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혁천각, 관기노인
* * *
삼 일 후, 송성.
고해는 용완청을 다시 만났다.
용완청, 유년대사, 용완청의 세 하인, 진천산, 송청서, 고선무, 고해.
광장에는 진양의와 대신들, 그리고 청하종과 송갑종 사람들이 고해 일행을 전송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이윽고, 용완청이 명령을 내렸다.
“이제 그만 가.”
“예!”
청의 하인이 대답과 동시에 손을 휘저었다.
갑자기 한 척의 거대한 배가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 배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거선(巨船) 양측에는 전술도처럼 보이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 그림이 배를 수면 위로 받쳐주는 것만 같았다.
고해는 거선을 보며 감탄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배가……!’
단순히 물살을 가르는 일반 배가 아니다. 말로만 들었던,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비주(飛舟)가 분명했다.
용완청이 맨 앞에 서고 나머지 사람들이 뒤따랐다.
갑판에 올라서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거선은 마치 궁전과도 같았다.
“이 배는 백운호(白雲號)라고 하지. 자, 날거라!”
짧게 설명한 용완청이 출발할 것을 지시했다.
다른 하인 하나가 높은 단 위로 올라갔다.
그 위에는 방향타를 위시한 여러 장치들이 있었다.
하인이 이것저것 누르자 거선이 곧 하늘 높이 올라갔다.
“조심히 가십시오, 당주!”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고해는 신기함에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옆에서 용완청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게 신기할 것도 없어. 이 거선은 제련의 명장이 고안하고 만들었어. 여기에 영석을 동력으로 사용하여 많은 진법을 넣었지. 한마디로, 이 배는 사람이 탈 수 있는 법보(法寶)의 역할을 하는 거야.”
“아, 그렇군요. 저도 이런 건 처음입니다.”
고해는 진정 감탄을 느꼈다.
하지만 고해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고해가 아래를 보자 비행선이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고공까지 올라가자 순간 동남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거선은 점점 더 속도를 높였다.
고해는 밑에 있는 땅의 위치를 외우기라고 하듯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마음을 짐작한 용완청이 짐짓 사무적으로 말했다.
“지리가 궁금하면 진천산에게 물어봐. 하지만 당장 급한 건 따로 있어. 수타에 인원이 부족하니 송청서와 진천산을 함께 데려가.”
고해는 다소 멋쩍게 웃었다.
“아, 예…….”
그는 진천산과 송청서를 찾았다.
한쪽에 있던 송청서는 고해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 옆으로 진천산도 다가왔다.
둘은 함께 인사를 올렸다.
“열심히 모시겠습니다, 타주.”
답례한 고해는 진천산에게 말했다.
“진천산, 내게 지리를 설명해줄 수 있겠나?”
고해의 자연스런 반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진천산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고해가 그의 상관이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구오도(九五島)라는 곳입니다. 구오도에는 다섯 개의 종문과 여섯 개의 범인들 거주 구역이 있습니다. 거주지마다 몇 개의 나라가 있는데, 이 열몇 개의 나라들이 전부 오대 종문의 속국입니다.”
“여섯 개의 범인 거주 구역? 그럼 육 국 천하도 범인들의 거주 지역이었는가?”
“예.”
“모든 국가들이 전부 오대 종문의 속국? 그럼 거기에 있는 백성들도 전부 오대 종문이 키워준 것이겠군.”
“예,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진천산의 설명을 들은 고해의 마음속은 복잡했다.
이 종문이란 곳은 세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조차 가만히 놔두지 않는 듯했다.
거선은 더 속도를 높여 망망대해와 같은 공간에 진입했다.
그제야 멀어지고 있는 땅이 보였다.
그렇다.
고해가 있던 곳은 하나의 거대한 섬이었다.
“저렇게 큰 것이 섬이라고?”
고해가 놀라서 말했다.
섬은 엄청나게 컸다. 단지 눈으로 짐작해 봐도 수십, 수백여 대국들의 광활한 영토를 합친 것과 비슷했다.
저렇게 큰 땅이 섬이라니!
땅만 큰 게 아니었다.
바다도 끝없이 펼쳐졌다.
지구의 어느 한 대륙과 대양을 보는 듯했다.
“저곳이 구오도라면, 육지라 할 만한 곳은 어디에 있지?”
고해가 궁금한 듯 물었다.
진천산이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은 신주대지(神州大地)라는 곳입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신주대지의 동북 방향에 있는 천도해입니다.”
“천도해(千島海)? 설마 그대의 말은 구오도와 같은 섬들이 천 개나 있다는 건가?”
