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일천판
관구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 선생, 사람이 너무 지혜로워도 다 좋은 것은 아니네요.”
고해가 두 눈을 부릅뜨고 구공자를 쳐다보았다.
“그럼 구오도에 판을 만든 것이 설마…… 그중에서 팔공자를 뽑으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구 할에 가까운 확률을 갖고 있습니다. 허, 그러게 왜 그리도 훌륭한 바둑 실력을 갖춘 것입니까? 저보다도 훌륭하십니다. 제가 각주님의 전승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습니다.”
“허, 구공자, 오해하지 마십시오. 한데 관기 노인이 팔공자를 뽑는다고 해도 제가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원하지 않는다고요? 하하하. 유혹에 꼭 넘어가실 것입니다. 그때 가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멀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팔공자가 되는 그날이. 하, 하, 하.”
관구가 말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해는 관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복잡한 심경을 감출 수가 없었다.
“됐습니다. 이미 각주님의 선택을 받으신 분인데 제가 뭐라 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요. 바둑이나 둡시다. 남은 구백 개의 잔국도 마저 풀어야지요.”
구공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해는 정신을 바로 잡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구공자,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비록 관기 노인의 전승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마음속에는 항상 대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팔공자의 이름과 명성은 대단할지언정 그 유혹은 힘써 극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관구는 고해를 빤히 바라보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극복 못 하실 겁니다. 아직 각주님의 역량을 모르셔서 그럴 것입니다. 여기의 대지용맥도 각주님이 선물로 증정한 것일 뿐입니다. 누구는 팔공자가 되려고 미친 듯이 노력하는데, 당신은 뒤로 물러서네요? 하하하. 말해봤자 소용이 없으니 그때 가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하지만 충고 하나 해드리지요.”
“네?”
“며칠 전에 알게 된 것인데, 용완청이 지금 정용종에 갇혀 있습니다. 정예가 감금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동은 정예의 먼 친척이고요. 아시겠죠?”
“당주님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요?”
고해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관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생기왕 역시 당신에게 익숙한 사람입니다. 몽태가 분장한 것이지요.”
“몽태요?”
고해는 눈썹을 치켜떴다.
삼대기왕으로는 남해기왕, 북해기왕, 도생기왕이 있었다.
어쩐지 도생기왕은 한 번도 말을 걸지 않더라니.
“바둑이나 둡시다.”
관구가 말했다.
고해는 두 눈을 감고 의식 속에서 벗어났다.
착!
검은색 바둑돌이 바둑판 위에 올려졌다.
우르르!
주변의 구백 개 잔국이 갑자기 폭발하더니, 구름이 되어 거대한 부도를 향해 날아갔다.
정동을 비롯한 모든 수련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고해가 혼자서 천 판을 풀다니!
* * *
정예는 방에서 몇 명의 부하들과 회의 중이었다.
“타주님, 저희가 당주님을 계속 감금했다가 혹시라도……?”
부하가 걱정 가득한 모습으로 물었다.
정예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너희들은 뭐가 그리 걱정인 것이냐? 어떤 일이든 내가 해결한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저 고해가 걱정될 뿐입니다. 타주님의 일을 망쳐놓지는 않겠지요?”
“흥! 일부 선천경과 금단경을 죽였다고 뭐라도 된 줄 알아? 걱정 마, 내가 개미처럼 밟아줄 테니까!”
“저는 유년대사까지 동원할까 봐 걱정입니다.”
정예는 실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유년대사는 껄끄러웠다.
“네 말이 맞아. 유년 늙은이가 확실히 귀찮은 존재이긴 하지. 고해가 유년 늙은이한테 소식을 넣지 못하게 오늘 밤에라도 당장 고해를…….”
웅성웅성!
밖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정예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부하들을 거느리고 집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집에서 나온 그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쿵!
하늘에서 잔국들이 흩어지며 수많은 구름으로 변하더니 공중에서 맴돌고 있었다.
“뭐지?”
정예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때 부하가 멀리에서 뛰어 들어왔다.
“타주님, 타주님, 유연곡에서 큰일이 났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 잔국이 왜 저렇게 많이 풀린 것이냐?”
“고해가 한 짓입니다! 그가 남해기왕, 북해기왕과 대결을 했는데, 세 사람이 다섯 시간 내에 각자 이백 개의 잔국을 풀었습니다!”
“육백 판?”
정예도 판을 풀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바둑은 정예의 전문분야가 아니었기에 풀긴 했어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런데 한 방에 육백 판을 풀었다는 것이 그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고해가 두 기왕을 제치고 나서 어디선가 관구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 역시 고해와 대결을 진행했습니다. 두 사람은 천 판을 갖고 대결을 진행했습니다. 한 방에 일천 판을요!”
“일, 일천 판이라고?”
정예뿐만 아니라, 화타의 부하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습니다. 전부 고해가 풀어냈는데, 한 방에 천 판을 풀어버리니 유연곡 전체가 떠들썩해졌습니다!”
“……!”
정예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고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 달간 몇백 판밖에 풀지 못했다.
그런데 고해가 오고 첫날인데도 천육백 판이 풀렸다.
