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대명왕신
고해를 보는 몽태의 감정은 복잡했다.
“고 타주, 바둑 잘 봤네.”
“운이 좋았지요,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 저희가 도와드릴까요?”
“괜찮네. ‘미생인’을 찾는 일이 잘되었으면 하네. 그만 가보게.”
“예.”
고해는 머리를 끄덕였다.
일품당 제자들을 떠나보낸 고해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고선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타주님, 전에 송청서와 저들이……!”
“나도 알아. 지금은 그냥 놔둬.”
“예, 타주.”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고해 일행과 영생대사만 남았다.
“영생대사님,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영생대사는 고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고 타주, 조금 전에 고 타주가 작은 영패에서 뭔가를 꺼내는 걸 얼핏 본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게지?”
고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무슨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폭발하는 물건을 하나 구공자 쪽으로 던지려고 했을 뿐입니다. 효과가 있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만. 하하하, 엊그제 송청서와 그 배신자들도 피한 것을 보면 구공자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영생대사가 한숨을 길게 쉬면서 말했다.
“내가 얼마 전에 확인해 봤는데 말이네, 이쪽으로 내려가면 관기 노인의 법보가 있을 게야. 관심이 있으면 가서 확인해 보게나. 자네의 실력이라면 쓸모가 있을 것이야.”
“바둑이란 말이지요?”
고해가 호기심을 보였다.
“조금 전에 구공자 손에 있던 금색 바둑알, 기억하지?”
“……예.”
고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구공자가 바둑알 하나로 천지의 힘을 끌어다가 머리 아홉 개가 달린 뱀을 불러냈다.
“일반적으로 선천잔국계가 열린 후 삼 개월이 지나면 사방에서 금색 바둑알이 나타나네. 영천동굴 밑에 진법이 있는데 내가 깨버렸어. 그러니 지금 가면 바로 얻을 수 있을 거야. 단 금색 바둑알은 여기에서만 사용이 가능하고, 밖에 나가면 무용지물일세.”
고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영생대사님,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몽 타주님의 말씀으로는, 관기 노인이 제자들에게 외부인들을 신경 쓰지 말고 여기에서 자유로이 지내게 하라고 했다 들었습니다. 관기 노인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신 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자네의 생각이 맞네, 관기 노인은 외부인들에게 주려고 혁천각에 수많은 보물을 남겨두었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관기 노인은 대국에서 패하고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대국 하나를 만드셨네. 그러나 어떤 대국인지는 아무도 몰라. 오늘 이것도 대국 중의 하나일 수 있겠지. 이유는 묻지 말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게야.”
결국, 고해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한번 가보지 않겠나?”
영생대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 * *
선천잔국계 출구. 하얀 옷을 입은 세 남자가 황급히 달려왔다.
“고해가 스승님까지 죽였는데, 만약 우리가 송갑종 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를 죽이려고 할 거야.”
“서둘러. 고해가 송갑종 제자 사십 명을 죽였다고 말씀드리자. 그는 악귀가 틀림없어.”
“우리 제자들이 전부 고해 손에 죽을 뻔했다고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
세 송갑종 제자가 씩씩거리며 출구로 달려갔다.
조금 전에 고해가 자신들을 구해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해를 증오했다.
“멈춰라!”
냉랭한 목소리가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곧 흑포를 걸친 자가 그들을 막아섰다.
흑포로 몸 전체를 감쌌고 가슴에는 금색으로 된 태양이 새겨져 있었다.
“누구냐? 왜 가로막는 것이냐?”
송갑종 제자가 사색이 되어 물었다.
태양포를 걸친 사람이 말했다.
“출구는 우리 관할구역이다! 이제부터 문을 닫을 것이다! 들어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순 없다!”
“뭐?”
송갑종 제자들이 고개를 돌려보니 태양포를 걸친 사람들이 출구로 오고 있었다.
“헛소리 듣지 말고 얼른 나가자! 저들도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 걸릴 거다.”
“좋아!”
세 사람은 흑포인들의 말을 무시한 채 출구로 달려갔다.
