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바둑을 두다
고해는 산골까지 가운데에 서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련자들을 바라보았다.
오십여 명의 수련자가 칼을 들고 고해를 응시했다.
“고해, 금반도는 어디 있지?”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고해는 쓴웃음을 지었다.
“금반도?”
“그래! 설마 벌써 먹은 건 아니겠지? 금반도만 내놓으면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자들도 앞다투어서 소리쳤다.
“금반도를 꺼내!”
“살고 싶으면 금반도를 내놓아라!”
고해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금반도는 나한테 있다.”
수련자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꺼내!”
“어서 내놔!”
고해가 냉랭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자격 미달이야!”
“그렇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그리 말하자, 수련자들이 흉악한 표정으로 칼을 들었다.
고해의 얼굴에도 살기가 가득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소리쳤다.
“멈춰!”
그리고 곧 녹색 옷을 입은 남자가 뛰어왔다.
“대사형?”
수련자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해도 싸늘한 눈빛으로 그 남자를 응시했다.
녹색 옷을 입은 남자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빠르게 뛰어왔다.
수련자들이 그를 향해 너도나도 말했다.
“대사형, 고해를 찾았습니다. 주변에 악인들도 없습니다!”
“네, 대사형, 고해 혼자 있습니다!”
“금반도를 뺏어서 스승님께 바치지요!”
“대사형, 같이 고해를 죽입시다!”
녹색 옷을 입은 남자가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 입 다물어라!”
“예?”
“대사형?”
수련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녹색 옷을 입은 남자는 곧바로 고해한테 머리 숙여 사과했다.
“고 선생, 우리 애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하시지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대사형. 뭐 하시는 것입니까?”
“대사형…… 왜…….”
“그 입 다물어! 멍청이들아!”
수련자들은 멍하니 입을 다물고 녹색 옷을 입은 남자만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고해도 차가운 눈으로 그자를 쳐다보았다.
녹색 옷을 입은 남자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됐네.”
고해가 마침내 머리를 끄덕였다.
녹색 옷을 입은 남자가 안도하는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고 선생!”
고해가 그에게 물었다.
“저 앞이 정용종인가?”
“그렇습니다. 이 산을 넘어 이십 리만 더 가면 바로 정용종입니다.”
고해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형님……!”
수련자들은 녹색 입은 남자를 보며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끄럽다!”
수련자들은 가슴이 답답했다.
“대사형, 고해를 왜 그냥 보내는 겁니까?”
“예, 대사형. 우리는 오십 명이나 됩니다. 뭐가 걱정입니까?”
“구오도에 온 이유가 바로 금반도 때문 아닙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요? 고해는 혼자였고 우린 오십 명이었습니다. 왜 그냥 보내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수련자들은 불만을 터트리며 모두 녹색 옷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녹색 옷의 남자는 고해가 까마득한 곳까지 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오십 명? 고해는 혼자라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우리 오십 명이나 있지 않습니까?”
“보름 전에 고해 혼자서 송갑종의 수련자 오천 명들을 죽인 건 알고 있느냐?”
“네? 설마요?”
수련자들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
수련자들 역시 대사형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혼자서 오천 명을 죽였다고?”
수련자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들은 고해가 걸어간 길을 멍하니 보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녹색 옷의 남자가 그들을 보며 말했다.
“생각해 봐라. 고해가 여기까지 오는 길 내내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왜일까?”
“그러네, 왜 그러지?”
“다른 사람들도 송갑종 사건을 알고 있거나, 혹은 눈치도 없이 달려들었다가 결국…….”
녹색 옷의 남자가 사제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수련자들이 조용히 고해의 뒤를 밟고 있었다.
“고해는??”
“저 앞에서 가고 있습니다.”
“이런 망할! 고해를 죽일 기회를 이렇게 버리다니! 흥! 따라와! 고해가 왜 정용종에 왔는지 보자고!”
그들은 빠르게 정용종 방향으로 향했다.
* * *
고해를 뒤쫓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고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행적을 숨기지도 않았다. 숨길 이유도 없었다.
그는 도리어 당당하게 다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일품당 수타주인 만큼 공공연한 세력은 그를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고, 그가 행한 일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멀리서 구경만 할 것이다.
얼마 후, 정용종에 도착한 고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는 이미 수많은 수련자들이 모여 있었고, 정용종은 구름안개에 휘감겨 있었다.
“흠, 대단하군.”
거대한 섬 하나가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거대한 섬은 원추형으로, 윗면은 반듯하고 밑면은 뾰족하여 기묘하기 그지없었다.
부도(浮島)의 주변에는 사각형 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고, 구름 위에는 신기하게도 바둑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구름 바둑판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정용종 주변을 에워싼 형태였다.
수련자 한 명이 바닥에 앉자 구름 바둑판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수련자는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수련자도 덩달아 손을 내밀자 구름 바둑판은 마치 절반이 잘린 듯, 아니 복제라도 한 듯 똑같은 잔국이 그의 앞에 놓였다.
그도 마찬가지로 신중하게 구름 바둑판의 잔국을 풀기 시작했다.
“바둑?”
고해는 그 광경이 의아하기만 했다.
“고 타주님, 이것은 정용종에서 만들어낸 잔국대진입니다. 매 하나의 잔국을 파훼할 때마다 상품 영석 열 개를 상으로 주고 있습니다.”
수련자 한 명이 옆에서 말을 걸었다.
고해는 그 말에 이마를 찌푸렸다.
“응?”
