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기왕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반년 전 갓 선천경이 되었는데, 얼마나 됐다고 송갑종 제자를 전부 학살할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오륙천 명은 될 텐데.
정동은 용완청을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알아봤는데, 사실이라고 합니다.”
용완청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용완청은 그제야 자신이 고해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천잔국계에서는 바둑 실력이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바둑 실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이 바로 그의 능력인가 보다.
순간, 용완청은 두 눈을 반짝였다.
고해가 왔다면, 혹시……?
정예가 고개를 돌려 용완청을 바라보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용완청, 너 혹시 고해가 널 구해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응?”
“포기해. 내가 지금 당장 가서 그를 잡아다가 너의 앞으로 데려오마.”
정예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정동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이모. 지금 잡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왜?”
두 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정동을 바라보았다.
“고해가 지금 잔국을 풀고 있습니다!”
“잔국을 풀고 있는 게 어때서?”
“고해는 짧은 시간에 이미 백 판의 잔국을 풀었습니다.”
“백 판?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지? 시간은 얼마나 걸렸느냐?”
“네 시간 걸렸습니다.”
“그럴 리가! 네 시간 내로 어떻게 백 판의 잔국을 풀 수 있단 말이냐?”
“사실입니다. 고해는 오 국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으로 물 흐르듯 잔국을 풀고 있습니다. 마치 초보자와 겨루듯이 너무 쉽게…….”
“오 국을 동시에 진행한다고? 무슨 뜻이지?”
“다섯 판의 잔국을 동시에 두고 있단 말입니다.”
“……!”
정예는 물론이고, 용완청도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고해의 바둑 실력은 역시 예사롭지가 않구나!”
“이모, 그래도 잡아오시겠습니까? 그가 네 시간 사이에 이미 백 판의 잔국을 풀었고, 계속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삼대기왕보다 더 대단한 실력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정예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고해를 잡는 것보다 삼천 잔국을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좋다, 계속 풀라고 해!”
정예가 냉정하게 말했다.
용완청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용완청은 이제야 유년대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쓸모 있는 사람은 그의 능력이 곧 너를 제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것이다.”
“용완청, 다시 잘 생각해 봐라.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정예가 냉랭하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정예, 네가 날 죽여서 흔적을 없애려는 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려는 것 아니냐? 그럼 정용종의 사람들도 모두 죽일 거냐? 한 명도 안 남기고? 하긴 죽은 사람만이 말이 없는 법이지!”
용완청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정예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지만, 시선은 정동을 향하고 있었다.
정동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돌려 정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이 정예를 따라 걸어갔다.
쾅!
대전의 문이 다시금 닫혔다.
“흥!”
용완청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 * *
정용종 정원.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수백 명의 수련자들이 둘러서서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스승님의 바둑판은 마치 유수와 같습니다.”
“목소리 낮춰라. 스승님께선 지금 남해기왕(南海棋王)과 속도를 겨루고 있다. 스승님께 피해를 주지 마라.”
“예!”
“사형, 스승님도 북해기왕(北海棋王)이신데 왜 남해기왕과 단순히 바둑으로 승부를 보지 않는 것입니까? 왜 굳이 이런 방식을 택한 것입니까?”
“그러게. 한 판 이기면 열 개의 상품 영석을 획득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것이 소중할지 몰라도 스승님한테는 별것이 아닐 텐데…….”
“저 남해기왕도 좀 그런 게, 엄청나게 먼 곳에서 구오도까지 와서 바둑을 두다니,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기 방 안에 있는 사람들과 연관된 일 아닐까?”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며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다락방을 바라보았다.
북해기왕이 다락방에 대해 얘기한 적 있었다. 자신을 따라 정용종에 진입한 사람들에게 아무도 그곳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남해기왕 쪽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그곳을 건드리지 않았다.
다락방에서는 흰옷 차림의 남성이 창가에 기대어 여유롭게 술을 마시며 실눈으로 북해기왕의 바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락방은 시야가 넓게 트여 있었다. 덕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는 바둑판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편에 있는 남해기왕의 바둑판까지 볼 수 있었다.
“남해기왕, 북해기왕? 나의 대타가 되려면 나의 전승이 필요한 법이지. 너희들끼리 잘 겨루어 보거라. 너희들 바둑 실력이 대체로 마음에 드는구나.”
흰옷 남성은 여유롭게 술을 마시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때, 회색 옷차림의 제자가 뛰어오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구공자님, 고해도 왔습니다.”
구공자가 실눈을 뜨며 물었다.
“뭐? 고해?”
“그가 지금 밖에서 잔국을 풀고 있습니다. 속도가 엄청납니다.”
구공자는 두 눈이 반짝였다.
“고해도 왔단 말이지? 뭐, 나쁘지 않군.”
정용종 외부에는 수많은 수련자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멀리서 고해를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그 와중에 수련자 몇 명이 오르내리며 고해를 위해 잔국을 옮겨주었다.
고해 앞에는 다섯 개의 바둑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약 일천 개의 상품 영석이 쌓여 있었다.
휙휙휙-!
고해가 손을 휘두르자, 다섯 개의 상품 영석이 그를 위해 바둑판을 옮겨준 수련자들에게 날아갔다.
“고 선생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섯 명의 수련자들은 기쁜 표정으로 영석을 하나씩 받아들었다.
“정용종 제자야! 고 선생님께서 또 잔국 다섯 판을 풀었다! 얼른 오십 개의 상품 영석을 못 가져오겠느냐?”