“흥!”
흑포를 걸친 자가 코웃음 쳤다.
펑!
순간 맨 앞에서 달리던 송갑종 제자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으악!”
나머지 두 명은 기겁했다.
태양 흑포를 걸친 자는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동료의 머리가 터진 것이다.
“꺼져라!”
흑포인이 힘주어 말했다.
송갑종 제자가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너, 너……! 우리는 송갑종 제자들이다! 우리 종주님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흥!”
쿵!
또 다른 송갑종 제자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마지막 남은 송갑종 제자는 뒷걸음질을 치더니 돌아서서 도망쳤다.
“악마다, 악마야!”
흑포인을 그자를 쫓아가서 죽이지 않았다. 마치 나가려고만 하지 않으면 신경도 안 쓰겠다는 태도였다.
멀찌감치 도망친 송갑종 제자는 공포에 질린 채 흑포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흑포인들이 전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도대체 누구야? 누군데 저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거지?”
송갑종 제자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구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얼핏 봐도 일이백 명이 아닌 천여 명은 됨직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흑포를 걸치고 있었다.
흑포를 걸친 시람들의 맨 앞에서는 오색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뒤에는 흑포를 입은 천여 명의 사람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그들 중 십 장 크기의 관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무릎을 꿇지 않고 서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주상님께서 곧 여기에 오실 것이다. 이번에 우리가 온 목적을 알고 있지?”
“대명왕신 님, 명령을 내려주시옵소서!!”
흑포를 걸친 자들이 일제히 말했다.
“반드시 ‘와후’를 찾아오너라! 혁천각이 무너지더라도 찾아와!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죽는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주상님께서 와후를 보지 못하면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와후만이 너희의 살길이다!”
“네!”
흑포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대명왕신은 머리를 끄덕거리고는, 저 멀리에 있는 송갑종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대명왕신이 모자를 쓰고 얼굴을 가렸으나, 송갑종 제자는 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송갑종 제자는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등에서 식은땀만 줄줄 흘렀다.
* * *
선천잔국계의 관기전은 어둡고 침침했다.
열여덟 명이 가부좌로 앉아 있는데, 정확한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었다.
대전의 북쪽에는 관이 놓여 있었다.
대전 내의 유일한 불빛은 관을 비추고 있는 바둑판뿐이었다.
가로세로로 열아홉 개의 황금색 실선이 그어진 바둑판이었다. 바둑판 위에 있는 삼백육십일 개의 자리는 바둑알로 꽉 차 있었다.
삼백육십일 개의 바둑알 중 백돌이 이백 알, 흑돌은 백육십일 알이었다.
대전에 앉아 있는 열여덟 명은 쥐죽은 듯 조용히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슥!
흑돌 하나가 은은한 빛을 발하자, 모두가 흑돌을 응시했다.
한동안 빛을 발하던 흑돌이 점점 변하더니 백돌로 바뀌었다.
한 사람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백돌이 이백한 알이 되었습니다!”
다른 자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네, 장로님, 아직 흑돌 백육십 알이 남았습니다. 흑돌이 전부 백돌로 변하게 된다면……!”
대장로가 그 말을 잘랐다.
“신중하게 말하거라!”
입을 열었던 자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네, 제가 실언했습니다.”
대장로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선천잔국계가 또 시작될 거다. 외부인이 들어오면 많은 변수가 생긴다. 여기는 각주님의 관이 있는 곳이다. 오늘부터 나를 포함한 열여덟 명은 아홉 명씩 교대로 상주하여 이곳을 지켜야 한다.”
“예, 대장로!”
“구공자 쪽에는 경고를 보냈는가?”
대장로의 그 말에, 한 사람이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대장로님, 경고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구공자가 이번에 크게 한 방 먹었습니다.”
“응?”
“구공자가 운수를 움직였으나, 영생대사가 나타나는 바람에 후퇴했습니다!”
“영생대사가 왔다고?”
“영생대사가 각주님이 남기신 물건을 찾으러 온다고 말했다 합니다. 대장로님, 혹시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대장로가 한동안 침묵하더니 말했다.
