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8화
평온한 일상, 다가오는 위기(2)
처음 만난 마족의 입에서 갑자기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 당황스러운 와중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제가 임시현입니다.”
내가 스스로 정체를 밝히자, 복면 위로 보이는 눈이 살짝 휘어졌다.
아마 미소를 지은 듯했다.
“혹시나 해서 여쭤봤는데 다행이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안드라스 리드넬 슈나르페’라고 합니다.”
“어…….”
굉장히 정중하고 격식이 느껴지는 인사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덩치 큰 마족은 차분히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농장에서 일하는 임시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임시현 님. 괜찮으시면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네! 들어오시죠.”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허락을 구한 뒤, 마족은 살짝 고개를 숙여 문을 통과했다.
큰 키 덕분에 평범한 문이 낮게 느껴졌다.
“카네프 님은 계십니까?”
“네. 지금 식당에 계시죠. 안내해 드릴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손님을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큰 키와 어두운 분위기로 인해 첫인상은 굉장히 불편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짧은 대화만으로도 대하기 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식당에서는 아직도 카네프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마침 뒷정리를 끝내고 나오는 리아네가 우리와 마주쳤다.
“어? 안드라스 님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리아네 양.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차를 준비해 올게요.”
두 사람은 서로 친분이 있는지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받았고, 리아네는 차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약간의 소란스러움에 졸고 있던 카네프가 스르륵 눈을 떴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손님의 존재를 확인한 뒤, 늘어지는 하품을 하며 말을 꺼냈다.
“하아암. 왔냐?”
“네. 카네프 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당연히 잘 지냈지. 여기서 내가 하는 일이 뭐가 있다고. 결계 점검 때문에 온 거냐?”
“그것도 있고. 식자재랑 다른 생필품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금방 부족해졌네요.”
“지금은 한 명 더 늘어났으니까.”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나를 바라보던 키가 큰 마족은 뭔가를 떠올렸는지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따로 부탁하신 물건도 같이 챙겨왔습니다.”
“응? 나는 부탁한 것 없는데?”
“리안이 구해달라고 부탁한 물건인데. 아마도 임시현 님께서 요청한 물건인 것 같습니다.”
뭐지? 내가 요청한 물건?
내 눈동자에 궁금한 감정이 떠오르기도 전에, 키가 큰 마족은 로브의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작지 않은 크기의 책이 그의 품 안에서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
마치 마술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짧은 사이에 그는 10권 정도 되는 책을 순식간에 식당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 덕분에 식당에는 마치 도서관에 온 것 같은, 오래된 책 냄새가 가득해졌다.
“이게 뭐죠?”
“임시현 님께서 야쿰에 대한 정보를 구하고 싶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제야 나는 얼마 전에 발레리안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교감만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너무 단편적이고 한정적이라, 조금 더 야쿰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발레리안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놨었는데. 그 덕분에 이런 상황이 연출된 듯했다.
“워낙 야쿰에 관련된 책이 없어서, 이 정도 구하는 데도 꽤 고생해야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안드라스 씨. 이렇게 불러도 괜찮을까요?”
“충분합니다.”
안드라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있던 와중, 차를 준비해 온 리아네가 뾰족한 소리를 냈다.
“아앗! 이건 뭐죠?”
“시현 님께 전해드리기 위해 가져온 책인데…….”
“이렇게 먼지가 많이 날리는 물건을 식당에 내놓으면 어떻게 해요?”
“…….”
확실히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해서인지, 책 주변에는 모두 텁텁한 먼지로 가득했다.
“빨리 다시 집어넣으세요.”
“아, 알겠습니다.”
안드라스는 허둥지둥 책들을 품속에 넣기 시작했다.
책을 꺼낼 때는 마술사의 신비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우스꽝스러운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카네프도 웃음을 참지 못해 끅끅거렸다.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리아네는 나를 포함한 세 명을 식당에서 내쫓아버렸다.
“끙. 저 녀석. 점점 마귀할멈을 닮아가는 것 같다니까?”
안드라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쫓겨난 우리는 곧바로 카네프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안드라스는 책상 위에 다시 책들을 꺼내놨다.
