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7화
평온한 일상, 다가오는 위기(1)
“뭐 잊은 건 없니?”
“응. 다 잘 챙겼어. 매번 배웅 안 해줘도 된다니까.”
“아침은 못 챙겨줘도, 열심히 일하는 아들 배웅은 해줘야지.”
좀 더 늦게까지 편하게 주무셨으면 좋으련만.
항상 현관까지 배웅을 나와주는 어머니가 고마우면서도 짠한 마음이 들었다.
“맞다. 오늘 엄마 병원에 검사하러 가는 날이지?”
“오후에 예약 잡혀 있어.”
“나중에 나와서 같이 병원 갈까?”
“어이구. 됐네요.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 열심히 일이나 하세요.”
마음 같아서는 반차를 쓰고 어머니를 직접 모셔다드리고 싶지만, 저렇게 질색하시니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결과 나오면 나한테 바로 말해줘야 해. 조금이라도 안 좋은 부분 있으면 숨기지 말고. 나 의사 선생님께 전화해 볼 거야?”
“알았어.”
“그리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저번에 준 전화번호로 연락하고. 아무 때나 전화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꼭 전화해.”
“어휴. 너희 아버지는 잔소리 안 심했는데. 너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잔소리가 심하니?”
“아버지 안 닮았으면 엄마를 닮았나 보지. 나 그럼 나간다.”
짐을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오래된 빌라 입구를 빠져나와 골목길을 걸어 나갔다.
마계농장에 취직한 지 벌써 한 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출근길이 완전 익숙해졌다.
처음보다 빨라진 출근 시간 덕분에 지하철도 여유롭게 이용 가능했다.
오전 7시가 조금 넘었을 때, 나는 인페리스 사무실에 도착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시현 씨.”
“안녕하세요. 역시 와 계시네요.”
꽤 이른 시간임에도 발레리안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일찍 출근하는 걸까?
“바로 농장으로 출근해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아! 시현 씨. 오늘은 아마 농장에 손님이 찾아올 겁니다.”
“손님이요?”
“네. 필요한 물건도 가져다주고, 시설 점검도 해주는 친구입니다.”
흠. 찾아오는 손님이면 아무래도 마족이겠지?
너무 괴상한 마족만 아니라면 좋을 텐데.
“그렇게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카네프 님이나 리아네에 비하면 훨씬 평범한 친구라서요.”
“쩝. 얼굴에 티가 낫나요?”
“그런 건 아니고. 제가 원래 눈치가 좀 빠릅니다. 해드릴 말씀은 이게 끝입니다. 오늘도 서로 열심히 일해보죠.”
“네. 리안 씨도 파이팅입니다.”
발레리안과 서로 격려를 주고받은 뒤.
아무렇지 않게 마계로 향하는 문을 통과했다.
이제는 이것도 익숙해져서 요즘은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익숙한 동굴을 빠져나와 곧바로 농장으로 향했다.
그동안 지구의 출근길은 금방 익숙해졌지만. 이 깨끗한 공기와 싱싱한 느낌은 항상 새롭고, 기분 좋게 해줬다.
출근길의 행복도만 따지자면, 한국에서 꽤 상위권이지 않을까?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농장 건물에 도착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2층 내 방으로 향했다.
침대 위에는 세탁된 작업복이 정성스럽게 개어져 있었다.
준비해 준 리아네에게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직 고요한 분위기의 건물을 빠져나와 나의 첫 번째 업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안녕. 얘들아! 밤에 별일 없었지?”
-히힝.
-히히힝.
마구간의 말들이 반갑게 내 인사를 받아줬다. 한 달 동안 돌봐준 덕분에 친밀도도 많이 올랐다.
최근에는 리아네에게 말 타는 법도 배웠다.
아직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릴 정도는 아니지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승마의 매력에 푹 빠진 상태였다.
말들을 꺼내 싱싱한 풀이 있는 장소에 데려다주고.
그사이 나는 더러워진 마구간을 청소했다.
청소가 끝난 뒤에는 물통과 먹이통을 채우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일을 끝냈다.
다시 마구간에 말들을 들여보내고,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다음으로 내가 향한 곳은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축사.
당연히 더러워진 곳도, 먹이를 준비해 줘야 할 필요도 없는 곳이지만. 나는 매일 이곳에 들려 간단히 청소했다.
한창 바닥을 쓸고 있을 때.
“오늘도 여길 청소하는 거야?”
“헉! 깜짝이야.”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뒤를 돌아보니, 축사 입구에 기대선 카네프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으. 사장님. 오셨으면 인기척이라도 내시지. 정말 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나의 격렬한 반응에도, 카네프는 특유의 느긋한 표정으로 하품을 할 뿐이었다.
“왜 놀라? 내가 부를 수도 있지.”
“평소에는 잘 안 부르시잖아요. 거기다 집 밖으로 잘 나오시지도 않고.”
“그건 그렇지.”
꽤 평범하게 이어지는 대화.
리아네 만큼은 아닐지라도, 카네프와의 관계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무관심했던 첫 만남과는 달리. 최근에는 자연스럽게 인사도 나누고, 가끔 먼저 말을 걸어주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축사까지 따라와 말을 건 적은 처음이었다.
“아까 뭐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여길 또 청소하냐고. 아무것도 없는 축사인데 뭐하러 매일 청소하나 싶어서.”
처음에는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는데. 진지한 눈빛을 보니 그런 의도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진지하게 내가 생각한 이유를 털어놨다.