아니, 고해가 대진 밖에서도 백 판을 넘게 풀었으니, 따지면 고해가 짧은 시간 내에 천칠백 판을 풀었다는 말이었다.
부하가 놀란 가운데서도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타주님, 오늘 밤 그를 처리할까요?”
정예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가보자!”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산봉우리로 뛰어올라 갔다.
산봉우리에서는 유연곡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유연곡에서는 산봉우리의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편, 도생기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검은 옷의 여인이 그의 몸에 기대고 있었고, 그의 뒤에 있던 부하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해기왕과 북해기왕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해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고해의 바둑 실력에 진정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 공자, 감사합니다.”
고해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관구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해를 바라보고 있는 관구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고해를 자신의 대타로 세우려 했는데, 지금 보니 고해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사람이 아니었다.
“됐습니다. 저의 전승은 그대에게 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기침병도 많이 좋아졌으니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나중에 또 대결해 봅시다.”
구공자 관구는 한숨을 내쉬고 일어났다.
“가자!”
“네!”
부하들은 관구를 따라서 외부를 향해 걸어갔다.
정동이 그들을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관 공자! 아직 육백 판이 더 남아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아직 접대도 제대로 못 해드렸으니 조금만 더 쉬었다 가시지요!”
하지만 관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그의 부하들이 정동을 막아 세웠다.
구공자 관구가 가고 나니 남해기왕과 북해기왕은 눈빛이 반짝였다.
구공자가 아까 그의 전승을 고해한테 물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자!”
남해기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공자를 쫓아갔다.
“우리도 가자꾸나!”
북해기왕도 역시 조급해하며 뒤따라갔다.
두 기왕이 데리고 온 사람들 역시 신속하게 자리를 떠났다.
정동은 다급히 뛰어가서 두 기왕의 막을 막아섰다.
“남해기왕님, 왜 벌써 가시려는 것입니까? 북해기왕님, 좀 더 있다가 가시지요. 제가 아직 이곳의 주인으로서 인사도 제대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남해기왕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정동, 당신이 내 앞길을 막는다면 내가 당신의 정용종을 가만두지 않을 거요!”
“날 막지 말고 비키세요! 어서!”
북해기왕도 짜증 내듯이 소리쳤다.
그들은 초조했다. 구공자는 행방이 묘연하기에 바로 따라붙지 못하면 놓칠지 몰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정동은 어이없으면서도 두 기왕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들이 가면 잔국은 어떻게 하지?
정동은 정신을 차리고 아직 남아 있는 도생기왕과 고해를 바라보았다.
이들은 가면 안 돼!
마음이 다급해진 정동은 고해를 향해 최대한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고 선생,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정용종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만족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많은 잔국을 풀다 보니 많이 힘드네요. 쉬고 싶습니다.”
고해의 말에 정동이 반색했다.
“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가장 좋은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를 건넨 고해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데리고 온 수련자들을 바라보았다.
“종주님, 저분들은 제가 데리고 온 친구들인데, 저분들도 쉴 수 있게끔 방을 배정해 주시겠습니까?”
정동은 망설여졌다. 원칙대로라면, 저 사람들은 산골짜기에서 지내야하고 아무것도 제공해 주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해가 부탁을 하니 정동으로선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대고 고해가 한마디 했다.
“만약 안 된다면, 저는 이분들을 데리고 밖에서 방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정동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은 고 선생의 친구이니 여기에서 편하게 생활하시면 됩니다. 편하게!”
“하하하!”
“고 선생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수련자들은 환한 표정으로 고해에게 인사를 올렸다.
정용종에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올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정용종은 그들을 도둑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오래전부터 불만이 가득했는데, 고해 덕분에 계속 안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으니 속이 시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해는 깨끗한 정원 하나를 선택했다.
수련자들도 방을 선택하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시끌벅적해졌다.
정동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안 보는 게 최고였다.
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도생기왕에게 갔다.
“도생기왕님, 잘 모시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최대한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나머지 잔국을 모두 풀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도 힘들어서 쉬어야겠습니다!”
도생기왕은 그 말만 하고 일어났다.
흑의를 입은 여성을 품에 안은 그는 부하들과 같이 작은 정원을 하나 선택했다.
“휴!”
정동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고해와 도생기왕이 아직 남아 있으니 이모에게 말할 명문은 있었다.
정동은 정용종의 제자들에게도 신신당부했다.
“어서 가서 이천 명의 제자들을 더 데려와라. 유연곡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주변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리고 고해와 도생기왕의 요구는 최대한 들어줘라.”
“예!”
* * *
산 정상.
정예는 실눈을 뜨고 산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타주님, 도생기왕 같은 경우에는 삼대기왕 중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고해와 도생기왕만 남아 있는데, 그래도 고해를 오늘 밤에 처리할까요?”
“맞습니다. 고해가 한동안 쉬고 일어나면 나머지 잔국을 모두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희도 시간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이호연이 눈치채고 신기영 부하들 거느리고 오면 저희는…….”
“고해가 내부 소식을 밖으로 빼돌릴지언정 시간은 오래 걸릴 것입니다!”
“고해는 아직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타주님, 고해는 타주님이 여기에 계신 줄도 모르는데 무엇을 걱정한단 말입니까?”
부하들은 정예만 바라보았다.
정예의 눈빛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