“설마 너희들 지금 와서 잡아떼려는 건 아니지?”
“빨리 가져와라!”
수련자들이 마치 자기가 이긴 듯 소리를 질렀다.
정용종의 제자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곧바로 많은 영석을 가져왔다.
슈슈슈슉!
고해가 또다시 손을 휘두르자 상품 영석 열 개가 날아갔다.
“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지켜보던 수많은 수련자들도 욕심이 났다. 고해가 비록 악질이긴 해도 건드리지만 않으면 그 역시 관대했다.
더구나 상품 영석이 일만 개의 일반 영석에 해당하는데 고해가 아무렇지 않게 상금으로 나눠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 종주님이 이처럼 관대하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은 고해의 신분과 악명을 잘 알고 있지만, 그의 부지런한 손놀림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해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고해는 바둑을 두면서도 주변 수련자들의 표정을 살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게 바로 고해가 원하던 효과였다.
진천산에게 수련자들 모집해 오라고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이 직접 표현하고 증명해 보이면서 천천히 천금으로 인재를 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잔국을 하나도 풀지 못하는데, 고 선생님은 동시에 다섯 판씩이나 풀고 있다니, 참 대단한 실력이군.”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다.
“선천잔국계에서 운수는 곧 바둑 실력으로 정해지는 것이지. 그때도 고 선생님은 혼자 십만 명의 수련자들을 상대했으니 바둑 실력만큼은 이미 오래전에 검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네.”
“그러게 말이야. 내가 봤을 땐 삼대기왕도 고 선생님이 이길지 몰라.”
“아닐 수도. 삼대기왕도 실력이 만만치 않아.”
사람들은 갑론을박하는 와중에도 고해는 집중해서 다섯 개의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익숙한데?”
고해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섯 개의 잔국을 쳐다보았다.
눈앞의 잔국뿐만 아니라 앞서 풀었던 백여 개의 잔국도 어딘가에서 본 듯했다.
하지만 기억 속에는 이런 잔국이 없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거지?’
고해는 한편으로 바둑돌을 올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접했던 바둑판을 떠올렸다.
순간 고해의 얼굴색이 서서히 변해갔다.
드디어 떠올랐다. 왜 이렇게도 익숙했던 것인지.
확실히 이전에 본 적이 있는 대국이었다. 다만, 그때는 이런 형태가 아니었다.
“이십구 천지종횡 바둑판?”
고해의 안색이 굳어졌다.
고해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대진은 '이십팔 천지종횡대진'이다.
그런데 눈앞에 놓인 것은 이십구.
대봉방에서 봉인대지의 용맥과 용 꼬리의 바둑판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 당시 고해는 바둑을 두다가 중도에 멈췄었다.
바둑을 두면서 바둑에서 위협을 느꼈고,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위협하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래서 바둑을 한 번만 이기고 거기서 멈췄었다.
하지만 그 바둑은 고해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둑판에 매번 바둑돌을 올릴 때마다 천만 가지 변화가 일어났지 않은가 말이다.
이 잔국은 아마도 그 바둑의 여러 가지 변화를 본뜬 듯했다.
고해는 자신이 비록 잔국을 풀고 있기는 하지만 마치 이십구 천지종횡대국을 하는 것 같았다.
“이것도 관기 노인이 남겨둔 것인가?”
고해는 인상을 찌푸리며 멀리에 있는 부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이십구 천지종횡대국의 변환을 아직 깨지 못했으니 이 기회에 천천히 연구해 보지 뭐!’
고해는 속으로 말하며 계속 바둑을 두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백발노인이 걸어 나왔다.
“정용종주 정동이다.”
누군가가 그를 알아보고 말했다.
정동의 뒤에는 정용종의 제자들이 서 있었다. 그는 신속하게 앞으로 걸어 나와 고해가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고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바둑판에 바둑돌을 올렸다.
착!
바둑돌 하나가 갑자기 움직였다.
“살았어. 고 선생님이 또 판을 풀어내셨군!”
착!
“또 살았어!”
마지막 순간, 고해의 바둑돌 하나가 또다시 잔국을 풀어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섯 판을 모두 풀어버린 것이다.
“고 타주님.”
정동이 고해에게 말을 걸었다.
“응?”
고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주변의 수련자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고해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 종주님?”
“예, 그렇습니다. 타주님의 바둑 실력이 참 대단하시군요.”
“과찬이십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고해가 웃으며 답했다.
“고 타주님, 종 외부에서는 일천 판밖에 접할 수 없습니다.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종 내부로 들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부에서는 삼천 잔국에서 두실 판을 임의로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규정은 이곳에서와 똑같습니다. 한 판당 열 개의 상품 영석을 드리지요. 게다가 종 내부에는 정원이 있어 휴식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정동의 말에 고해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듣기로는, 이미 삼대기왕들이 안에 들어갔다던데요?”
“삼대기왕은 이미 유연곡에 진입하셨습니다. 매일같이 서로 바둑을 겨루지요. 고 타주님도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고해가 대답하기 전에 넌지시 물었다.
“그들은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갔습니까?”
“그렇습니다. 친구, 부하 등 같이하고 싶은 사람들 모두 데리고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그제야 고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주변의 수련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들 역시 바둑을 잘 아는 분들이시니,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저를 따라 정용종 내부로 들어가 저의 바둑 실력에 대한 증인이 되어 주시지요!”
정동은 생각지도 못한 고해의 말에 멈칫했다.
그 순간, 고해의 영석을 받은 수련자들이 두 눈을 반짝이며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