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협박
마음 같아서는 고해를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다들 고해를 눈여겨봐라. 그 어떤 소식이든 당장 나한테 알려야 한다. 그리고 너희들 신분을 잘 감추고 다녀라. 고해가 우리를 알아봐서는 안 된다.”
정예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잠시 보류할까요?”
“고해가 나머지 육백 판을 다 풀고 나면 죽여라!”
“예!”
“잔국의 현상금을 열 배로 추가하라. 잔국 하나당 백 개 상품 영석이다!”
정예의 말에 부하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예에? 상품 영석 백 개요? 그렇게나 많이 준단 말입니까?”
“나는 영석으로 시간을 사는 것이다.”
* * *
소식은 신속하게 정용종 제자들를 통해 전해졌다.
잔국 하나당 상품 영석 백 개?
순간 아까의 상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수련자들이 떠들썩해졌다.
무슨 상황이지? 왜 열 배씩이나?
수련자들은 이를 악물고 잔국을 풀기 시작했다. 현상금 액수 때문에 풀지 못하더라도 천천히 풀어나갔다.
그와 반대로 일부 수련자들은 꼼수를 부리기 시작했다.
정용종에 돈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그들은 하나같이 안 좋은 시선으로 정용종 제자들을 쳐다보았다.
유연곡에서 수련자들을 감시하던 정용종 제자들은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저들을 감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저들이 자신을 감시하는 것인가?
유연곡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사흘 후.
정예는 대전 앞에 서서 싸늘한 눈빛으로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구름을 바라보았다.
“사흘 동안 육백 잔국 중 세 개밖에 파훼하지 못했다고?”
정예가 냉랭한 표정으로 정동을 바라보았다.
정동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난처한 듯 말했다.
“고해와 도생기왕이 손을 쓰지 않으니 힘이 듭니다.”
정예가 매섭게 정동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왜 손을 쓰지 않는 것이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흥! 얼른 가서 재촉해!!”
“벌써 재촉하고 왔습니다.”
“또 가서 해!”
“……!”
“흥!”
정예는 화를 내며 대전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해는 답답한 심정을 안고 유연곡으로 향했다.
주변에 있던 수련자들은 시끌벅적하게 잔국을 깨려고 했으나 쉽게 깨지지도 않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모든 희망을 도생기왕과 고해한테 거는 수밖에 없나?’
정동은 양쪽 각루를 보면서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고해가 있는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에는 고해를 시중드는 사람과 감시하는 정용종 부하들이 있었다.
“종주님, 오셨습니까.”
“어때?”
“고 선생은 정원 밖으로 나오지 않고 차를 마시며 책을 보고 계십니다!”
그 부하가 말했다.
정동이 놀란 눈치였다.
“고 선생!”
정동이 정원에서 불렀다.
“문이 열려 있으니 들어오시지요!”
정원에서 고해의 차분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동은 정원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리면서 고해를 찾았다.
고해의 앞에는 난로가 피워져 있었고, 그 위에서 찻물이 끓고 있었다.
“고 선생, 요즘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네, 뭐…… 여기 경치도 좋고 공기도 상쾌해서 노후를 즐기기에는 최적의 환경인 것 같습니다!”
“고 선생, 벌써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고 선생도 이제 잔국을 풀어보시지요. 상금도 열 배로 껑충 뛰어 잔국 하나당 상품 영석 백 개입니다.”
고해는 찻잔을 들고 천천히 불면서 한 모금 들이켰다.
“고 선생?”
정동이 다급하게 말했다.
“정 종주,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고해가 덤덤하게 말했다.
“네?”
“정용종이 하루아침에 쑥대밭으로 변해버리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고해의 뜬금없는 말에 정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쑥대밭이오 고 선생,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냐고요? 그 일을 정 종주가 직접 꾸미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고해의 표정을 본 정동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고 선생,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고요? 허어, 나중에 직접 고통을 겪어봐야 생각이 나려나 봅니다.”
“고 선생, 무슨 말씀이오? 고통을 겪다니요? 무슨 말인지 말씀해 주시오!”
고해가 웃으면서 말했다.
“제 기억으론 이런 형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더라? 아! 기억났네요! 박피법(剥皮)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형법? 박피법?”
“음…… 먼저 종주의 능력을 봉인하고 땅 밑에 생매장하는 것이지요. 아! 다만 숨은 쉴 수 있도록 머리는 매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머리에 구멍을 뚫어서 두피를 한층 한층 발라버리는 것이지요. 죽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해는 정동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정동은 웃지 못했다. 그 대신 심장만 벌떡거렸다.
“머리에 난 구멍에 수은(水銀)을 넣어버릴 것입니다. 수은 아시지요? 수은이 들어가면 그 간지러움을 어찌 참을까요? 긁고 싶어도 긁을 수 없고 움직여도 계속 간지러운 그 느낌. 이제 아시겠지요?”
정동은 온몸에 가려움을 느낀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고해를 바라보았다.
“하! 머리에 구멍이 생겼으니 뚫고 나오면 되겠네요! 하하하! 두피까지 뚫고 수은을 긁어내는 느낌도 나쁘지 않겠지요?”
두피까지 벗긴다고?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거요?!”
정동은 겁에 질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히려, 탕! 하고 고해가 찻잔을 책상 위에 세차게 내려놓았다.
고해의 느닷없는 행동에 정동이 깜짝 놀랐다.