수련자가 설명을 이었다.
“총 삼천 판 잔국으로 이루어졌고 지금은 오백 판이 해제된 상황입니다. 원래라면 한 달간 백 판밖에 해제할 수 없었겠지만, 천도해의 삼대기왕(三大棋王)이 나타나면서 빠른 속도로 진행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쿵!
멀리서 굉음이 울렸다.
누군가가 잔국 하나를 해제한 듯했다.
순간 구름 바둑판은 자리에서 부풀어 오르며 큰 구름으로 변하더니 공중의 부도를 향해 날아갔다.
부도는 점차적으로 희미해져 갔다.
게다가 옆에 있던 똑같은 잔국의 바둑판은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해제가 된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는 듯했다.
그때 안개로 감싼 대진 속에서 노란 옷차림을 한 남성이 신속하게 걸어 나왔다.
“고 타주님, 보세요. 저자는 정용종의 제자입니다.”
옆의 수련자가 말했다.
정용종의 제자는 열 개의 상품 영석을 꺼내어 잔국을 해제한 사람에게 건넸다.
주변의 수련자들은 눈독 들이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열 개의 상품 영석은 곧 십만 개의 일반 영석과 마찬가지다. 얼마나 엄청난 숫자인가.
“이 잔국을 푸는 이유는 무엇이냐?”
고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옆에 있던 수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한 달 반 전부터 진행된 일입니다. 바둑 실력이 높은 사람들은 모두 정용종 내부에 초청받았으니, 아마도 그들은 알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네가 아까 얘기한 삼대기왕도 안에 있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삼대기왕은 모두 천도해의 원영경 강자들입니다. 그들의 바둑 실력은 뛰어넘을 자가 없을 정도로 강합니다.”
수련자는 종의 내부에 진입하고 싶으면 반드시 잔국을 해제해야만 하고, 많이 해제할수록 더욱 환영받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고 타주님도 선천잔국계에서 바둑 실력이 남달랐지 않습니까? 한번 도전해 보시지요. 최소 한 판만 이겨도 열 개의 상품 영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자들도 고해를 부추겼다.
“맞습니다. 고 선생님도 한번 도전해 보세요! 이 잔국은 저희도 오랫동안 연구해 봤지만 쉽게 풀리지가 않습니다!”
고해는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하긴 한데, 정확한 것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설명하던 사람이 갑자기 공중으로 뛰어올라서 정용종 주변을 맴돌고 있는 바둑판을 잡았다.
후!
구름 바둑판은 두 개로 나뉘어 하나는 계속 공중에서 맴돌았고, 복제된 바둑판은 그 사람에게 끌려와 고해의 눈앞에 놓여졌다.
“고 선생님, 도전하시겠습니까?”
그가 정중하게 물었다.
고해는 바둑판과 정용종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정예는 저기 안쪽에 있을 것이다.
뭔가 위험이 느껴졌지만, 그도 나날이 실력이 늘면서 구오도의 용맥에 대해 조금은 궁금하던 차였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자.’
전에는 실력이 부족하여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좋다!”
고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아 바둑돌을 올리기 시작했다.
구름 바둑판에는 바둑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는 바둑돌을 집어 바둑판에 올렸다.
착!
고해가 바둑돌을 자리에 놓자, 잔국도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수련자들이 모두 고해의 바둑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 *
정용종 내부.
정예와 용완청은 다시 대치한 상태에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용완청의 몸은 인용옥의 보호막이 감싸져 있었기에 정예도 어찌할 수 없었다.
“흥, 용완청. 융통성 없게 굴지 마라. 난 그저 널 죽이고 싶지 않을 뿐이야. 아니면 그 인용옥조차도 널 구하지 못할 것이다.”
“정예, 나를 죽이고 싶지 않다고? 네가 지금 날 감금하고 있는 것이 나를 죽이는 거랑 뭐가 다르지?”
용완청이 차가운 표정으로 비웃듯이 말했다.
정예는 싸늘한 눈빛으로 용완청을 째려보았다.
용완청이 다시 그를 비아냥거렸다.
“나의 외할아버지가 걱정되나? 내가 죽지 않으면 외할아버지도 추궁하시지는 않겠지만, 내가 죽으면 외할아버지도 너를 끝까지 추궁하시겠지? 하하하, 솔직히 말해봐라. 넌 나의 외할아버지가 두려운 거지?”
화가 난 정예가 싸늘하게 말했다.
“용완청, 나의 세력이 존재하는 한 이 용맥은 반드시 내가 가져갈 것이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겠다. 한 번만 더 융통성 없게 굴었다가는…… 흥! 너도 너의 어머니와 똑같이 죽여주마.”
“뭐?”
용완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정예를 바라보았다.
정예는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정동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모!”
곧 정동이 대전으로 들어오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용완청을 바라보았다.
“일품당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흥!”
용완청은 콧방귀를 뀌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정예가 싸늘하게 물었다.
“고, 고해가 왔습니다.”
“뭐?”
정예는 안색이 굳어졌다.
“고해?”
용완청 역시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그 악마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저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대봉방도 파괴하고 송갑종도 파괴한 그가 이제는 저희 정용종까지 찾아왔습니다.”
정동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모, 어떻게 할까요? 고해는 흉악한 자입니다. 제자의 말에 의하면 고해가 송갑종 모든 제자들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혼자서요!”
그 말에 용완청이 경악했다.
“혼자서? 송갑종 제자를 전부 죽였다고? 그럴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