“안드라스 씨. 책을 살펴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시현 님을 위해 가져온 것들이니까요.”
나는 가장 위에 있는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대학 전공 책 뺨치는 크기와 무게에 손목이 얼얼해졌다. 딱 봐도 읽기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죄송한데 이거 못 읽겠는데요.”
“네? 무슨 문제라도?”
“제가 글을 못 읽어서요.”
“아아. 그렇군요. 지금 통역 반지를 사용하고 있으시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책의 제목에 생소한 문자를 확인했을 때, 내가 마계에서 문맹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워낙 통역 반지의 기능이 뛰어나다 보니 일어난 사고였다.
“조금 번거롭겠지만. 카네프 님이나, 리아네 양에게 대신 읽어달라고 하셔야겠습니다.”
“아. 그러면 되겠네요.”
“그것도 힘들겠는데? 이거 나뿐만 아니라 리아네도 못 읽어.”
카프네의 말에 안드라스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근데 무슨 말씀이신지?”
“이 책들 대부분이 남부지방 쪽 언어로 적혀 있어. 말은 대충 알아들어도 언어는 쉽게 못 읽거든. 리아네도 마찬가지일걸?”
안드라스는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했는지 꽤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카네프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네가 해석해 주고 가면 되겠네. 너는 다 읽을 수 있잖아.”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오늘 책만 전해드리면 되는 거로 생각해서…….”
“그러니까 해석도 해주고 돌아가라고. 일정은 바뀔 수 있는 거지.”
“제가 많이 바쁜 거 아시지 않습니까? 어제도 늦게까지 야근하고 왔는데…… 다시 가져가서 다음에 해석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애절함이 느껴지는 부탁에 카네프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바쁘다면 할 수 없지.”
“감사합니다. 카네프 님. 다시 가져가서…….”
“가져갈 필요 없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남부 쪽 언어를 잘 아는 사람이 있거든. 슈나르페 가문의 가주가 그렇게 남부 언어를 잘 안다지?”
“…….”
“그러고 보니 너랑 슈나르페 가주랑 무슨 사이였더라?”
“……제 아버지이십니다.”
“하핫! 이런 우연이! 정말 잘됐네. 너 아버지에게 연락드린 지 꽤 오래됐지? 지금 당장 연락해서 전해. 카네프가 부르니까 당장 이곳으로 튀어오라고.”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억지.
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카네프란 인물은 절대 헛소리를 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쭙잖게 반항했다가는 정말로 슈나르페 가주라는 인물이 농장에 방문하게 될지도 몰랐다.
안드라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순순히 저항을 포기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응? 너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괜히 무리하지 말고. 슈나르페 가주 부르면 된다니까.”
“아뇨. 제가 하고 싶습니다! 저 남부 언어 굉장히 잘합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슈나르페 가주 얼굴도 보고 싶었는데.”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전혀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카네프.
정말 사악한 웃음에 지켜보던 나까지 질려버릴 정도였다.
체념한 듯한 안드라스의 모습은 나의 마음을 안쓰럽게 했다. 괜히 나를 도와주려다 봉변을 당한 상황이니…….
오늘 처음 만났지만, 주눅 든 커다란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식사는 제대로 챙겨줄게.”
“식사는 괜찮습니다. 번역해 드리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식사는 생략하겠습니다.”
그 말에 카프네는 어울리지 않는 자상한 미소와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괜찮아. 억지로 일까지 시키는데 식사는 제대로 대접해야지. 오늘 점심은 리아네가 아니라 저기 시현이 준비해 줄 거야.”
“아. 진짜입니까?”
“물론이지.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러면 괜찮지?”
“네. 괜한 걱정이었네요. 저는 당연히 리아네 양이 준비하는 줄 알고…….”
“제가 준비하면 왜요?”
“리아네 양이 내오는 건 음식이 아니라 독극물…… 헉! 리아네 양!”
안드라스가 옆에는 이미 리아네가 차가운 냉기를 풀풀 뿜어내고 있었다.
아…….
안드라스 씨.
그는 결국 악마가 쳐놓은 덫에 또 걸려들고 말았다.
