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고해의 계략
산 중턱에 있는 나무 아래.
미생인이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치 옆에 있는 공기와 말하는 것 같았다.
“이호연. 참 믿기지가 않네. 저렇게 큰 배짱을 갖고 있었다니. 계속 지켜봐야겠군. 그녀의 죽음을 내버려 둘 순 없지. 이호연이 어떤 수단을 쓰는지 지켜봐야겠어.”
* * *
같은 시각, 거대한 목단꽃 위.
이호연의 그림자는 더 이상 바둑판의 북쪽과 남쪽에 서 있지 않고, 중앙을 지나 서쪽에 와 있었다.
그는 싸늘하게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죽은 바둑판의 동쪽에 고해의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비웃으며 이호연을 바라보았다.
외부 사람들도 두 사람이 이 바둑판을 놓고 싸우는 것을 눈치챘다.
“대공자님, 대인께서 이호연과 겨루고 있습니다. 이호연의 손에는 육만여 개의 백돌과 흑돌이 있지만, 대인의 손에는 아무런 바둑알도 없는데 어떡합니까?”
“그러니까요. 투명 바둑알은 전부 대인의 손에 죽었고, 대인께는 지금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대항할 생각이신지……?”
많은 악인들이 고해를 걱정했다.
하지만 고진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 바둑에 대해서는 의부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 조용히 지켜보자고. 의부는 절대 지지 않을 거야!”
죽은 바둑판 내부.
이호연은 고해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어 마음이 불안해졌다.
뭐라 해도 이곳은 바둑판이 아닌가.
만약 무술이었다면 고해가 백 명이라도 자신의 상대가 아니지만, 바둑판에서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용완청은 유년대사 근처로 다가갔다.
유년대사를 부축한 그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대사, 괜찮아? 지금은 어때?”
유년대사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얼른 가야 합니다. 우리 몇 명은 얼른 숨어야 해요.”
“네?”
유년대사가 기침하며 말했다.
“고해가 당주님을 나한테 보낸 건 같이 숨으라는 뜻입니다. 고해가 어떤 수단을 쓸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흑돌과 백돌이고, 이호연의 바둑알 아닙니까? 이호연 저놈이 고해를 이기면 몰라도, 지면 무조건 우리를 놓고 고해를 협박할 겁니다.”
용완청은 안색이 굳어졌다.
“맞아.”
용완청은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세 명의 부하를 데리고 도망쳤다.
신기영 제자가 그 광경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영주님, 용완청과 유년대사가 도망치고 있습니다!”
이호연은 눈썹을 치켜뜨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뭐?”
멀리 도망가던 용완청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순간 고해가 웃기 시작했다.
“영주님, 설마 벌써 패배를 직감해서 여자를 이용해 저를 협박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몽태는 여유롭게 이호연을 대하는 고해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
‘이호연은 강해서 그렇다 치고, 지금은 고해를 보면서도 겁을 먹고 있으니…… 엇? 아니지…….’
몽태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고해가 어쩌다가 바둑을 두는 사람으로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고해는 투명한 바둑돌밖에 사용하지 못하잖아?’
그럼 뭐지?
부혈도 처음에는 투명 바둑돌만 사용했지만 그에게는 황금 바둑돌도 있었다.
그런데도 결국 패했고, 그 후에야 뭘 깨달은 듯 말했다.
투명 바둑돌은 허황한 것이고 백돌과 흑돌이야말로 진실한 것이라고.
‘투명 바둑돌로는 공격이 불가능하고 방어만 할 수 있구나! 그래서 고해도 방어만 하고 있는 거였어.’
그럼 이호연과 어떻게 싸운다는 거지?
고해가 왜 저렇게 여유로운 거야?
‘고해는 확신도 없으면서 저렇게 여유롭게 걸어갈 사람이 아니야.’
몽태는 고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호연은 음침한 표정으로 고해를 보고 있었다.
