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5화
각성 그리고 첫 출근(4)
“…….”
“…….”
울타리를 따라 걷는 나와 리아네.
둘 사이에는 약간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녀는 점심 식사 때, 나에게 요리 담당을 뺏기면서 지금까지 계속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물론 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고자, 용기를 내 대화를 시도했다.
“생각보다 울타리가 엄청 넓게 펼쳐져 있네요?”
“네.”
“걸어서는 전부 둘러보기도 힘들겠어요.”
“맞습니다.”
“…….”
“…….”
그녀는 아주 짧은 단답형으로만 대답할 뿐, 전혀 내 대화에 응해주지 않았다.
어쩌지? 단단히 삐진 것 같은데.
이 답답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다가 뭔가를 떠올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에게 받았던 사탕 봉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사탕을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리아네 씨. 하나 드셔보실래요?”
“이게 뭐죠?”
“제가 살던 세계에서 가져온 건데, 과일 맛이 나는 사탕이에요.”
사탕의 비닐을 벗겨내자 과일의 달콤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사탕을 건네받은 그녀는 코끝에 가져가 기분 좋은 향기를 느꼈다.
내 눈치를 보며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사탕을 입으로 가져갔다.
“으음?”
그녀는 입안 가득 느껴지는 새콤달콤한 맛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열심히 볼을 우물거리며 사탕 맛을 본격적으로 음미하기 시작했다.
“어때요?”
“진짜 과일을 먹은 것처럼 입안에 향기가 맴돌아요. 이렇게 달콤한 음식은 처음 먹어본 것 같아요.”
“더 드릴까요?”
-끄덕끄덕.
리아네는 사탕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건네주는 사탕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에 나도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었다.
“이제 화 좀 풀리셨어요?”
-흠칫!
“화낸 적 없어요. 그냥 기분이 조금 안 좋았을 뿐이에요.”
리아네는 민망했는지 괜히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다행이고요. 혹시 화나셨을까 봐 걱정했거든요. 리아네 씨의 일을 뺏은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정말 미안하세요?”
“물론이죠.”
“그럼…….”
리아네는 나에게 불쑥 다가와 뭔가를 속삭였다. 입안에 사탕 때문인지 달콤한 과일 향이 흘렀다.
속삭임을 들은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풋. 푸하하하하!”
“왜, 왜 웃으시는 거예요?!”
“큭. 죄송해요. 푸흡.”
그녀가 내 귓가에 속삭인 말은 ‘카네프 님에게는 절대 사탕 주지 마세요.’였다.
귀여운 복수를 하려는 리아네의 모습에 정말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만 웃으세요. 안 그러면 저 또 화낼 거예요!”
“아까는 화 안 나셨다면서요.”
“으윽. 아무튼, 그만 웃으세요!”
당황하는 리아네의 모습이 재미있고, 또 한결 거리감을 줄인 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울타리가 쳐진 드넓은 초원에는 내 웃음소리가 계속 퍼져나갔고, 리아네의 얼굴은 한동안 붉은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쯤.
울타리 너머 멀리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우우우!
“어! 이 소리는?”
“야쿰의 울음소리에요. 가까이에 있어요.”
그녀의 말대로 초원 언덕 너머에서 야쿰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가오는 모습에 나는 직감적으로 이전에 봤던 그 녀석임을 확신했다.
나는 가까운 울타리 쪽으로 다가가 녀석에게 외쳤다.
“그때 너 맞지? 오랜만이야!”
-부우우우.
외침에 대답하듯 울음소리를 내는 야쿰.
그러고는 내가 서 있는 울타리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손을 뻗어 야쿰을 쓰다듬었다. 녀석도 자연스럽게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잘 지냈어?”
-부우. 부우우.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각성의 계기가 이 야쿰 덕분이라고 확신했다. 그 덕분인지 더 정감이 가고 반가웠다.
등 뒤에서 리아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야쿰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감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뭐가요?”
“이렇게 야쿰을 가까이서 접촉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거기다 저렇게 경계심이 없다니. 제가 이곳에 온 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야쿰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거든요.”
“그런가요? 이 녀석은 꽤 붙임성이 좋은 것 같은데.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에 리아네는 굉장히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계에서 야쿰을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아마 시현 님밖에 없을 거예요. 마족 대부분은 야쿰 근처에 가는 것도 힘들어하거든요.”
“흐음.”
