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출곡1
“헛!”
놀랄 새도 없이, 흑포인이 밟고 있던 나뭇가지 밑에서 두 줄기 밧줄이 나타났다.
밧줄 모양이 동그란 걸로 보아 누군가가 당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 밧줄은 순식간에 흑포인의 두 발을 묶어버렸다.
“뭐, 뭐야?”
화들짝 놀란 흑포인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 순간, 밧줄에 거대한 힘이 생기면서 흑포인의 다리를 순식간에 갈라놓았다.
“이놈들이 어디서!”
흑포인이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거대한 진기가 폭발하듯 밀려 나왔다.
두 밧줄이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한쪽 밧줄의 힘이 워낙 강해서 다른 쪽 밧줄이 끌려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흑포인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곧 금단경이 될 사람이 진기를 내뿜고 있는데 어찌 평범한 사람들이 밧줄을 당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밧줄 하나마다 수백 명의 악인들이 달라붙어서 당기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흑포인과 힘을 겨루었다.
흑포인이 강하긴 하지만, 그는 혼자였다. 천 명이 넘은 악인들이 밧줄을 당기니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너…… 너희들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냐!”
흑포인도 뭔가를 눈치채고 겁에 질려 소리쳤다.
그때, 나무 위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리더니 또 다른 밧줄로 흑포인의 목을 감았다.
또다시 수백 명의 악인들이 달려가 밧줄을 끌어당겼다.
흑포인의 몸에서 진기가 나오며 흑포인을 보호했다.
그 진기는 워낙 강력해서 수백 명의 사람으로도 역부족이었다.
“이놈들아! 죽고 싶으냐?! 크으윽!”
강력한 힘으로 흑포인의 목을 조이자 흑포인은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크으으윽!”
또 밧줄 두 개가 날아와서 흑포인의 양손을 묶고 당겼다.
흑포인의 몸이 ‘大’ 자가 되었다.
흑포인은 화들짝 놀라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선천경은 거대한 힘을 쓸 수 있었다.
선천경의 힘은 악인들의 힘만으로 제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손발이 묶인 상태라면 삼천 명의 힘으로 대항이 가능했다.
“됐다. 그 정도의 힘이면 된다. 힘을 더 썼다가는 사지와 머리까지 찢어지겠다.”
고해가 담담하게 말했다.
“예!”
주변에 있던 악인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악인들이 동시에 대답한다고?
흑포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건 반란이다! 반란이야! 악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야!
흑포인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목까지 꽁꽁 묶인 상태여서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고해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서 흑포인의 얼굴을 짓밟았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원형 격투장에서 내가 한 말을 기억하느냐?”
그때 흑포인이 채찍으로 고해를 때리면서 어디 한번 죽여보라고 비웃었다.
그리고 고해는 “그럴 거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흑포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악인들을 조종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상황이라면 자신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흑포인도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살려달라고 말하자니 목이 조여서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하아아.”
고해는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부하 나부랭이와 힘을 겨루어야 한다는 게 한심하기만 했다.
반 시진쯤 지나고, 고선무가 말했다.
“대인, 이놈이 정신을 잃었습니다.”
고해가 명령을 내렸다.
“동굴로 데려가서 고문해라.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막고.”
“예.”
악인들은 인정사정없이 흑포인을 몰아붙였다.
그들은 가면을 벗는 방법을 알기 위해 이를 갈며 고문했다.
고문 방법은 고해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삼천 명이 넘는 악인 중 고문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고문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고문은 아주 쉽게 끝나버렸다.
그런데 고선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대인, 알아봤는데, 안 좋은 소식입니다.”
“응? 왜?”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은 어떠한 법보로 만들었는데, 대봉방 제자들도 씌울 줄만 알고 벗기는 방법은 모른다고 합니다. 대봉방 방주 이위만 그 방법을 알고 있다는군요.”
고해도 그 말을 듣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악인들은 고해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해가 차가운 표정으로 지시를 내렸다.