“정 종주가 이 정도로 멍청할 줄은 몰랐군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로 하지요. 내일 다시 잔국을 깰 테니 오늘은 이만 나가보시오.”
정동은 너무 놀란 나머지 식은땀까지 흘렸다.
고해가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했다.
“고 선생, 이해하기 쉽도록 직접적으로 말해주시오.”
고해가 정동을 빤히 쳐다보았다.
“종주, 조금 전 내가 말한 형벌을 어디에서 사용하는지 아시오?”
“고 선생의 일품당에서 사용하는 거 아니오?”
“하하하! 일품당에 그런 형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 이제는 일품당만의 일이 아니오. 종주, 당주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끝난 일이 아니외다. 이십 년 전부터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이 달아났는지 알고 있소?”
“나…… 나는 모르는 일이오!”
“당연히 모르겠지요. 종주가 어찌 그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겠소? 저들은 아마 지금도 범인을 찾고 있을 거요. 구오도까지 가서 찾는 거 보면 곧 찾아낼 것 같은데……. 안 그렇소, 종주?”
고해가 계속 압박하자, 정동이 눈을 치켜뜨고 화를 냈다.
“고해…… 당신…… 지금 나를 협박하자는 거요?”
화를 내고는 있지만,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협박했다고 생각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로 하지요. 그만 가보시오.”
덤덤하게 말을 마친 고해는 고개를 돌렸다.
정동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다그쳤다.
“누가! 누가 당신을 여기에 보낸 거요? 어서 말하시오!”
“정용종에도 혼자 온 내가 정 종주를 무서워하고, 종주 뒤에 숨은 정예를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하시오?”
고해의 입에서 ‘정예’라는 이름이 나오자, 정동의 눈에 살기가 가득 떠올랐다.
“어……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을 것 같소?”
고해가 싸늘하게 말했다.
반면 정동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 여기 온 목적이 뭐야?! 알고 있는 거 전부 말해!”
고해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냉랭히 말했다.
“나는 다만 용완청의 안전이 걱정되어서 여기에 왔을 뿐이오. 더 할 말 없거든 나가서 일이나 보시오.”
털썩!
정동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용완청이 묶여 있는 건 어찌 알았소? 유년대사? 아니지, 유년대사가 알았으면 벌써 왔을 것……!”
고해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알았을 것 같소? 종주와 정예가 하는 일을 당주님의 외할아버지께서 모르실 것 같소?”
정동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분은 구오도에 올 이유가 없어! 만약 오셨으면……!”
“곧 당주 어머님의 사인이 밝혀질 거요. 그때 가서는 아무리 빌어도 소용이 없을 거요. 흥! 뒤늦게 당주 어머님의 사인을 알려준다 해서 처벌을 면할 거라 보시오?”
정동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처……처벌? 용완청의 외할아버지가 주변에 있다고? 처벌은 또 뭐요? 무슨 처벌?”
정신 상태가 극히 불안해 보였다.
“아, 가려운 느낌은 따로 없었나?”
고해가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말했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고 선생, 가지 마시오! 제발…… 나 좀 살려주시오! 나도 시키는 대로만 했소이다!”
정동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고해 앞으로 달려갔다.
고해는 싸늘한 눈빛으로 정동을 바라보았다.
“시킨 대로 했다고?”
“이모 말대로 하지 않으면 이모가 나를 죽인다고 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거요! 당주님도 여기서 잘 생활하고 계시오! 매일 시중드는 사람들도 있소!”
정동이 고해의 다리를 붙잡고 사정했다.
* * *
정용종. 한 대전 내부.
용완청은 구름 잔국 앞에 앉아 있었다. 그도 심심한 나머지 잔국을 하나 풀고 있었다.
하지만 곧 바둑을 두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고해가 왔다고? 안 돼! 고해는 선천경인데 어찌 정용종과 정예의 상대가 된단 말인가? 이미 죽은 거 아닐까? 고해가 잔국을 깼으면 왜 지금도 감감무소식이지?”
그때 대전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종주님, 타주님도 안 계시는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문 앞에 있던 경비병 목소리였다.
“이모님께서 뭐 좀 물어보라고 해서 왔다.”
“아, 예…….”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열렸다.
정동이 대전에 들어서자, 흑포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한 사람이 곧바로 따라 들어왔다.
정동은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갔다.
용완청이 그런 정동을 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정동! 너희들이 고해를 죽였느냐?”
쿵!
정동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당주님, 저도 정예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
갑작스런 정동의 행동에 용완청은 눈만 껌벅였다.
그때 정동의 뒤에 있던 흑포인이 머리를 뒤집어쓴 흑포를 벗으며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해는 별일 없습니다.”
용완청이 그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눈이 커졌다.
“고해?”
* * *
정용종, 부도.
한 그림자가 몸에 흰 구름을 두르고 부도 위로 날아갔다. 정예였다.
그는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를 보며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십구 천지종횡대진이라…… 이미 많이 깨지긴 했으나 아직도 부족해.”
정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타주님, 타주님!”
한 부하가 황급히 달려왔다.
“왜?”
정예는 고개를 돌려서 부하를 바라보았다.
“정동이 고해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지금 용완청을 만나고 있습니다!”
정예가 부하의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고해, 역시 평범한 인물은 아니군. 흥!”
“감시하지 않았으면 순식간에 눈 뜨고 코 베일 뻔했습니다.”
“가보자!”
정예가 냉랭하게 말하고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