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황보조가를 만나다
* * *
정화곡.
고해는 열흘 동안 자료를 훑어보다가 정화 파파와 개인 면담을 가졌다.
고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주님께 들었습니다. 황보조가한테 사람을 보내셨다고요. 덕분에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습니다.”
정화 파파가 웃으면서 말했다.
“고 선생, 용완청한테 얘기 많이 들었네. 완청이가 고 선생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더군.”
“그래요?”
“엊그제 나의 감정 변화를 자네도 보았지? 아마 이유도 알 거라 생각하네만.”
“조금은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고해가 말을 아끼자, 정화 파파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은월산장 주인……. 하아…….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줄은 몰랐네.”
“…….”
정화 파파는 눈시울마저 붉혔다.
“나한테도 남편이 있었어. 그런데 너무 일찍 저세상으로 갔지 뭔가. 남편이 죽으면서 내 마음도 얼어붙었지. 그러다가 산장 주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나를 이십 년이나 쫓아다녔네. 나의 어떤 모습에 끌렸는지 나도 모르겠어. 임종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더라고.
우리 둘은 서로 고집을 피웠어. 어느 누가 먼저 마음속에서 내려놓기를 바라고 있었지. 그런데 그거 아나? 그리움이 점점 더 커져만 가더군. 산장 주인이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고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떠난 후에야 소중함을 아셨군요?”
정화 파파가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
“그래……. 요즘 너무 후회되고 슬퍼.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심한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콧대를 낮췄더라면…….”
고해는 한동안 침묵했다.
“이제야 알겠어. 그때 산장 주인이 왜 스스로를 낮췄는지…… 왜 나를 그렇게도 보살펴 줬는지…… 그땐 내가 너무 무식하고 멍청했었어. 내가 지금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아나?”
“파파, 슬픔을 아끼세요.”
“고 선생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에까지 충실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손녀, 용완청을 좋아하는 이상 숨기지 말라는 말일세.”
고해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다가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티 많이 났습니까?”
정화 파파는 그제야 웃음을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보였어.”
고해도 머쓱하게 웃었다.
“파파, 저의 아내에 관한 얘기를 들으셨지요? 저는 아직 복수도 해야 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용완청이 다칠까 봐 그러는 건가? 그런데 그거 알아? 용완청도 이미 그 위험에 들어와 버렸어.”
고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자네가 도망치면 칠수록 용완청은 상처를 받게 되고, 점점 더 위험해질 거야. 내가 산장 주인한테 마음이 흔들리긴 했어도 난 여전히 남편을 사랑했었어. 사랑은 변하지 않는 거야.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고해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들어 효월산장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용완청이 있었다.
고해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면, 자연스럽게 되겠지요.”
정화 파파는 고해를 보고 피식 웃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고해가 정화 파파를 보며 물었다.
“아, 파파. 저와 당주님이 정화곡을 돌아다니다가 주변의 섬에서 바둑판을 본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걸 또 언제 본 건가? 맞아. 이 가시나무 대진은 관기 노인이 나를 도와서 배치해 준 거야. 아마 바둑판이 있을 수도 있어. 눈썰미가 너무 좋구먼.”
“제가 바둑판에 민감해서 그랬나 봅니다. 그리고 바다와 인접한 동쪽 면의 대진에 약간 틈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정화 파파는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뭐? 틈?”
“예. 저기가 제일 약한 곳입니다. 관기 노인이 저렇게 만든 이유를 모르겠군요.”
정화 파파는 미간을 찌푸렸다.
“관기 노인은 생각이 많은 분이시니 저 틈도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있다가 저와 함께 가보시지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괜찮으시다면 제가 손봐 드리겠습니다.”
정화 파파 덕분에 황보조가까지 만나게 되었다. 비록 아직 사람을 보지는 못했지만 만날 확률은 아주 컸다.
그 보답으로 고해는 정화곡의 취약한 부분을 막아주기로 했다.
고해는 가시나무 대진에 있는 그 틈을 막았다.
바다와 인접한 동쪽 대진은 바다까지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해수면과 잇닿아 있는 대진에는 가시나무가 너무 적은 결함이 있었다.
한 무리의 정화 수요들이 합세하니 틈을 막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용완청도 줄곧 고해의 곁에서 고해를 도왔다.
초신은 효월산장에서 싸늘한 눈빛으로 고해를 보고 있었다. 그는 고해를 도와주지도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년대사가 초신 뒤에 가서 말했다.
“초 타주,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었나? 더 할 일이라도 남은 건가?”
초신은 고개를 돌리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유년대사를 보며 말했다.
“예전 당주님께서 남긴 자료를 아직 전부 훑어보지 못했습니다. 자료를 봐야 실마리를 찾지요. 왜요? 제가 없었으면 좋겠습니까?”
유년대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초 타주, 우리도 전 당주님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네. 그렇지만 지금의 일품당 당주님은 용완청이야. 앞으로 당주님을 대할 때 예의를 좀 지키게.”
초신은 더욱 차갑게 말하고는 대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금 저를 교육하는 겁니까? 허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유년대사는 초신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녁 무렵, 바다 한가운데서 괴성이 들렸다.
쿠구궁.
순간 거대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고해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됐어!”
주변에 있던 수요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해와 구름 대진을 번갈아 보았다.
“드디어 끝났습니까? 저 구름이 바로 대진입니까?”
고해가 설명을 하기도 전에 한 수요가 달려오며 말했다.
