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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4)화 (4/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4화

각성 그리고 첫 출근(3)

붉게 상기된 얼굴을 불쑥 들이미는 리아네.

나는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예? 뭐가요?”

“말들이 배가 고프다는 것도 알아내고, 거기다가 말들에게서 기운이 흘러나와 시현 님한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죄송한데. 일단 흥분을 좀 가라앉히시는 게.”

“앗!”

내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리아네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되찾았다.

“흠흠. 죄송합니다. 잠시 흥분해서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시현 님.”

“아뇨,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뭘.”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나는 곧바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많이 민망했는지.

얼굴에 상기된 기운을 숨기지 못했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감정 없는 인형을 보는 것 같았던 첫인상과는 달리.

이 메이드는 생각보다 덜렁거리고, 감정 표현이 풍부한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이 내게는 더 친근하고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그녀의 민망함을 덜어줄 겸, 일부러 다른 주제를 꺼냈다.

“혹시 이 녀석들 돌보는 일을 계속 도와드려도 될까요? 이 정도면 저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시현 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리아네 씨. 얘들아. 너희도 들었지? 앞으로 잘 부탁할게.”

-푸르르릉.

-히힝.

말들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웃으며 녀석들을 한 번씩 쓰다듬어줬다.

이렇게 마계농장에서 나의 첫 번째 업무가 결정됐다.

* * *

농장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해가 머리 꼭대기에 와 있었다.

“시현 님. 저는 이제 점심을 준비해 보러 가겠습니다. 방에서 쉬고 계시지요. 준비가 끝나면 불러드리겠습니다.”

“아. 저는 점심을 준비해 주시는 줄 모르고 도시락을 가져와서. 제 몫은 준비 안 해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그래도 식당에서 같이 식사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자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저야 고맙죠.”

점심에 관한 짧은 대화를 끝내고.

나는 농장 건물 2층으로 향했다.

방 옆에 붙어 있는 욕실에서 간단하게 씻은 뒤, 가방 속에서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

메모장에는 오늘 둘러봤던 농장 시설들과 말을 돌봤던 일을 간단히 메모를 해뒀다. 그리고 잠시 빈둥거리다가, 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챙겼다.

괜히 도시락을 챙겨왔나? 리아네 씨가 직접 준비해 주는 식사를 맛보고 싶은데.

뭐, 기회는 내일도 있으니까.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8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 세 자리가 미리 세팅돼 있었다.

뭔가 고급지게 준비된 자리에 ‘내가 앉아도 되나?’ 싶어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카네프가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그는 테이블 가장 상석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뭐해? 밥 먹으러 온 거 아냐?”

“네. 맞습니다. 그…… 사장님.”

“거기 앉아.”

준비된 자리가 붙어 있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야 했다.

카네프는 여전히 나른한 표정이었고, 테이블에는 어색한 침묵만 맴돌았다.

잠시 후 등장한 리아네 덕분에 다행히 불편했던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하아아…… 그래.”

“……?”

식사 준비 알림에 카네프의 표정은 굉장히 비장하고 무겁게 변했다.

혹시 이곳의 특별한 식사 예절인가 싶어서 나도 덩달아 굳은 표정을 했다.

리아네가 카네프 앞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나는 곁눈질로 힐끔 접시의 내용물을 훔쳐봤다.

그리고 금방 혼란에 빠졌다.

흰 접시 위에 음식으로 추정되는 새까만 물체.

거기다 코를 찌를 정도로 심하게 느껴지는 탄 냄새.

도저히 입으로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뭐지? 마계에서는 원래 이렇게 먹는 건가?

혹시나 마계의 일상적인 요리인가 싶어서, 일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관리했다.

세계화 시대의 시민으로서 각자의 문화는 존중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런 내 노력이 무색하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나의 크나큰 착각이란 것을 금방 깨달았다.

“리아네.”

“네. 카네프 님.”

“자. 설명해 봐.”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긴장을 좀 해서…….”

“여기 온 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그동안 계속 긴장한 거야?”

“오늘은 새로 온 손님이 있어서…….”

“그럼 어제는? 일주일 전에는?”

“으으.”

매서운 카네프의 질문에 리아네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항상 차분한 모습에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메이드인 줄 알았는데, 그 이미지가 조금씩 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아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숯덩이 음식을 만드는 거야? 언제는 아예 생고기를 가져오질 않나.”

“…….”

“드래곤 브레스에 구워도 이것보다는 알맞게 구워지겠다.”

정확한 표현이네요. 카네프 사장님.

영국의 한 요리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독설에 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오늘 그녀에게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받긴 했지만, 카네프의 평가는 딱히 틀린 말이 없어 보였다.

카네프에게 혼나는 라이네의 모습을 보며,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마치 부모님에게 혼나는 친구 옆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그 어색한 상황에 괜히 식당 장식의 개수를 세거나, 창문 너머 풍경을 바라봤다.

하지만 나의 섬세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주제가 금방 내 쪽으로 넘어왔다.