그 역시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만약 외부에서 바둑을 둔다면 열 명의 고해가 와도 거뜬하게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바둑을 두어야 했다.
고해의 바둑 실력은 언제부터 좋았을까? 바로 선천잔국계에서 십만 명의 수련자들을 이기면서부터였다.
대봉방과 정용종 역시 이십구 천지종횡 바둑판의 포악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 죽음의 바둑판은 예전의 바둑판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 역시 결국은 이십구 천지종횡 바둑판을 진화시킨 것일 뿐이었다.
이 바둑판을 이해한다고 해서 고해를 이길 수 있을까?
고해도 결계 보호막을 가지고 있다. 그럼 자신의 공격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럼 고해도 ‘바둑을 두는 사람’인가?
이호연은 자신만만했으나 여유로운 표정의 고해를 보면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때 한 신기영 제자가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영주님, 용완청과 유년대사가 도망치고 있습니다!”
“뭐?”
이호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용완청이 굳은 표정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런데 고해가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이 영주! 설마 패배하게 생겼으니 여자를 잡아서 나를 협박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호연은 고해의 도발에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저놈들을 붙잡아서 자네를 협박하면 또 어떠한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고해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순간, 이호연이 손을 휙 저었다.
도망치던 다섯 명은 가공할 힘에 이끌려서 이호연의 앞까지 딸려왔다.
용완청의 하인 하나가 소리쳤다.
“이호연! 당주를 해치면 주인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용완청이 절망하여 악을 썼다.
“이호연! 역시 내가 눈이 썩었구나! 너의 그릇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다니! 영락없이 잡놈이구나!”
유년대사도 중상을 입어서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다만 애처롭게 고해를 보면서 말했다.
“고 타주! 자네한테 누를 끼쳤네!”
고해는 음침한 표정으로 이호연을 보고 있었다.
고해의 표정을 보던 이호연이 박장대소했다.
“하! 하하하하하하!”
이호연은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고해를 잡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고해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호연, 결국 너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었구나. 흥! 대국을 펼치기도 전에 약자들을 잡아다가 나를 협박해?”
이호연의 안색도 굳어졌다.
하지만 고해가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유를 부렸다.
“내가 이런 놈이든 저런 놈이든, 네가 판단할 자격은 없다! 이렇게 쉬운 길이 있는데 내가 왜 복잡하게 돌아가야 하지? 고해, 용완청이 죽는 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고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호연이 다시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용완청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은 했지만, 혹시 알아? 나를 건드리면 죽일지! 물론 유년대사와 세 하인까지 말이다. 하하하하!”
용완청이 고해를 바라보았다.
“고해, 미안해. 우리 때문에……. 정말 미안해!”
고해가 자신한테 대국을 맡긴 이유는 승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바둑을 두는 사람이었기에 믿고 맡겼는데, 결국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승리를 눈앞에 두고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목숨까지 잃을 판이었다.
용완청은 그게 미안하고, 슬펐다.
하지만 고해는 용완청을 보지 않고 이호연을 응시했다.
이호연이 냉랭하게 말했다.
“저들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다. 알겠어, 고해? 저들을 구할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고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지?”
“너의 황금색 바둑돌을 가져와라. 그러면 용완청도 살려주고, 대진을 나가게 해주지.”
고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황금색 바둑돌을 달라고?”
수련자들이 소리쳤다.
“안 됩니다! 고 선생! 그 바둑돌을 넘기면 우리는 끝입니다!”
“고 선생! 절대 안 됩니다! 이호연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겁니다!”
“이호연은 그런 놈입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고 선생! 절대 줘서는 안 됩니다!”
너도나도 소리치는 소리가 일대를 울렸다.
고해는 그들에게 있어 동아줄과도 같은 존재였다. 고해가 황금색 바둑돌을 넘기는 순간, 고해도 끝장이고, 자신들도 끝장이었다.
