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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패왕-122화 (122/243)

122화 도망가다

* * *

용완청이 있는 대전.

“고해?”

용완청이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고해가 미소를 지었다.

“당주님, 오래 기다리셨지요?”

“아니, 네가 여길 어떻게 왔어? 정동 자네는……?”

용완청이 정동을 바라보았다.

정동은 용완청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당주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그저 정예가 시키는 대로만 했습니다. 요 며칠 저도 예우를 차려 당주님을 대했습니다!”

용완청은 깜짝 놀라서 정동을 바라보았다.

설마 고해가 정동을 설득한 건가?

“당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주님께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주님의 외조부께서 정용종 주변에 계시니까요.”

고해의 말에 용완청의 표정이 환해졌다.

“뭐? 외할아버지께서 오셨다고?”

“친딸이 죽었는데 아버지라는 분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처음부터 당주님의 안전을 지켜보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고해가 말하면서 왼쪽 눈을 슬쩍 감았다 뜨고 미소를 지었다.

고해의 눈짓을 본 용완청은 곧바로 고해의 뜻을 알아차렸다.

‘거짓말로 속인 것이군.’

고해가 외조부를 알 리가 없지!

정용종 정도야 외할아버지 혼자면 충분한데, 굳이 고해를 앞세울 필요도 없지 않은가?

고해의 연기를 본 용완청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정동에게 말했다.

“정동, 나한테 또 할 말이 있나?”

“당주님, 저는 사실 처음부터 사실을 밝히고 싶었습니다만, 겁이 나서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고 선생의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제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뭘 밝히고 싶었다는 것이냐?”

“이곳 일은 전부 정예가 시켰습니다. 정예는 저의 사촌 이모이지만, 사실 저희 정가의 모든 일을 좌우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용종 종주를 하게 된 것도 사실은 정예가 손을 썼기 때문입니다!”

“모든 걸 정예가 시켰다고?”

“네, 오십 년 전, 저희 정가네 자손들은 천도해에 와서 세력을 발전시켰습니다. 저도 천도해에 와서 정용종이 괜찮아 보여 정용종에 들어왔습니다. 원래는 저도 정용종의 장로였으나, 정예가 와서 원래의 종주를 조용히 죽여버리고 저를 종주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종주 자리에 앉는 대신 전부 정예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지요.”

정동이 말하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예가?”

용완청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여기에 용맥이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지?”

“원래 종주는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 달 전에 정예가 정용종을 수색하더니 부도에서 석대(石台)를 발견했습니다. 정말 볼품없는 석대여서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기관일 거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기관? 무슨 말인가?”

고해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정동이 고해를 바라보며 대답을 머뭇거렸다.

고해는 그런 정동을 나직이 다그쳤다.

“당주님의 외조부께 말씀드린다고 생각하시오. 결과는 알아서 판단하시고.”

“예예, 알겠습니다.”

정동은 모든 걸 포기하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건 가로세로 이십구 개의 선이 있는 잔국이었습니다. 옆에는 바둑통이 있었지요. 그때 정예의 한 부하가 호기심에 손을 뻗어 바둑을 올렸더니 순식간에 먹혔습니다. 그 순간, 이상한 기운이 나오면서 그 부하가 폭발해 버렸습니다. 만약 다른 부하가 없었더라면 그의 죽음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은?”

“정예는 그 바둑판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용종에서 수많은 서적을 읽었으나 그와 관련된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지요. 다만 그 정원은 금지구역이라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이십 년 전, 당주님의 어머님도 몽태 등 일품당 부하들을 데리고 그 정원에서 사셨습니다!”

정동이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고해와 용완청은 눈을 마주치더니 서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후 어떻게 됐소?”

고해가 조용히 물었다.

“후에 정예도 무서워서 바둑을 두지 못하고 부숴버리기 위해 칼을 휘둘렀지요. 그러자 굉음이 울리더니 주변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고, 갑자기 삼천 잔국이 사방팔방에 나타났습니다.”

“뭐요?”

“바둑판 밑에 있는 부도 역시 건축물이 아니라 작은 공간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 공간 안에 황금색 몸체가 있었는데 공간이 너무 작아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지요.”

“이십구 천지종횡 세계?”

고해가 미간을 찌푸렸다.

구공자가 완전한 이십구 천지종횡 바둑판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했었다.

“정(丁)용정? 이제 보니 정(釘)용종으로 불러야겠군. 대지용맥을 움직이지 못하게 강제적으로 박은 건가?”

그 말을 듣고 용완청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동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종주가 죽어서 저는 잘 모릅니다.”

“종주도 들어가지 못하는 거요?”

고해가 넌지시 묻자, 정동이 순순히 말했다.

“내부를 볼 수는 있어도 들어가지는 못하오. 주변을 대진이 둘러싸고 있어서 공격도 못 하고 잔국을 풀어야만 하오. 정예가 잔국 하나를 풀었더니 가로세로 이십구 개의 선이 반응하더군요. 후에야 그 이십구 천지종횡 바둑판이 엄청 복잡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지요. 삼천 잔국 역시 그 바둑판의 확장판이 아닌가 싶소. 그 잔국을 모두 풀어내면 진법도 풀리면서 그 작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오.”

고해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예가 포상금을 내걸고 사람들을 초대했던 거구나!”

“예!”

“유년대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정예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왜 지금도 잔국을 깨지 못한 걸까요?”

고해는 그 점이 의문이었다.

그런데 용완청이 말했다.

“그건 정예가 바둑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지!”

“네?”