고해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진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이지요. 작은 섬들은 포함하지도 않았습니다. 구오도 역시 중간 크기의 섬에 불과합니다.”
여섯 개의 커다란 나라가 있는 섬이 겨우 중간 크기라고?
고해는 할 말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또 하나의 거대한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선 역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빠르게 날아갔다.
“타주, 마침 밑에 천도해 지도가 있네요.”
옆에 있던 송청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아래쪽에서 커다란 동물 가죽을 꺼내 펼쳤다.
가죽 표면에는 천 개의 섬이 그려져 있었다.
각각 섬마다 이름이 적힌 게 보인다.
고해는 지도를 살폈다.
잠시 후, 고해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음, 이건…….”
“왜 그러십니까?”
“이 천도해라는 섬. 그 위치가 꼭 바둑판처럼 되어 있군. 이 섬들이 곧 바둑알 같아.”
송청서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요? 어떤 바둑판이 천 개의 바둑돌을 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 보통 바둑판에는 삼백육십일 개의 빈자리밖에 없잖습니까? 그런데 여기 섬은 천 개나 됩니다.”
하지만 고해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옆에 있던 유년대사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 타주, 방금 뭐라고 했나? 바둑판 같다고?”
고해의 표정이 아주 잠깐 괴이해졌다.
이내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냥 해본 말입니다.”
고선무가 유년대사에게 물었다.
“대사님, 타주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유년대사가 대답도 않고 고해를 보며 말했다.
“그냥 해봤다는 자네 말이 맞네.”
송청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진짜 바둑판이란 말입니까? 바둑판은 삼백육십일 개의 자리밖에 없잖습니까?”
용완청이 불쑥 나서서 반문했다.
“누가 그렇게 규정한 거지?”
“네?”
얼떨떨해하는 송청서에게 용완청이 설명했다.
“경도와 위도의 수가 삼십이 개일 경우 천 개의 바둑돌을 놓을 수 있어.”
고해는 무심코 한 말이 사실임을 알고 놀라서 중얼거렸다.
“정말 바둑판과 바둑알이었다니…….”
그럼 지금까지 바둑판 위에서 살았다는 말이다. 그것도 바둑돌 하나에 해당하는 곳에서 아웅다웅하며.
대체 누가 이런 거대한 바둑판을 만든 걸까?
용완청이 말했다.
“맞아. 이건 아직 끝나지 않은 잔국(殘局)이야. 진법도 있고, 전쟁도 있지만, 이를 끝낼 사람이 없어. 하긴 자그마치 천 개의 공간이 남은 잔국을 끝낼 사람이 누가 있겠어?”
고해가 급히 물었다.
“이 바국판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 섬은 일반적인 섬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행성 크기만큼 거대했다.
천 개의 행성을 바둑알로 펼친 바둑판인 것이다.
“혁천각 각주, 관기 노인. 팔백 년 전에 만들었지 아마?”
용완청이 대답하자, 고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 바둑판을 팔백 년 동안이나 건드리지 않았다는 겁니까?”
“음. 왜냐하면, 관기 노인이 죽으면서 이 바둑도 끝나버렸거든.”
“관기 노인은 누구와 바둑을 두었습니까?”
용완청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하늘(天).”
모든 사람이 아연실색했다.
그런 가운데 용완청의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관기 노인은 하늘과 큰 판을 벌였지. 하늘과 바둑을 둬서 이기면 우화등선할 생각이었을 거야. 하지만 아쉽게도 한 수 차이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면서 결국 큰 벌을 받게 되었어. 결국 하늘이 분노했고, 백만 제자들도 전부 죽어버렸다더군.”
용완청은 가죽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천도해는 원래 혁천각이 있던 곳이었어. 팔백 년 전에 관기 노인이 죽으면서 이 천도잔국(千島殘局)을 남겨두었는데, 지금도 그걸 풀 수 있는 답을 찾아내지 못했어.”
고해가 되묻듯이 중얼거렸다.
“천도잔국? 하늘과 바둑을 두었다고? 관기 노인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바둑을 관전하고 있어서 ‘관기’라고 불렀지.”
고해는 넋을 잃은 채 말했다.
“사람을 바둑으로 보고 천지를 바둑판으로 본다! 그야말로 패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입니다. 당주님이 말씀하신 그 팔백 년 전의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이 너무 한스럽습니다.”
용완청이 웃으면서 말했다.
“팔백 년 전의 바둑을 보지 못한 게 한이 된다고? 진송 전쟁의 양상을 보아하니 그대도 바둑 고수인 것 같던데, 언제 나와 바둑 한판 두지 않겠나?”
