해의 술수를 감당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고해는 은밀히 소성에 숨어들어 와서 대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기록했습니다.”
송갑종주는 정말 못마땅한 투로 중얼거렸다.
“고해의 술수는 악독하기 짝이 없군.”
그 말에 여인이 책망을 보냈다.
“술책이란 원래 냉정한 것이지. 적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전장이라면 더 그렇겠지. 그런데 악독하다고? 그대는 스스로 옹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송갑종주는 입맛을 다시며 시무룩해졌다.
늘 그렇듯 청하종주는 싱글벙글 웃었다.
문득,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고해도 저 안에 있겠지?”
* * *
송성, 버려진 어느 객잔 정원.
청하종주는 열 명을 대동하고 자리한 노인을 유심히 살폈다.
곧 그가 노인에게 물었다.
“그대가 고해인가?”
고해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청하종주님. 실망시켜 드리지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청하종주가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잘했네. 자네가 못 봐서 그렇지, 문무 대신들이 송황제를 묶고 나올 때 송갑종주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네. 정말 잘했어.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 것 같아.”
“과찬이십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무례한 짓도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약속을 지켰으니 종주께서도 약속을 이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선천경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고해는 족자 하나를 건넸다.
청하종주는 족자를 살펴보았다.
고해는 새삼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저는 근골이 이상하여 수행할 때 힘들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수준의 동급자와 비교해도 겨우 백분지 일에 해당하는 기를 흡수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기는 쉽게 흩어져버립니다. 하오니 부디 선천경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전이었다면 어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청하종주는 흔쾌히 승낙했다.
“좋다.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앉거라.”
“감사합니다.”
고해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청하종주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렸다.
청하종주가 다가와서 손에 있는 법결을 만졌다.
그러자 주변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내 구름 같은 자색 기운이 피어나고, 그것은 곧장 고해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휙!
자색 기운은 고해의 몸에 닿자마자 흩어졌다.
청하종주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영기를 넣어주는데 왜 막히는 거지?”
고해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막힌 것은 아닙니다. 기운이 제 몸에 들어왔다가도 구 할 이상 빠져나가는 바람에 이러한 현상이 생깁니다.”
청하종 형제들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고해가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말했다.
“다시 부탁드립니다. 단 한 번에 성공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에 들어온 기운의 대부분이 다시 빠져나가니까요. 후천경은 단전에 많이 쌓았으나, 충격요법이 부족해서 종주님의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그제야 청하종주는 확실히 이해했다.
“자네 근골이 확실히 문제로군.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키겠네.”
고해가 감격의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 기운을 불어넣을 테니 단전으로부터 영기를 느껴보게.”
“예.”
고해의 단전은 아주 작은 공간이긴 하지만 그 공간에 수많은 보라색 기운이 담겨져 있었다.
그 기운은 고해의 진기이긴 하나, 지금은 후천경으로 꽉 차 있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청하종주가 손을 내밀고 휙 저었다.
“천지영기(天地靈氣)! 내가 조절하노라!”
후우웅!
사면팔방에서 바람이 일더니 청하종주에게 모여들었다.
청하종주의 몸이 형광색을 띄고, 보라색 빛이 청하종주의 몸을 타고 두 손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퍽!
청하종주의 두 손바닥이 고해의 등을 쳤다.
고해의 몸이 움찔했지만 눈을 감고 버티면서 기를 단전으로 모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자색의 기운이 용솟음쳤다.
용솟음친 진기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고해는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어느 순간, 청하종주가 짜증내듯 소리쳤다.
“대체 이 거지 같은 체질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