“말하기 조금 쑥스럽긴 한데. 이렇게 매일 열심히 청소하다 보면 혹시 야쿰 녀석들이 마법처럼 여기에 와주지 않을까 싶어서요.”
내 대답을 듣고 카네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실없는 이유였네?”
“그렇죠? 근데 예전에 아버지가 그랬거든요. 말 못 하는 동물들이라도 우리가 하는 행동을 다 이해하고 반응한다고요. 그러니까 저도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저 녀석들이 알아주지 않을까요?”
“…….”
“…….”
카네프는 내 말에 민망할 정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말을 대충 흘려들은 것 같기도 했다.
“뭐 해?”
“예?”
“청소 아직 덜 끝난 거 아니었어?”
“아…… 네. 아직 덜 끝났죠.”
“하던 거 해. 그럼.”
혹시 도와주지 않을까? 잠시 기대했지만.
카네프는 입구 쪽 벽에 기대서 평소의 나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하아암. 빨리 끝내. 잠꾸러기 파괴왕이 또 부엌에 들어가기 전에.”
“네. 금방 끝납니다.”
나는 대답과 동시에 얼른 나머지 청소를 끝냈다.
축사의 청소를 마무리하고.
나는 카네프와 함께 농장 건물로 돌아갔다.
때마침 계단을 통해 2층에서 내려오는 리아네와 마주쳤다.
반쯤 잠에 취한 얼굴에 침대에서 곧바로 나온듯한 잠옷 차림.
거기다 반쯤 흐트러진 탓에 잠옷 사이로 속살이 비칠 것만 같았다.
“안녕…… 하세요…… 우웅.”
꽤 귀여운 느낌의 잠옷이었지만, 왠지 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반면 카네프는 쯧쯧 혀를 차더니,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빡!!
“아얏!”
가볍게 친 것 같은 딱밤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덕분에 정신을 차렸는지, 리아네는 후다닥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죄송합니다. 시현 님. 정말 죄송합니다.”
평소의 메이드 복장으로 돌아온 리아네는 거듭 고개를 숙였다. 딱밤을 맞은 이마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침부터 흉한 꼴을…….”
“괜찮아요. 일단 진정 좀 하세요.”
“죄송합니다. 방금 보여드렸던 모습은 잊어주세요.”
그렇게 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잠옷 차림에 비몽사몽이던 귀여운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나도 같이 흉한 꼴을 봤는데?”
카네프의 말에 리아네는 눈살을 찌푸렸다.
“카네프 님은 조용히 하세요. 아까 맞은 이마가 아직도 얼얼하다고요.”
“늦잠을 잔 메이드가 오히려 주인에게 화를 내다니.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으읏! 원래 잠이 많은 일족이라 어쩔 수 없다고요.”
리아네는 조금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그래도 늦잠을 잤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재차 얼굴을 붉혔다.
“자. 자. 리아네 씨. 일단 앉으세요. 금방 식사 준비해 드릴 테니까.”
나는 리아네를 자리에 앉히고 준비된 아침을 내왔다.
오늘 아침의 메뉴는 버터를 발라 노릇하게 구워낸 빵과 부드러운 오믈렛.
그리고 마계의 채소와 과일로 만든 샐러드였다.
“맛있게 드세요.”
“잘 먹을게.”
“잘 먹겠습니다. 시현 님.”
곧바로 나도 내 자리에 요리를 가져와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지구에서는 굉장히 흔하게 볼 수 있고, 평범한 맛의 음식이지만. 두 마족은 굉장히 만족스럽게 아침을 즐겼다.
리아네의 경우.
처음에는 요리 담당을 뺏겼다는 상실감에 내 요리를 즐기지 못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내 요리에 익숙해졌다.
대신 난감한 경우가 생기곤 하는데.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리아네가, 불쑥 자신감이 생기는지 직접 해보고 싶다는 요청을 할 때가 있다.
물론 카네프가 보내는 무언의 압박 때문에 거의 모든 요청은 거절하는 중이다.
그때마다 리아네는 원망의 눈길을 보내지만.
일어날 참사를 막기 위해 애써 모른척했다.
카네프의 경우는 굉장히 쉬웠다.
달걀 프라이만 만들었을 뿐인데 감탄할 정도였으니. 도대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알아낸 특이한 점은.
마계라는 곳은 단맛이 굉장히 귀한 곳이라는 점이었다.
과일이나 채소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음식 재료에도 단맛이 미미했다.
그래서 단맛에 대한 역치가 굉장히 낮았다.
그나마 단맛이 강한 음식 재료는 가치가 굉장히 높았고, 높은 신분의 존재들만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사탕을 먹고 깜짝 놀라던 모습들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난 뒤.
리아네는 뒷정리를 위해 부엌으로 향했고, 카네프는 식당 의자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도 자리에 앉아 식사의 여운을 즐기던 중.
-똑. 똑. 똑.
건물의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제외한 아무도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반응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똑. 똑. 똑.
재차 들리는 노크 소리에 문을 열며 상대방을 확인했다.
열린 문 앞에는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 다음으로 눈에 띄는 두 개의 뿔.
창백한 피부에 입과 코를 가리는 복면을 쓰고 있었고, 퀭한 두 눈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마 평범한 일반인이 마족을 상상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로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마족이었다.
“누구…… 세요?”
긴장이 가득한 내 질문에 마족은 오히려 당황한 듯 양팔을 허우적거렸다.
잠시 후 뭔가를 깨닫고 상체를 구부려 나와 얼굴을 가까이 맞댔다.
탁한 두 눈동자로 나를 살피더니, 착용한 복면 너머로 묵직한 중저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임시현 님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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