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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패왕-117화 (117/243)

117화 잔국을 풀다

“고 선생님,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고 선생님을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정용종은 늘 신비주의여서 안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안을 볼 기회가 생기니 너도나도 들어가겠다고 나섰다.

“저도 따라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이번 기회에 고 선생님을 따라 들어가 내부를 살펴봐야겠습니다!”

정용종에서 갑자기 잔국 해제 대회를 벌이자 수련자들은 모두 의아해하던 터였다.

영석을 내어주고 잔국을 푼다?

어떤 목적이 없고서야 그런 일을 벌일 정용종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삼대기왕을 제외한 사람들은 출입을 할 수 없으니 답답해도 외부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고해가 요청하자 궁금증을 풀 기회라 생각했다.

“종주님, 이분들을 같이 데려가도 괜찮겠지요?”

고해가 말하며 정동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예가 안에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정예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만큼 나름대로 대비하고 들어가야 했다.

“예, 그게…….”

정동은 기대에 찬 수련자들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삼대기왕이 진입할 때도 각자 일이백 명 정도만 데리고 들어갔다. 그런데 지금은 고해와 함께 들어가겠다는 사람이 무려 일천 명은 되었다.

정동이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정예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들려왔다.

<들여보내거라.>

정동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고 타주님, 들어가시지요.”

“예? 예, 그럽시다.”

고해는 대답을 하고도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빠른 대답이었다.

정동이 자신의 요구를 곧바로 들어줄 줄이야.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거겠지.’

고해는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주변의 수련자들은 그의 마음도 모르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고해는 일천오백여 명의 수련자들을 거느리고 대진 안으로 진입했다.

대진 내부의 산봉우리는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아래에 궁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예는 궁전 앞에 서서, 수많은 수련자들을 거느리며 걸어오고 있는 고해를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부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타주님, 고해가 한 무리의 사람을 거느리고 들어왔습니다.”

정예가 싸늘하게 답했다.

“그는 자기 꾀에 자기가 놀아날 것이다. 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들어온들 어쩌겠어? 내가 저들을 안중에나 둘 줄 아나?”

“타주님은 그저 고해를 이용하는 것이지요?”

“고해가 잔국을 모두 풀어내는 순간, 고해와 죽음의 동반자가 되게끔 해주어라.”

“예!”

“한시도 놓치지 말고 고해를 감시해야 한다.”

정용종에 들어선 고해는 유연곡으로 안내되었다.

유연곡은 수많은 건축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세 무리의 사람들이 잔국을 풀고 있는 세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홍의(紅衣), 청의(靑衣), 흑의(黑衣).

“고 타주님, 저기 바둑을 두고 있는 사람들 중에 붉은 옷이 북해기왕, 파란 옷이 남해기왕이고, 검은 옷이 도생기왕(屠生棋王)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은 그들의 제자들입니다!”

고해는 홍의노인과 청의노인을 바라보았다. 옷의 색상이 특이한 것 말고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흑의를 입은 도생기왕은 신비롭게 검은색 망토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기에 얼굴이 잘 보이질 않았다.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검은색 망토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 수 없었다.

삼대기왕의 제자들 역시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고해를 바라보았다. 고해가 데리고 들어온 사람 수가 그들의 열 배나 됐기 때문이다.

“여러분, 잠시 동안 고 선생님과 여기에서 지내게 되실 것입니다. 다만 정용종 안에서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았으면 합니다!”

정동이 신신당부하자, 사람들도 웃으며 대답했다.

“종주님 걱정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곳 하늘에는 잔국 바둑판이 두 배 더 많았다.

“고 선생님, 제가 잔국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수련자 하나가 용감하게 하늘로 뛰어 올라가 잔국을 가지고 내려왔다.

고해는 주변을 살펴보더니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삼대기왕을 지켜보았다.

북해기왕과 남해기왕은 초조한 표정으로 부단히 바둑돌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생기왕은 천천히 바둑돌을 올리며 가끔 고개를 들어 고해를 살폈다.

한편, 멀지 않은 곳의 다락방에서 구공자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고해를 바라보았다.

“왔네, 왔어.”

잠시 고해를 보던 그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북해기왕과 남해기왕한테 가서 내 말을 전해라. 바둑으로 고해를 이기는 자에게는 약속을 지켜줄 거라고.”

“네? 구공자님, 단지 고해만 이기면 되는 것입니까?”

구공자는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단지? 이십팔 천지종횡대진을 꿰뚫고 있는 고해의 바둑 실력을 무시하느냐? 만약 그때 그의 수련 정도가 낮지만 않았어도 그의 바둑 실력이면 충분히 나의 대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들려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고해는 역시 거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분명해.”

구공자는 그쯤에서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그들한테 가서 이 말도 전해. 같이 힘을 합해 고해를 상대해도 좋다고. 이 또한 고해의 잠재력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예? 아, 알겠습니다!”

* * *

북해기왕과 남해기왕은 앞에 놓인 잔국을 힘써 풀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두 사람은 안색을 굳히며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스승님, 왜 그러십니까?”