“영생대사가 왔단 말이지? 그때 영생대사와 각주님이 대국을 펼치다가 영생대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면서 약속하셨다.”
“약속요?”
“각주님께서는 그 대국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영생대사의 마음을 보셨지. 감탄하시면서 나와 만나게 해주셨네, 구공자도 후퇴한 건 잘한 선택이야. 구공자는 영생대사의 상대가 안 된다. 각주님과 대국을 펼친 사람이 천도생사국을 깨는 건 식은 죽 먹기야”
“천도생사국을 파훼한 사람은 영생대사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입니다.”
“뭐?”
“이름이 고해라고 하던데, 일품당의 타주라고 합니다.”
대장로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일품당의 고해?”
“듣자 하니 미생인을 찾기 위해 들어왔다고 합니다!”
“미생인을 찾는다고? 무슨 일인지 아느냐?”
대장로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일품당 당주께서 찾으신다고 합니다. 대장로님, 미생인한테 알릴까요?”
대장로는 침묵을 지키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미생인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미생인은 미생인만의 사명이 있다.”
“예!”
“대장로님, 구공자가 이번에 운수를 조종하면서 금색 바둑알의 출현을 앞당겼습니다. 외부인들이 또 우리 혁천각의 보물을 약탈하려고 할지 모르는데, 왜 가만히 놔두는 것입니까? 저지해야죠.”
“이건 각주님의 명령이다. 우린 백반도수만 지키면 된다. 나머지는 가져가라고 해!”
“그렇지만……!”
그 사람은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됐다! 이건 명령이야!”
대장로가 으름장을 놓았다.
“예…….”
* * *
고해와 고선무, 진천산, 소유와 영생대사는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조금 전의 치열했던 전투에서도 끄떡없었고, 여전히 야광주가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샘물이 없었고, 무저갱 같은 갱도 세 개가 있었으며, 갱도 밑부분에 원형 옥판이 떠 있었다.
고선무는 원형 옥판 옆에 앉아서 손을 뻗어 옥판에 올렸다.
잠시 후,
윙!
옥판이 움직이더니, 금빛이 고선무의 손바닥으로 퍼져 나갔다.
고선무는 깜짝 놀라 손바닥에서 퍼져 나가는 빛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 금색 바둑알이 나타났다.
“아니 이건? 저번에 구공자가 운수들을 모으던 그 금색 바둑알 아닙니까? 이것이 어떻게 제 손에……?”
고선무가 경악하며 말했다.
고해도 의아한 마음이었다.
“고선무, 앉은 후 벌써 삼 일이나 지났다. 움직이지도 않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고선무는 손에 있는 금색 바둑알을 보면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몽롱한 상태에서 누군가 저에게 바둑을 가르쳐주었고, 수없이 바둑 대국을 펼친 끝에 그분이 저에게 이 금색 바둑알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꿈이잖습니까? 꿈에 나온 바둑알이 왜 저의 손에 있는 것입니까?”
고해 일행은 영생대사를 바라보았다.
영생대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허, 나도 잘 모르네. 나를 보지 말게나. 내 생각에는, 아마도 전술도에 숨어 있던 바둑알 같아 보이네.”
“전술도요?”
“이 원형 옥판도 사실은 혁천각 법보 중 하나일세. 관기 노인이 수련하면서 만든 것이지. 지금까지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내가 꺼내왔다네.”
영생대사가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영천으로 만든 전술도가 관기 노인이 만든 것이라고요?”
진천산은 눈시울까지 빨개지며 좋아했다.
그렇게 소중한 법보인데, 진천산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리 없었다.
영생대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전술도에는 적어도 세 개의 금색 바둑알이 있네. 고선무가 했던 방법으로 하면 되네. 여기서 천천히 해보게. 그리고 이 전술도도 잘 보관하고.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면 무리 지어 뺏으러 올 거야.”
“영생대사님은요?”
고해가 물어보았다.
금색 바둑알 세 개와 전술도를 자신들한테 주겠다니. 영생대사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