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그를 죽이게
파군이 공손하게 말했다.
“어르신, 제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초신이 고해를 죽이고 그의 간까지 빼려고 했습니다.”
초신이 무릎을 꿇고 다급히 반박했다.
“어르신, 그게 아닙니다! 고해가 먼저 저를 건드렸습니다. 고해한테 속아서 저의 부하가 이제 세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석상으로 변했단 말입니다!”
여양왕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앞에 있는 둘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고해가 일부러 너를 건드린 거다. 거절할 구멍을 찾은 거지.”
여양왕이 그렇게 정의를 내리니 파군도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반면 초신의 표정은 환해졌다.
“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여양왕의 표정은 냉랭해졌다.
“흥!”
초신은 외마디 코웃음만으로도 겁에 질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양왕이 싸늘한 눈빛으로 초신을 보며 말했다.
“고해가 왜 너를 건드렸겠느냐? 내 청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핑계가 없었던 거지. 그래서 그 핑계를 만들기 위해 너를 건드렸던 거다. 그리고 너는 그의 잔꾀에 속아 넘어간 것이고.”
초신은 말문을 잃었다.
“저, 저는…….”
“네가 나서지만 않았어도 고해를 데려올 수 있었다. 결국, 너 때문에 고해를 잃었고, 대장군도 잃었다.”
초신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옆에 서 있던 자들이 초신을 위해 간청했다.
“어르신, 초신도 자신의 몸을 구하기 위해 그런 것이니 용서해 주시지요.”
“그렇습니다, 어르신. 설령 고해가 왕부에 왔다고 해도 곧 떠났을 것입니다.”
“초신도 이번에 큰 공을 세웠잖습니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으니 용서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양왕은 한숨을 쉬며 내면의 분노를 삼켰다.
고해의 두 곡조는 대단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의 대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부하 중에도 절대 강자들이 있었다.
어쨌든 초신이 자신의 편으로 넘어왔으니 처벌을 내리기도 애매한 노릇이었다.
그때, 서재 밖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렸다.
“어르신, 묵 선생과 여 공자가 돌아오셨습니다.”
여양왕은 몸을 세우고 눈빛을 빛내며 일어섰다.
“그래? 묵 선생이 왔어?”
초신은 그제야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우우.’
곧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묵객이 여안을 데리고 서재에 들어섰다.
한 무리의 모사들이 그를 보며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오셨습니까, 묵 선생?”
“먼 길을 다녀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묵객은 그들을 향해 슬쩍 고개만 끄덕이고는, 곧바로 여양왕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셨습니까, 어르신.”
여 공자도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조부님.”
여양왕은 자신의 손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묵객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묵 선생, 내가 말했잖소.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오.”
묵객이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예의는 갖춰야지요.”
옆에 있던 여안은 여양왕이 직접 묵 선생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
‘조부님께서 묵 선생을 이 정도로 총애하셨던 건가?’
그때 여양왕이 물었다.
“선생, 물건은 이미 확인했소. 역시 묵 선생이오. 은월성에서는 별일 없었소?”
묵객이 답했다.
“이번에 은월성에서 인재 한 명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어르신의 옆에 둔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 같습니다. 어르신께서도 인재에 관심이 많으시지요?”
여양왕이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인재? 묵 선생께서 발견한 인재라면 안 봐도 대단한 실력자겠지요?”
“고해라는 사람인데, 일품당 수타주입니다. 요즘 용완청과 함께 다니던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영주에 있을 것 같은데……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여양왕이 대경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고해?”
서재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도 굳어졌다. 그들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초신도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쩌억 벌렸다.
묵객이 그 표정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설마, 어르신께서도 만나보셨습니까?”
여양왕은 초신을 노려보고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후우. 묵 선생, 고해를 인재라 하셨는데, 묵 선생이 보기에는 어느 정도로 보였소?”
묵객이 단정하며 말했다.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입니다.”
초신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고, 여양왕의 미간에 잡힌 주름도 더욱 깊어졌다.
“그럴 리가? 묵 선생께선 본인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 아니오?”
묵객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보다 열 배는 더 뛰어난 사람입니다. 잡을 수 있다면 반드시 잡아야만 합니다.”
여양왕도 묵객이 과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고해가 대단한 인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듯했다.
고해가 정말 그렇게 대단한 인재라고?
묵객이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고해가 왕부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소인의 자리도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그런데 고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초신은 울상을 지었고, 여양왕은 그런 초신을 또 죽일 듯이 째려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하아, 날개를 잃었구나.”
묵객이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무슨 말입니까?”
옆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나와 앞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줬다.
묵객은 이야기만 듣고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십팔 천지종횡대진과 십면매복? 역시 고 선생이구나. 허어어!”
여양왕이 그 모습을 보고 물어보았다.
“선생, 고해의 대단함에 대해 따로 판단할 만한 근거가 있소?”
묵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펼치며 말했다.
“이건 고해에 관한 자료입니다. 제가 정리했는데, 어르신께서도 한번 보시지요.”
여양왕은 고해의 자료를 받아서 빠르게 훑어보았다.