“잠깐. 왜 이 녀석은 음식을 안 가져다주는 거야? 혹시 손님이라서 편애하는 거야?”

편애는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나는 리아네의 입장을 설명하려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식사가 준비되는 줄 모르고 도시락을 준비해 와서요.”

“그래? 그럼 보여줘 봐.”

“예?”

“거짓말이면 너도 나랑 같이 이거 먹어야 해.”

카네프는 약간의 분노와 한(恨)이 서려 있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도시락이 없으면 당장에라도 저 검은 물체를 내 입에 쑤셔 넣을 기세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도시락을 개봉했다.

-달칵. 달칵!

수수한 도시락통이 열리고, 식당에는 처음으로 음식의 좋은 냄새가 퍼져나갔다.

먹음직스러운 반찬들. 조금 식었어도 윤기가 흐르는 쌀밥. 상대적 비교우위 때문인지, 평범한 도시락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카네프와 리아네는 뭔가에 홀린 듯, 내 도시락을 바라봤다.

평범한 도시락에 집중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약간의 쑥스러움과 도대체 지금까지 어떤 고난을 겪었던 걸까? 하는 안쓰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한국인 특유의 정(情) 때문일까?

도시락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카네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드릴까요?”

-끄덕끄덕.

나는 테이블에 준비돼 있던 접시에 밥과 반찬들을 조금씩 담아 카네프에게 건넸다.

카네프는 천천히 음식들을 맛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생겨났고, 반대로 리아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인간! 이거 직접 만든 거야?”

“예. 직접 준비하기는 했는데.”

“그래? 인간. 아니, 시현이라고 했지? 이제부터는 네가 농장의 요리 담당이야.”

카네프는 자기 마음대로 나를 농장의 요리 담당으로 임명했다.

나는 아침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장님. 아까 저한테 시키실 일이 없을 거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

“거기다 리안 씨와 이야기한 업무 내용에서 요리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만?”

“크윽!”

카네프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아무래도 아까 나에게 했던 이야기를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고는 초조한 모습으로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내가 한 말도 있으니 억지로 시키지는 않겠어. 대신 제안을 하도록 하지.”

“……?”

“네가 농장의 요리를 담당해 준다면. 딱 한 번! 내가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너의 부탁 하나 들어줄게.”

“흐음.”

그는 내가 농장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대신, 부탁 하나를 들어주는 조건.

나는 그의 제안에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딱히 약속을 잘 지킬 것 같지도 않아 보이고, 특별히 부탁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내 시큰둥한 반응에 다급해졌는지 카네프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저쪽 세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도와줄 일이 분명 있을 거야. 내 뿔을 걸고 약속할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족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이자 힘의 원천인 뿔을 건다는 행위는 절대적인 맹약과 다름없다고 한다.

마치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스틱스 강에 대고 맹세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인 듯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맹세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거기다 한동안은 얼굴을 마주할 카네프와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그건 안 돼요!”

내가 카네프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리아네가 격하게 반응했다.

“이곳의 메이드는 저예요.”

“관리하는 사람은 나야. 인간의 표현으로 내가 사장님이라고. 결정은 내가 해.”

“으읏.”

단호한 태도에 리아네는 갑자기 나를 노려봤다.

아니,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나한테…….

그녀는 무서운 기세로 나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저도 주세요.”

“네?”

“음식!”

“……여기 있습니다.”

접시에 음식을 받아간 그녀는 천천히 그것들을 맛봤다.

음식을 맛볼수록 얼굴에 불만이 점점 사라지더니, 마지막에는 정말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해갔다.

아무래도 냉정한 현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카네프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때? 맛있지?”

“…….”

“큭큭. 그럼 시현이 새로운 식사 담당으로 결정!”

“저…… 그래도 계속 식사를 책임졌던 리아네 씨의 의견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카네프는 리아네의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게 들이밀었다. 순간 훅하고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럼 너도 매일 나랑 같이 이거 먹을래?”

“…….”

“참고로 이건 지금까지 음식 중에 먹을 만한 편이야.”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흐흐. 그렇게 나와야지.”

그녀에게는 미안했지만.

접시 위의 음식을 먹이겠다는 살벌한 협박에, 나에게는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의기소침해진 그녀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아네 씨. 괜찮으세요?”

“……주세요.”

“네?”

“음식 더 달라고요!”

물기 젖은 붉은 눈동자에, 메이드로서 자존심을 버리고 접시를 내미는 그녀.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듬뿍듬뿍 음식을 담아줬다.

“많이 드세요.”

“훌쩍. 감사합니다.”

리아네는 울음을 참으며 음식을 먹었고, 카네프는 흐뭇하게 그 장면을 바라봤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첫 만남에 느꼈던 인상이 크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오늘 출근할 때 발레리안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두 분이 약간 괴짜 같은 면이 있어서 그렇지 나쁜 분들은 아니니까요.

확실히 두 마족 모두 독특한 면이 있었지만, 걱정했던 것만큼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여러 의미로 소란스러웠던 농장의 첫 점심 식사.

그리고 마계농장에서 나의 두 번째 업무가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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