“기록에 따르면 화가 난 야쿰 무리가 도시 하나를 반파시켜 버린 적도 있어요. 많은 마족이 동원돼 무리를 겨우 되돌려보낸 게 전부고요.”
“헉. 정말이요?”
나는 깜짝 놀라 쓰다듬던 야쿰의 눈을 바라봤다.
“너 정말로 그렇게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니?”
-부우우?
야쿰은 마치 ‘내가 뭘?’이라는 듯 울음소리를 냈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덩치 큰 귀염둥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안 님의 말대로 시현 님이라면 정말로 목표를 이뤄낼지도 모르겠네요.”
중얼거리는듯한 리아네의 말에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목표를 떠올렸다.
-야쿰의 젖을 짜내는 것.
하지만 리아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쉽지 않은 목표였다.
젖소의 젖을 짤 때도 위험한 경우가 생기는데, 도시를 박살 내버리는 야쿰의 젖을 짜다가 사고가 생긴다면?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지금은 나를 살갑게 대하는 녀석일지라도, 내가 선을 넘는 행동을 보인다면 어떻게 돌변할지 몰랐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이제 시작일 뿐이야. 그리고 나에게는 특별한 능력도 있으니.
나는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아침에 마구간에서 능력을 사용한 것처럼, 그때의 감각을 되살리며 야쿰에게 교감을 시도했다.
[대상은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상은 당신과 만남을 즐거워합니다.]
야쿰은 벌써 친밀도가 ‘호감’ 등급에다가, 나와의 만남도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더 실마리를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대상은 ······을 원합니다.]
이게 뭐지?
당황스럽게 만드는 부정확한 메시지.
나는 능력 사용에 조금 더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곧이어 알 수 없는 장면이 끊임없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떠오르는 장면 속에 정체를 모를 무언가가 낙인처럼 머릿속에 새겨졌다.
-부우우우우우!!
멀리서 들려오는 또 다른 야쿰의 울음소리.
그 소리 때문에 교감 능력이 중단됐다.
울음소리가 들려온 곳에서는 여러 마리의 야쿰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
그중 가장 덩치가 큰 녀석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부우우. 부우우.
나와 함께 있던 야쿰은 내게 작별인사를 하듯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무리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야쿰이 무리로 돌아가고 난 뒤에도, 나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머릿속에 남은 장면들을 곱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시현 님?”
“잠시만요. 리아네 씨.”
나는 아까 가져왔던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
비어 있는 종이에 어색하게나마 머릿속에 있는 것을 그림으로 옮겼다.
-스윽. 쓱쓱.
어설픈 그림 실력 탓에 완벽히 옮기지는 못해도, 대강의 형태는 확실하게 표현해냈다.
“리아네 씨. 혹시 이런 식물 본 적 있으세요?”
“네? 잠시만요. 으음.”
“이 부분은 보라색이고, 나머지는 초록색이에요.”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은 안 나네요.”
“혹시 찾을 방법이 없을까요? 혹시 카네프 사장님은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분도 거의 농장 건물에만 계셔서. 아마 이곳 주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거예요.”
“아…….”
나는 아쉬운 마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실망하는 모습을 본 리아네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림 속 식물에 대해서 알 만한 사람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어요.”
“정말이요? 거기가 어딘데요?”
리아네는 말을 멈추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간은 충분하겠네요. 한 시간 정도 걸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 정도는 거뜬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따라오세요.”
* * *
리아네는 나를 이끌고 농장이 있는 산 중턱에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선선한 느낌이 조금씩 포근함으로 바뀔 때쯤, 눈앞에 작은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
아기자기한 느낌의 마을 분위기는 마치 영화 세트장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을 감상하며 감탄하던 도중.
더욱 놀라운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잡았다! 이제 네가 술래야.”
“꺄하하하. 나 잡아 봐라!”
“거기서!”
강아지, 고양이, 토끼. 각가지 동물의 모습을 닮은 아이들이 마을 입구에서 뛰놀고 있었다.
너무나도 귀여운 수인 꼬맹이들의 모습에 절로 시선이 따라갔다.
“어?”
뛰놀던 아이 중 한 명이 나와 리아네를 발견했다. 우리를 살피던 그 아이는 깜짝 놀라 외쳤다.
“마족이다!”
“마족. 마족!”
“빨리 엄마 아빠한테 알려야 해.”