고해는 뭐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용완청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왜? 나를 이길까 봐 걱정돼? 양보하지 않아도 돼. 아니, 만약 바둑으로 나를 이기면 후한 상을 주도록 하지.”
고해는 겸손하게 말했다.
“삼십 년 동안 한 번도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둔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둑 둔다는 사람이 삼십 년이나 다른 상대 없이 혼자 두었다고?
용완청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고해가 말했다.
“당주, 거짓이 아닙니다. 저는 삼십 년 동안 내내 혼자 바둑을 두었습니다.”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고해가 다시 말했다.
“당주가 말씀하신 관기 노인이 하늘과 바둑을 두었다면 절세의 고수인 것 같습니다.”
용완청이 동의했다.
“당연하지. 하지만 아쉽게도 하늘의 힘이 너무 강해 관기 노인도 이길 수 없었어. 더구나 혁천각에는 고수가 득실거렸고, 영보(靈寶)들이 넘쳐났어. 심지어 복용하면 백 년을 더 산다는 ‘백반도수(百蟠桃树)’까지 있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제일 강력한 것이 관기 노인의 법보, 혁천기(弈天棋)였지.”
“혁천기?”
“우리 외조부가 말씀하시길, 혁천기가 모양은 평범한 바둑알 같아 보이지만, 고대 십육대 법보 중에서 아홉 번째를 차지했다고 했어.”
고대 십육대 법보는 고해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용완청도 흥이 난 듯 설명을 이어나갔다.
“열여섯 개 법보 중 일부는 세월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고, 또 일부는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어. 열여섯 개 법보의 서열을 구체적으로 따지기란 어려워. 그래도 하늘이 서열을 정하기로는 혁천기가 구위를 차지했다고 하더군.”
“음! 관기 노인이 죽은 후 혁천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라졌어. 누군가는 관기 노인이 하늘을 노하게 만들어 혁천기가 불에 타버렸다고 했지. 또 누군가는 사람 손에 들어갔다고도 말했고. 하지만 진상을 누가 알 수 있겠어?”
혁천기.
고해의 마음속에서 파도가 일었다.
고해의 눈썹 사이 공간에는 흑돌이 있었다.
그 흑돌이 바로 고해를 그가 살던 세상에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평범한 흑돌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설마, 그 흑돌이 혁천기는 아니겠지’
그 와중에도 용완청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대국에서 관기 노인이 패하고 팔백만 제자도 전부 불에 타서 죽고 말았어. 하지만 관기 노인이 죽기 전 마지막 판을 위해 살아 있는 눈을 찾아냈지.”
“살아 있는 눈이라 하시면……?”
“바로 우리의 목적지, 천원도. 혁천각의 본부이기도 해. 관기 노인이 죽기 전 이 천도에 작은 공간을 하나 만들었어. 사람들은 그곳을 선천잔국계라고 불러. 아마 백반도수도 거기 있지 않을까? 아쉬운 건 거기 들어갈 수 있었던 극소수의 사람들 전부가 불타 죽었다는 것이야.”
생각에 잠겼던 용완청의 다시 말했다.
“천도잔국 내부는 반드시 선천경 수련자들만 입장할 수 있어. 만약 선천경이 아닌 자가 들어가면 그 작은 공간에서 불에 타 죽게 돼. 정말 참혹한 최후가 기다리는 곳이지.”
“선천경에 올라야만 입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곳은 이백 년에 한 번씩 열려. 매번 수많은 강자들이 찾아와 혁천각의 보물들을 노리고 있지. 그러나 백반도수를 포함한 많은 보물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고해가 물었다.
“그럼 당주도 들어가실 겁니까?”
용완청이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아마도.”
“백반도수를 찾기 위해서입니까?”
“그보다는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
굳은 표정이 된 용완청이 말을 이어갔다.
“우리 어머니는 이십 년 전 갑자기 살해당했어. 지금까지 흉수를 찾아다녔는데, 아직까지 잡지 못했지. 혁천각 주민 중 한 사람에게 신기한 능력이 있다는데, 그에게 부탁해서 흉수를 찾아낼 생각이야.”
유년대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십 년 전 그날의 비극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해가 용완청에게 물었다.
“부탁하려는 그 사람이 당주의 어머니를 알고 있습니까?”
용완청이 대답했다.
“우연히 들은 바로는, 오래전 그 사람이 우리 어머니와 친분이 있었다고 하더군. 비록 팔백 년도 훨씬 전인 아주 오랜 옛날 일이지만.”
“그의 이름이 뭡니까?”
“미생인(未生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