하지만 곧 손을 움직이는 속도가 늦어지더니, 자료를 한 장 한 장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한 장을 보고 난 후 옆에 있던 모사한테 넘겼다.
한 무리 모사들은 여양왕이 넘긴 고해의 자료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곧 서재에 있던 모사들의 입에서 한숨 소리와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후우우.”
“허어어어! 이럴 수가!”
여양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멸송계획?”
고해의 자료를 읽은 모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해가 이렇게나 뛰어난 사람이었다니.
그런 인재가 왕부에 들어올 뻔했는데, 그 기회를 초신이 망친 거나 다름없었다.
앞서 초신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초신 때문에 이렇게 유능한 사람을 놓쳤어.”
“허어, 정말 아깝군.”
묵객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여양왕은 표정만 굳어진 것이 아니었다.
쾅!
여양왕은 흉악한 표정을 짓더니 초신을 발로 차버렸다.
자신의 사람이 될 뻔한 고해를 초신이 눈앞에서 놓쳤으니 왜 화가 나지 않겠는가.
“크억!”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진 초신은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웅크렸다.
이후 서재에는 적막이 흘렀다.
여양왕은 싸늘한 눈빛으로 초신을 응시했다.
초신의 공으로 과를 덮으라고?
하지만 이번 잘못은 공을 백 번 세워도 부족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여양왕의 화가 식었다. 그러나 여전히 싸늘한 눈빛으로 초신을 보고 있었다.
여양왕이 싸늘하게 말했다.
“멸송계획을 봤겠지? 허허허. 순식간에 한 나라를 멸망시키다니. 하지만…… 내가 쓸 수 없다면 다른 사람도 못 쓰게 해야 한다.”
묵객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양왕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했다.
“어르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묵 선생, 이번 일은 이쯤에서 그만둬야 할 것 같소.”
묵객이 그 말뜻을 깨닫고 다급히 말했다.
“어르신, 그를 포기해선 안 됩니다. 그를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여양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묵 선생. 붙잡을 수 없는 자를 붙잡기 위해 시간을 지체할 순 없소.”
묵객은 어렴풋이 여양왕의 마음을 짐작하고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여양왕이 고개를 돌리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했다.
“모두들 그만 가보거라! 오순이 신록성도 부숴버렸으니 해야 할 일이 많다!”
곧 사람들이 천천히 물러갔다.
여양왕은 서재에 혼자만 남자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생인을 불러오거라.”
어디선가 나직한 대답이 들려왔다.
“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생인이 서재에 들어섰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여양왕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가서 한 사람을 죽여줘야겠어.”
미생인은 흠칫한 표정으로 여양왕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게 어르신의 세 번째 요구입니까?”
“그래.”
“세 번째 요구를 말씀하셨으니 어르신도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
“용효월의 삼혼을 저에게 주십시오.”
서재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미생인은 여양왕을 보고 있었고, 여양왕도 미생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양왕이 덤덤하게 말했다.
“용효월의 삼혼……. 그래, 약속을 했으니…….”
용효월이 죽을 때 그의 부하가 마침 용효월의 삼혼을 발견하고 가져왔었다.
그는 그걸 내걸고 미생인에게 세 가지 일을 해달라고 했다.
“어르신께서 그걸 어떻게 얻으셨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용효월의 삼혼을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죽여주지요.”
여양왕은 고개를 주억거린 후, 천천히 서재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미생인은 조용히 기다렸다. 주먹을 움켜쥐고는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곧 용효월의 삼혼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곧 여양왕이 옥함을 들고 나왔다. 옥함에는 수많은 부적이 붙어 있었다.
여양왕은 옥함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열어 보시게.”
미생인은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옥함을 열었다.
옥함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미생인의 눈에는 옥함 안에서 파란색 빛이 보였다.
미생인이 고개를 들고 여양왕을 보며 말했다.
“인혼밖에 없군요. 천혼과 지혼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양왕이 냉랭하게 말했다.
“천혼과 지혼 말인가? 아직 세 번째 요구도 실행하지 않았는데, 욕심부터 내는군.”
미생인도 그 말에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여양왕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일단 인혼부터 주겠네. 나머지는 일이 성사되면 그때 다시 나를 찾아오게.”
미생인이 냉랭하게 답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이 인혼을 누가 건드렸습니까? 기억이 사라졌고, 인혼의 특성도 보이지 않는군요.”
여양왕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내 부하가 가져올 때 실수했나 보군. 기억이 사라졌어도 용효월 아닌가? 왜? 기억이 사라진 인혼은 싫은 건가?”
미생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아아…….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기억도 없고 특성도 없는데, 제가 어찌 이 인혼을 용효월의 인혼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설마 저를 속이려는 건 아니겠지요?”
“자네를 속인다고? 자네와 같은 사람들은 매일 망령들과 얘기를 주고받지 않는가? 의심스러우면 검증해 보게나.”
미생인은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조심스럽게 옥함을 닫았다.
“말씀하십시오. 누구를 죽여야 합니까?”
여양왕이 낮은 소리로 이름 하나를 말했다.
“고해. 그자를 죽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