“계속 고문해라. 그가 알고 있는 전부를 알아내야 한다. 대봉방에 대해서도! 대봉방에서 누구와 누구가 어떤 관계인지, 철저히 알아내도록 해!”
이 순간만큼은 고해가 악인들의 기둥이었다.
반드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많은 악인들이 흑포인을 추궁하러 가고, 고선무만 남았다.
“대인, 소인이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말해 봐.”
“제가 원형 격투장에 간 첫날에 송갑종주 송생평을 봤습니다!”
“송갑종주는 매일 원형 격투장에 간다. 대봉방 방주도 있었지?”
“예, 대봉방 방주는 가끔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지막 날에 흑포를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또 나타났습니다.”
“한 무리의 흑포인들?”
“네, 비록 흑포로 가렸으나 지팡이를 짚고 있는 늙은 할멈이었습니다. 송갑종주와 대봉방 방주가 버선발로 나와 공손하게 인사 올리는 모습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고해는 머리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 * *
우르릉, 쾅쾅!
천둥 번개가 치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삼천여 악인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희망 가득한 눈빛으로 산골짜기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이들의 희망이었다.
고해는 고선무, 진천산, 도파, 상관흔 등 사대 부장과 함께 동굴 입구에 서 있었다.
도파가 고해를 보며 말했다.
“대인, 전부 물어봤습니다. 우리 이 가면은 확실히 이위 방주만 벗길 수 있다고 합니다.”
“대봉방의 지형도 물어봤어?”
이번에는 진천산이 대답했다.
“네, 대봉방은 방내 구역, 도박 구역, 귀빈 구역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구역이 셋으로 나누어졌단 말이지?”
“예. 귀빈 구역은 도박꾼들이 머물면서 소비하는 공간입니다. 도박 구역은 바로 원형 격투장과 도박 물품을 파는 곳이고, 방내 구역이 바로 대봉방 제자들이 생활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고선무가 고해를 보며 물었다.
“가면을 풀려면 이 방주가 나서야 합니다. 대인, 이 방주를 움직일 방법이 있으십니까?”
도파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선무를 바라보았다.
이위가 멍청이도 아니고, 나서주겠나?
하지만 고해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가서 알아봐야겠다.”
고선무가 놀라서 물렀다.
“알아본다니요? 대인, 먼저 나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가서 이위를 만나봐야겠다. 너희들 중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고선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도와야 할 일이라면…… 혹시 우리가 잡은 놈의 흑포를 입고 그놈으로 변장을 해서 대인을 끌고 나가라는 말씀 아닙니까?”
도파가 나섰다.
“대인, 제가 하겠습니다.”
나갈 수만 있다면 도파는 뭐든지 할 생각이었다.
진천산도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대인.”
그때 옆에 있던 상관흔이 목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대인, 제가 가겠습니다.”
“응?”
사람들은 놀라서 고개를 돌려 상관흔을 쳐다보았다.
상관흔이 목소리를 변조했는데, 그가 변조한 목소리가 흑포인과 똑같았다.
고해가 웃으면서 말했다.
“흐음, 상관흔, 괜찮은 능력이군.”
상관흔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놀리지 마십시오.”
“좋아. 그럼 상관흔이 나랑 같이 가도록 하지. 가서 저놈의 흑포를 입거라.”
“예.”
상관흔은 재빨리 동굴로 들어갔다.
고해는 상관흔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걸 보면 쉬운 자가 아니었다.
아직 여기 악인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니 이들을 이용하는 것도 좋지만 조심해야만 했다.
흑포를 걸친 상관흔은 손에 채찍을 들고, 머리 위에 모자를 쓰고 있었다.
착!
“가자!”
상관흔이 큰 소리로 말하며 흑포인의 흉내를 냈다.
완벽한 그의 분장에 고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군!”
고해는 남은 사람들과 짧은 이야기를 나눈 후 상관흔과 함께 산골짜기 입구로 걸어갔다.