“고 선생, 용 당주님, 파파께서 황보조가가 왔다면서 얼른 오라고 하셨습니다.”
고해와 용완청은 깜짝 놀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왔군요.”
“응. 함께 가봐.”
고해와 용완청은 수요를 따라 정화 파파가 있는 곳으로 갔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정화 파파의 나무 구멍에 도착했다.
수요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파파께서 말씀하시기를 도착하시는 대로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셨습니다.”
고해와 용완청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곧장 나무 구멍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니 정화 파파와 중년 남성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고해와 용완청이 들어오는 순간, 두 사람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고해와 용완청을 바라보았다.
중년 남자는 바로 고해가 얼마 전에 봤던 황보조가였다.
고해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황보 선생.”
황보조가는 용완청을 보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렸고 얼굴까지 새빨개졌다.
용완청도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용완청입니다.”
황보조가도 예의를 갖추었다.
“황보조가입니다.”
정화 파파가 차를 마시며 말했다.
“황보조가도 왔으니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려무나.”
용완청이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파파.”
황보조가는 눈까지 빨개진 상태였다.
“닮았군, 닮았어. 정말 효월과 닮았구나.”
용완청이 입을 열었다.
“황보 선생님.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어머니의 죽음을 좇다가 고 타주가 황보 선생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시게 되었지요.”
황보조가는 고해를 바라보았다.
용완청이 말을 이어갔다.
“저희는 은월성에서 어머니의 사인을 알아보다가 황보 선생과 하세강이 저의 어머니와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두 분은 자취를 감췄지요. 그래서 하세강을 찾아가서 물어보았는데, 하세강이 죽기 전에 황보 선생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황보조가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세강, 그 겁쟁이가 죽었다고?”
“네, 자살했습니다.”
고해가 말을 거들었다.
“은월해에서 청동 금용을 찾아냈습니다. 그 청동 금용을 관부로 옮기는 과정에서 도둑맞았는데, 얼마쯤 후 하세강이 자살했습니다.”
홍보조가가 냉랭하게 말했다.
“자살? 하하하. 그 멍청한 놈은 더 일찍 죽었어야 했어. 이제야 자살하다니? 흥!”
용완청이 다급하게 물어보았다.
“황보 선생님, 저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황보조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엄마는…… 여양왕이 죽였지.”
용완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그러나 옆에 있던 고해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있었다.
황보조가가 흉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용효월을 만났을 때, 용효월이 그랬어.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여양왕의 짓이라고. 그래서 내가 복수를 하려는 거야. 효월의 복수를.”
“여양왕이…… 우리 어머니를 죽였다고요? 왜요? 혹시 대지용맥? 그럴 리가요. 여양왕한테도 대지용맥이 있잖습니까?”
“대지용맥은 무슨! 그해 여양왕이 아무도 몰래 군대를 동원하여 반역을 저지르려고 했어. 그런데 마침 용효월한테 발각된 거지. 여양왕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용효월을 죽이려고 했어. 그래야 자신이 살아남으니까.”
“반역이오? 증거는 있습니까?”
“증거? 증거가 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는가? 바로 대건천조에 가져갔겠지.”
고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반역이라……. 황보 선생의 말은, 여양왕이 힘을 키워 대건천조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그래. 내가 여양왕의 역심을 알고 있으니 오히려 내가 대건천조를 배신했다고 모함하더군. 그러면서 나를 진압한다는데, 내가 대건천조에 있을 수가 있었겠나? 하하하하.”
고해는 황보조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가 들은 건 조금 다릅니다. 저희가 듣기로는, 황보 선생께서 대건천조와의 동맹을 깨버리고 다른 황조와 동맹을 맺었다고 하던데……?”
황보조가가 싸늘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다른 왕조와 동맹을 맺었다고? 우리 신록황조 옆에 다른 황조가 있긴 있나? 만약 그 황조가 여양왕이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오히려 여양왕을 도와 우리 신록왕조를 없애려고 할걸? 왜냐고? 그들은 땅이 필요하거든. 그리고 혼란한 틈을 타 대건천조까지 공격하겠지. 내가 어찌 그런 사람들과 동맹을 맺을 수 있겠나?”
용완청이 망연하게 말했다.
“여양왕이 우리 엄마를 죽였다고요? 하지만 증거가 없잖아요.”
“그래. 증거는 없어. 심지어 용효월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몰라. 그러나 난 용효월을 믿어. 그녀의 말도 믿는다고.”
“그런데 왜…… 어머니를 추모하러 가지 않았죠?”
용완청의 말에 황보조가는 이를 갈았다.
“난 복수를 해야 했어. 겁쟁이 하세강도 그렇게 용효월을 따르더니, 결국엔 여양왕의 개가 되지 않았나? 그리고 백만 청동인……. 그건 나와 용효월, 그리고 하세강, 우리 셋이 함께 발견한 거야. 수룡들이 지키고 있었지? 그건 여양왕이 혼자 독식하려고 그런 거지.”
용완청은 고해를 바라보았다.
“고 타주가 말해봐. 여양왕이 우리 어머니를 죽인 것 같아?”
고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황보조가의 말만 듣고 확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정보들을 취합해 보면 여양왕일 확률이 제일 높았다.
그때 수요가 달려오더니 황급히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파파! 가시나무 대진 밖에 여양왕의 대군이 왔습니다! 비주도 굉장히 많고, 병사와 용도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