하필 리아네가 차를 가지고 들어오는 타이밍에 저런 실수를…….
소리죽여 웃는 카프네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마 일부러 말을 유도한 게 틀림없었다.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차가운 눈빛이 리아네에게서 흘러나왔다. 물론 그 대상은 안절부절못하는 안드라스였다.
“안드라스 님은 차 안 드셔도 되죠? 독극물은 싫어하실 테니까.”
“아, 아니. 리아네 양. 그게 아니라.”
리아네는 안드라스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고, 나와 카프네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카프네는 차 향을 즐기며,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오늘따라 리아네의 차 향이 더 좋은 것 같아. 시현. 안 그래?”
저 여유로운 미소가.
한 마족을 구렁텅이로 빠뜨린 즐거움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지만, 굳이 리아네의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다.
“뭐. 리아네 씨의 차는 항상 향기로웠으니까요.”
카프네와 나의 감상이 마음에 들었는지, 리아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두 분 차 더 드시겠어요? 아직 많이 남아 있거든요. 그리고 안드라스 님은 먼지 냄새가 나는 것 같으니, 저기 구석으로 좀 가주실래요? 탁자 위에 책들도 함께 가져가 주시고요.”
“네…….”
안드라스는 또 책들을 주섬주섬 챙겨 방의 구석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신기함, 두 번째는 웃음을 주더니. 마지막에는 안쓰러운 모습으로 마무리됐다.
* * *
-우우웅! 우우우웅!
낮은 진동음을 내며 울타리 주변을 날아다니는 기계 장치들.
주먹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녀석들은 특별한 비행 장치 없이도 아주 자유롭게 허공을 움직였다.
저게 말로만 들어봤던 마법 도구, 또는 아티팩트라 불리는 물건 같아 보였다.
지금은 인간도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지만, 마족의 기술력에 비하면 겨우 흉내만 내는 수준이라고.
하지만 아티팩트보다 더욱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것들을 통제하면서 두꺼운 책을 빠르게 읽어나가는 안드라스의 모습이었다.
-촤르르륵!
그는 커다란 손으로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는 중이었는데.
책 내용을 읽을 수 있을까? 책장만 넘기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잠시 후.
-척!
마지막 장을 넘긴 안드라스는 두꺼운 책을 로브의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동시에 떠다니던 아티팩트들도, 마치 둥지로 되돌아오는 새들처럼 그의 소매 안으로 되돌아갔다.
소맷자락을 한 번 가다듬은 그는 내 쪽으로 다가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결계 점검이라는 게 단순하고 시간만 오래 걸리는 작업이라.”
“아뇨. 굉장히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그렇습니까?”
“네. 거기다 결계 점검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한 건 저였으니까. 괜찮습니다.”
내 대답에 안드라스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복면에 가려져 전체 표정은 볼 수 없어도, 조금은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겉모습이랑은 다르게 참 배려심 많은 마족일세.
인간이든 마족이든.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다시 새기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결계 점검은 다 끝나신 건가요?”
“앞으로 몇 군데 더 살펴봐야 합니다. 잠시만 쉬었다 가도 되겠습니까? 마력을 충전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요.”
“당연하죠. 저기서 잠시 쉬었다 가죠.”
나와 안드라스는 적당한 바위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안드라스는 또 다른 책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카네프의 협박 때문인지 책 번역을 서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괜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쩝.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 같아 죄송하네요.”
“아! 아닙니다. 리안 그 친구에게도 시현 님을 잘 도와드리라는 부탁을 받았으니까요. 바쁜 건 사실이지만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다…….”
안드라스는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정말로 맛있는 점심을 대접받아서 그걸로 만족합니다. 그 음식 이름이 ‘카레’라고 했던가요?”
결계 점검을 나오기 전.
점심으로 싱싱한 채소와 고기를 듬뿍 넣고, 달달한 맛을 살려 카레를 만들었는데.
아무래도 안드라스는 내가 만든 카레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나중에 좀 챙겨드릴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시현 님. 오늘 야근할 때 챙겨 먹을 수 있겠네요.”