산골짜기 입구, 파란색 빛 앞.
“이놈들! 아직도 여기서 직무 태만이냐?”
상관흔이 큰 소리로 말했다.
상관흔의 목소리는 산골짜기 밖까지 들렸다.
경비병은 한쪽에서 비를 피하며 쉬고 있다가 흑포인의 목소리를 듣고는 이내 뛰어왔다.
“아! 선배님이시군요, 어쩐 일로 악인곡에서 나오십니까?”
한 경비병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내가 무슨 일로 왔냐고? 내가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모른단 말이냐?! 내가 지금 바로 방주님께 가서 네놈의 직무 태만을 까발려야겠다.”
상관흔이 다그치자, 경비병은 곧바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상관흔이 휘휘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됐다! 잔말하지 말고 방주님께서 이놈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으니 얼른 치우거라!”
“네? 아…… 알겠습니다!”
경비병은 곧바로 파란색 빛을 차단했다.
상관흔은 고해를 끌고 천천히 산골짜기를 빠져나갔다.
경비병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기, 선배님. 악인을 데리고 나가려면 친서가 있어야 하는데…….”
“하! 너의 직무 태만을 알리지 않은 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뭐? 친서? 방주님의 구두 명령이 바로 친서야! 좋아! 믿기 싫으면 직접 방주님께 가서 물어보자!”
상관흔은 싸늘하게 말하며 더욱 강하게 다그쳤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경비병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상관흔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해를 끌고 유유히 경비병 앞을 지나갔다.
“하! 어이없네. 저는 뭐 얼마나 잘나서? 제길, 잠깐 게으름 피웠다가 큰일 날 뻔했네. 퉤!”
경비병은 상관흔이 지나간 곳을 향해 침을 뱉었다.
상관흔은 고해를 끌고 한적한 곳으로 갔다.
고해는 곧바로 영패에서 흑포를 꺼냈다.
흑포의 모양은 상관흔의 것과 달랐으나 머리에 쓴 가면을 가리는 용도로는 그만이었다.
“대인, 이제 어디로 갑니까?”
상관흔이 고해에게 물어보았다.
고해가 옷을 입으면서 말했다.
“귀빈석에 있는 대장간으로 가자.”
비오는 날, 거의 모두가 모자를 쓰고 비를 피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았다.
경비병들도 엄격하게 검사를 하지 않아서 쉽게 지나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곧장 길거리로 나왔다.
“대인, 바로 여기입니다. 놈을 고문했을 때, 여기가 제일 좋은 대장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병기들을 주조합니다만, 진법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고 합니다.”
상관흔이 대장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해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대장간을 바라보았다.
상관흔이 그 모습을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대인, 대장간에는 왜 가시려고 합니까? 병기나 법보들은 근처 점포에도 있잖습니까?”
“내가 찾는 물건은 그런 곳에 없다. 봉인된 능력을 풀어주는 물건이니까.”
“예?”
상관흔은 깜짝 놀랐다.
봉인을 해제하려면 강력한 전류가 필요하다. 이 땅에 많은 법보가 있으나 전기를 발생시키는 법보는 많지 않았다.
그런 법보를 만드는 사람이 너무 드물어서 만들지도 못하는데, 이런 작은 점포에서 가능할까?
고해는 상관흔의 의문을 뒤로한 채 대장간으로 갔다.
비 오는 날이어서인지 대장간에도 손님이 없었다.
두 사람은 대장장이를 만났다.
고해가 열몇 장의 도면을 꺼냈다.
대장장이들과 상관흔은 그 도면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요? 동관자(銅管子) 아닙니까? 이거를 어디에 쓰게요? 이런 쇠사슬이야 많지만……?”
대장장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관흔도 도면을 보고 있었다.
관자 하나하나를 맞춰서 뭐 하려는 거지?
“어디에 쓸지는 신경 쓰지 말고, 만들 수는 있나?”
고해가 대장장이에게 물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