“정예는 바둑보다 거문고를 좋아해!”

용완청의 말에 고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거문고요?”

“거문고와 바둑은 서로 다른 길이야. 수련자들도 거문고를 타거나 바둑을 두고, 혹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지. 고해, 너는 아마 바둑에 속할 거다. 바둑에서는 관기 노인이 천하제일이고.”

용완청의 설명에 고해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고요?”

“맞아! 네 가지 모두 각자의 특징이 있어. 고해 너도 나중에 알게 될 거다. 그렇지만 정예는 아쉽게도 자신과 다른 걸 배웠어. 정예는 거문고나 탈 사람이 아니야. 거문고의 강자는 거문고를 타면서 칼폭풍을 만들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어!”

“예? 당주님은 그걸 보셨습니까?”

고해가 놀라서 묻자, 용완청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예전에 전장에서 여양왕(呂阳王)이 거문고로 ‘파동풍’(破東風)을 타는 모습을 봤어. 백만 수련자들이 칼폭풍에 맞아 작살 났고, 산과 하천, 전장이 산산조각 나버렸지. 그야말로 산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고 죽음의 기운만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지!”

“여양왕(吕阳王)?”

고해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중에 알게 될 거다!”

고해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용완청이 다시 말했다.

“정예가 나를 잡은 목적은 ‘인용옥’을 빼앗기 위해서다”

“네?”

“인용옥으로 대지용맥을 불러내서 그 안에 담을 수 있어!”

용완청이 설명했다.

“아! 그렇구만요!”

고해가 조용히 대답했다.

“정예는 이십구 천지종횡 바둑판을 열기 위해서 인용옥이 필요했던 거군요. 흥! 아쉽게도 눈앞의 적은 이익 때문에 자신을 망치는 비극을 보게 되었으니……!”

“당주님……!”

정동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용완청을 바라보았다.

용완청은 그를 안심시켰다.

“내가 외조부께 말씀드리마. 어쩌면 벌써 들으셨을지도 모르겠군.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라!”

“감사합니다. 당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동이 감격스러워했다.

용완청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고해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하지?”

* * *

쾅!

정예가 용완청이 있는 전각의 문을 활짝 열었다.

“용완청은 어디 갔느냐?”

정예가 큰 소리로 말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은 멍하니 대전 내부를 바라보았다. 대전 내부에는 괴상하게 생긴 모래시계가 있었는데, 모래시계에서 바둑알이 떨어지면서 탁탁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종주께서 흑포인을 데리고 나간 이후부터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당주가 바둑을 두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흑포? 용완청이 흑포 뒤에 숨은 거 아니야?”

“타주님의 말씀은, 흑포 뒤에 사람이 숨어 있었단 말씀이십니까? 종주께서 대전을 잘 지키라고 했는데, 이럴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경비병들이 다급하게 말했다.

“언제 갔느냐?”

정예가 그 경비병을 노려보며 말했다.

“얼마 안 됩니다!”

경비병의 대답을 들은 정예가 눈을 부릅뜨고 명령을 내렸다.

“빨리 가서 정용종의 수산 대진을 닫아!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해!”

“네!”

정용종, 한 산골짜기.

“됐소, 종주도 몸을 피하시오.”

“알겠소!!”

정동이 옆으로 가고, 고해도 커다란 바위에 가서 흑포를 걷어 올렸다.

팍!

흑포를 거두자 흑포 안에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완청이었다.

“고해! 자네…… 아……!”

용완청이 수줍은 듯 고해를 노려보았다.

“저…… 당주가 너무 밀착해 있어서…… 그…… 그건 남자의 본능적인 생리현상이지 제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당주, 얼른 이 흑포를 입으시지요! 제가 뒤돌아서 있겠습니다.”

고해는 흑포를 넘기고는 바위를 떠났다.

“흥!”

용완청은 고해의 뒷모습을 보며 반응했다.

용완청은 마음속 부끄러움을 떨쳐내고 곧바로 흑포를 입고 바위에서 걸어 나갔다.

바위에서 나온 용완청은 고해를 노려보았다.

옆에 있는 정동은 못 본 척하고, 고해는 뻘쭘한 듯 웃기만 했다.

쾅!

순간, 하늘에서 굉음이 들리더니 수많은 자갈이 하늘로 올라가서 운석 폭풍이라도 내릴 듯 정용종을 뒤덮었다.

저 멀리 유연곡이 시끌벅적해졌다.

고해와 용완청은 미간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동의 안색이 굳어졌다.

“정예가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정예가 대진을 배치해서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고해가 그에게 물었다.

“정예가 대진을 움직였군. 종주, 나갈 방법이 없소?”

“대진을 열 수 있는 진원이 있는데, 그 진원도 정예만 알고 있습니다.”

용완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능력은 전부 봉인되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정동이 초조한 표정으로 고해에게 물었다.

“고 선생, 이제 어떡하지요? 당주님 외조부께 부탁하는 건 어떻겠소?”

잠시 생각하던 고해가 말했다.

“일단 유연곡으로 갑시다.”

“유연곡으로? 정용종에 오천 명의 부하들이 있고, 정예한테도 천 명이 넘는 부하들이 있어. 이대로 괜찮을까? 변장이라도 할까?”

용완청이 걱정하며 고해를 바라보았다.

고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당주님을 찾았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정정당당하게 정용종을 나가면 됩니다. 정예가 배치한 대진이 어떻게 나를 가로막는지 보지요.”

“뭐?”

용완청은 화들짝 놀랐다.

정정당당하게 걸어 나간다고? 그게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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