아이들은 순식간에 마을 안쪽으로 뛰어들어 가버렸다. 마치 괴물을 본듯한 반응이었다.
“들어가시죠. 시현 님.”
“아…… 네.”
리아네는 이런 반응이 아무렇지 않은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움직였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싸늘한 시선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수군수군
마을 주민들은 우리의 모습을 훑어보며 불편한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봐도 손님을 맞이하는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때.
“아바. 아바바바.”
아장아장 걷는 아기 토끼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축 처진 토끼 귀에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너무 귀여웠다.
아기는 처음 만난 우리가 무섭지도 않은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으으. 너무 귀엽다. 아가야. 이거 먹을래?”
“우웅?”
나는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뜯어 아기 쪽으로 건넸다.
사탕의 알록달록한 색깔 때문인지 아기는 금방 흥미를 보였다.
아기의 작은 손이 사탕을 쥐려는 순간.
“꺄아아악! 안 돼!”
갑자기 나타난 토끼 여성이 아기를 감싸 안았다.
마치 내가 아기에게 나쁜 짓을 하려다 차단을 당한 것 같은 상황이었다. 날카로운 비명 때문에 마을의 분위기는 더 흉흉하게 변해갔다.
“저…… 아기를 위협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조금 억울한 마음에 변명을 해보았지만.
토끼 여성은 전혀 듣지 않고, 아기를 감싸 안은 채 멀리 뛰어가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경계심이 심한 마을에서 괜히 섣불리 움직인 것 같아 후회됐다.
“리아네 씨.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분위기가 많이 이상해졌네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시현 님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니까요.”
“그럼 도대체 왜…….”
“어이! 거기 두 놈! 남의 마을에서 무슨 행패를 부리는 거지?”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두 명의 수인이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한 명은 돼지, 나머지는 사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돼지의 모습을 한 수인이 특유의 콧소리와 함께 리아네를 위협했다.
“킁. 보아하니 마족인 것 같은데. 맞지?”
“…….”
“크응! 이것 봐라. 우리랑은 말도 섞기 싫다 이거야?”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막기 위해 내가 앞으로 나섰다.
“두 분! 일단 진정하시고. 저희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이 새끼는 뭐야. 이놈은 마족이 아닌 것 같은데?”
“보면 모르겠냐? 마족 똘마니 짓이나 하는 놈이겠지.”
“도움을 구하려 찾아왔습니다. 여기 이렇게 생긴 식물을 찾고 있는데…….”
말을 전하는 도중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에 이끌려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동시에 눈앞에는 번쩍하고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돼지 수인의 손에는 어느새 단검이 들려 있었다.
리아네가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얼굴에 칼자국이 남을 뻔한 상황이었다.
심장이 서늘해지는 감각.
그리고 뒤늦게 올라오는 분노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큭큭. 방금 저 녀석 표정 봤냐?”
“봤지.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데.”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수인의 행동에 나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런 내 앞으로 리아네가 나섰다.
“뒤로 물러나시죠. 시현 님.”
“리아네 씨. 그냥 돌아가죠. 전혀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네요.”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다 예상했으니까요.”
리아네의 이런 행동에 이번에는 사슴 수인도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거기 마족. 옆에 있는 겁쟁이 말대로 그냥 돌아가지?”
“그래.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빌면 곱게 돌려보내 줄게. 안 그러면 이 단검으로 찢어지는 고통을 맛보게 될 거야.”
껄렁껄렁한 협박에 리아네의 표정이 점점 변해갔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차갑고 딱딱한 느낌으로.
그녀는 오른쪽에 끼고 있던 메이드 장갑을 벗었다. 맨살을 드러낸 가녀린 오른손이 기괴한 소리와 함께 변하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드득.
점점 두꺼워지던 오른손은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나고, 순식간에 붉은 비늘로 뒤덮였다.
“어…… 어어?!”
“이. 이게 뭐야?”
두 수인은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느꼈는지.
흔들리는 눈동자로 리아네를 바라보며 뒷걸음질 쳤다.
오른손을 중심으로 숨이 막힐 듯 뻗어 나오는 파괴적인 기운.
당장에라도 눈앞의 수인들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리아네의 입에서 그르렁거리듯 살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찢어져 죽는 게…… 뭔지 알게 해줄까?”
“컥!”
“히이익!!”
리아네 씨…… 아니, 리아네 누님의 박력에 두 수인의 얼굴은 사색으로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