고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호연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어서 황금색 바둑돌을 넘기거라!”
고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완청도 울면서 말했다.
“고해! 안 돼! 주면 절대 안 돼!”
이호연이 소리쳤다.
“흥! 고해! 넘기지 않으면 저들도 끝이다!”
쿵!
순간, 강력한 힘이 다섯 사람을 향해 밀려가더니, 그들의 힘을 강제로 뽑아냈다.
다섯 사람이 고통스럽게 소리 질렀다.
“아아악, 아아악!!!”
이호연은 흉악한 표정으로 고해를 바라보았다.
그는 벌써 두 개의 황금 바둑돌을 얻었다. 고해가 황금 바둑돌을 넘기기만 한다면 누구든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고해는 손에 황금 바둑돌을 잡고 이호연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슬픔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멈춰라! 황금 바둑돌을 넘기마!”
윙!
이호연이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고해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호연, 황금 바둑돌은 넘길 것이니 조금 전에 했던 약속은 지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주변에 있던 수련자들이 겁에 질려 소리쳤다.
“안 됩니다. 고 선생!”
이호연이 손을 휙 저었다.
“꺼져!”
주변에 있던 수만 명의 수련자들이 짚단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나가떨어졌다.
우당탕탕!
이호연이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한 말은 지킨다! 얼른 넘겨라!”
고해는 황금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침묵했다.
용완청이 울면서 소리쳤다.
“고해! 안 돼!”
이호연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얼른!”
고해가 힘겹게 넘겼다.
“받아라!”
팅!
황금 바둑돌이 곧바로 이호연을 향해 갔다.
이호연은 웃으면서 손을 뻗어 바둑돌을 받았다.
착!
황금 바둑돌이 그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이호연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황금 바둑돌 세 개를 전부 챙겼다! 하하하!”
용완청이 절망한 채 소리쳤다.
“안 돼!”
용완청뿐만 아니라 저 멀리 날아가 떨어진 수련자들도 울부짖었다.
“안 돼!”
모두가 절망 속에서 울부짖었다.
고해도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 이호연! 이 비겁한 인간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역시나 이호연이 한 손에 황금 바둑돌 세 개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고해를 공격하려고 했다.
“고해! 이런 멍청한 놈! 이제 어떻게 막을 것이냐? 하하하! 그냥 죽어라!”
쿵!
이호연은 모든 힘을 실어 고해를 공격했다.
하늘과 땅이 무너질 듯한 힘에 모두가 절망했다.
용완청이 절망한 채 소리쳤다.
“안 돼! 이호연! 이 비겁한 인간아!”
수련자들도 저 멀리에서 비통해했다. 고해가 죽으면 자신들도 죽게 될 것이다.
“안 돼에에에!”
저 멀리 폐허 속에 있던 몽태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끼쳤다.
“아니지, 아니지! 이호연이 걸려들었어! 고해가 사람을 바둑돌로 해서 바둑을 두려고 해! 이호연이 제대로 걸려들었어!”
쿵! 쿵!
이호연이 천지를 뒤덮을 만한 기세로 고해를 공격하자 주변의 산봉우리까지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고해가 어딘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뭐야? 한 방에 죽은 거야?’
이호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지?”
한 무리의 신기영 제자들도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해는 어디 갔지?”
유년대사와 용완청은 표정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의아해했다.
어떻게 된 거야? 고해가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어!
저 멀리에 있던 수련자들도 절망 속에서 웅성거렸다.
“고해는? 왜 없어졌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지?”
모두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몽태만 고개를 돌려서 이호연의 손바닥에 있는 황금 바둑돌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이호연의 왼쪽 손바닥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쾅!
이호연의 왼손이 폭발하면서 황금 바둑돌도 함께 날아갔다.
순간, 검은 기운이 왼손을 감돌더니 순식간에 수많은 해골이 나타났다.
이호연의 표정이 급변했다.
“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