“스승님,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제자들이 궁금한 표정으로 계속 물었지만, 두 기왕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돌려 고해를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둑에만 집중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고해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하지만 구공자의 말을 전해 듣는 순간 모든 일을 제쳐 두고 고해를 쳐다보았다.

고해의 눈앞에는 또다시 다섯 개의 잔국이 놓여 있었다. 고해는 서두르지 않고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며 서서히 바둑돌을 올리기 시작했다.

남북 두 기왕이 고해의 앞으로 걸어왔다.

수많은 제자와 부하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해가 데리고 온 천여 명 수련자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고해의 바둑판이 놓인 곳까지 다가왔다.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 두 기왕을 지켜보았다. 고해도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고 선생.”

남해기왕이 정중하게 인사 올렸다.

“고 선생, 안녕하셨습니까.”

북해기왕도 정중하게 인사 올렸다.

두 사람은 이미 원영경이고 고해는 그저 선천경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주변 수련자들로 하여금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게 하였다.

고해의 명성이 이렇게 대단했던가?

비록 그가 이십팔 천지종횡대진을 꿰뚫고 있고 수많은 송갑종의 제자도 살해했다지만, 원영경에 비하면 부족한 면이 많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고해에게 정중히 인사한 것은 그의 명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구공자가 주의 깊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구공자의 목소리에서 고해에 대한 그의 관심이 자신들을 넘어설 정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남해기왕님과 북해기왕님께서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까?”

고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남해기왕이 정중하게 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바둑을 보니 몸이 근질근질하여 고 선생님과 한판 두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북해기왕도 뒤따라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 선생님한테서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예?”

고해는 생각지 못한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놀람은 주위의 수련자들이 더했다.

“남해기왕과 북해기왕이 지금 고 선생님한테 도전장을 내민 거지?”

“에이 설마, 두 분은 이미 바둑계의 위인인데 고해한테 도전장을 내밀겠어?”

한쪽에서는 정동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해기왕과 북해기왕이 고해에게 도전장을 내밀어?

이 상황을 이모에게 보고해, 말아?

정동은 더 이상 멀리 가지 않고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도생기왕도 자신의 판을 멈추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해 쪽을 쳐다보았다.

도생기왕 옆에는 검은 망토를 쓴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도생기왕의 팔을 꼭 붙잡고 있는 것이 마치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도생기왕은 흑의 여인을 다독여주고 다시금 고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해는 두 기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두 사람이 찾아온 의미를 짐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하늘을 찌르는 투지와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누군가가 저들을 자극하지 않았다면 저런 표정일 리 없었다.

고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우리 모두 이곳의 잔국을 풀려고 온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백여 판의 잔국을 풀어보니 매 판의 난이도는 크게 차이가 없더군요. 그렇다면 이 잔국으로 승부를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럽시다!”

두 기왕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해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하여 자신의 앞에 놓인 다섯 개의 잔국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두 기왕은 고해의 행동을 보고는 제자더러 다섯 개의 바둑판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고는 고해의 바둑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순식간에 고해의 다섯 개 잔국이 해제되었다. 수련자들이 신속하게 새로운 다섯 개의 판을 가져왔다.

남해기왕이 물었다.

“고 선생님, 조금 쉬다가 시작할까요?”

고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바로 시작하시죠.”

“좋습니다.”

“그럼 시작하지요.”

남해기왕과 북해기왕이 대답하고는, 각자 자신 앞에 놓인 다섯 개의 바둑판에 시선을 꽂았다.

고해는 여전히 똑같은 속도, 똑같은 방식으로 바둑판의 경로를 파헤쳐 갔다.

그는 단순한 풀이와 해제 속도에 연연하지 않았다. 바둑돌을 놓는 소리마저 규칙적으로 울렸다.

착, 착, 착…….

남해기왕과 북해기왕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초조해졌다.

동시에 다섯 판을 진행하려니 한 판씩 진행할 때보다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기고 싶은 마음에 급히 바둑돌을 올렸고, 그 바둑돌 때문에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

주변의 수많은 수련자들은 긴장한 모습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건 좋은 일이야.”

정동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한참 후.

착!

남해기왕이 잔국 하나를 풀었다.

착!

북해기왕도 잔국 하나를 풀었다.

고해는 당황하지 않고 여전히 안정적인 모습으로 바둑돌을 놓았다.

두 기왕은 자신이 풀어낸 잔국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하여 나머지 판에 부단히 바둑돌을 올렸다.

시간이 가면서 두 기왕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가면 갈수록 바둑을 두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급하게 바둑을 둔 것이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그들이 네 번째 판을 깨고 나머지 한 판만 남은 상황인데도 고해는 아직 첫판도 깨지 못한 상태였다.

두 기왕은 전력을 다해서 마지막 판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착! 착! 착! 착! 착!

고해가 다섯 개의 바둑돌을 차례대로 바둑판 위에 놓았다.

누군가가 그걸 보고는 놀라서 소리쳤다.

“고 선생님이 다섯 판을 동시에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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