나 때문에 야근하게 됐는데, 카레를 얻었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짠한 기분이었다.
속으로 카레를 넉넉히 챙겨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짧은 휴식을 끝내고.
안드라스는 다시 농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점검을 이어나갔다.
세 곳 정도 돌아다녔을 때.
안드라스는 점검 작업이 끝났음을 내게 알렸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네요?”
엄청 넓은 농장의 크기에 비해, 결계의 점검이 금방 끝난 것처럼 보였다.
“구역을 나눠서 따로따로 점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꺼번에 결계를 점검하려면 온종일 돌아다녀도 부족하거든요.”
“아아.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스레 농장의 울타리를 바라봤다.
“마족은 정말 대단하네요. 이렇게 넓은 농장에 결계를 설치할 수 있다니.”
“이 정도의 규모는 마족에게도 절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들어간 노력과 비용 때문에 마족들 사이에서도 꽤 논란이 심했으니까요.”
“흐음. 근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제가 봤을 때는 야쿰이라는 녀석들은 굉장히 얌전해 보이던데.”
내 질문에 안드라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하게 대답했다.
“시현 님. 야쿰은 평소 보여주는 얌전한 성격과는 별개로, 절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
“일반적인 무기, 마법은 통하지 않을뿐더러. 치명적인 독이나 정신 공격에도 내성이 있어서. 아주 강력한 몇몇 마족을 제외하면 무적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멀리 있는 농장 건물을 잠시 바라보다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거기다 무리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주변의 모든 위험요소를 파괴할 때까지 분노를 멈추지 않습니다. 대응할 방법이 거의 없기에 재난이나 다름없죠.”
“으음.”
“그러니 최대한 위협을 가하지 않는 결계가 농장을 유지하는 최선이라 판단한 겁니다. 이제 이해가 되셨는지?”
“아…… 예. 설명 감사합니다.”
가벼운 질문에 돌아온 무겁고 진지한 대답.
당황스러운 감정을 속으로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릿속에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이렇게 야쿰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데.
왜 마족들은 이 농장을 만들었을까? 왜 ‘야쿰의 젖’을 원하는 걸까?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새롭게 생겨난 의문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사이.
호랑이…… 아니, 야쿰도 제 말 하면 오는 것일까?
멀리서 야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우우!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나는 곧바로 울타리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최초로 교감을 나눴던 야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너였구나. 예쁜아. 잘 지냈어?”
-부우우.
내 인사에 대답하는 예쁜이.
야쿰 무리 중에 가장 예뻐 보였기에 그렇게 이름 붙였다.
지금은 녀석도 이름을 알아들을 만큼 익숙해졌다.
나는 녀석을 쓰다듬으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교감 능력을 통해 예쁜이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파동이 느껴졌다.
전보다 선명해진 파동을 통해, 이제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기들도 건강하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밥도 잘 챙겨 먹어야 한다. 알았지?”
-부우우!
내가 예쁜이의 상태를 살펴보는 사이.
다른 야쿰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녀석들은 내 쪽으로 고개를 쑥 내밀어 코를 킁킁거렸다.
“미안. 미안. 오늘은 맛있는 거 안 가져왔어. 나중에 가져다줄게.”
처음 예쁜이에게 보랏빛 물망초를 가져다준 뒤.
다른 야쿰들이 나에게 관심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물망초를 듬뿍 나눠주며 꾸준히 교감을 해주다 보니, 어느새 꽤 많은 수의 야쿰과 친밀도를 쌓게 됐다.
오늘은 물망초가 없어 아쉬워하는 야쿰들 기분을 능숙하게 달래줬다.
“정말 이 정도일 줄이야.”
안드라스의 중얼거림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는 커다래진 눈으로 나와 야쿰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네?”
“리안이 말하길 이번에는 정말로 농장 일에 어울리는 사람을 찾은 것 같다고. 굉장히 흥분해서 자랑하더군요.”
“하하. 좀 쑥스럽네요.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닌데…….”
“직접 보니 이제 알겠습니다. 그 친구가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시현 님은 정말 특별한 분이셨군요.”
복면으로 얼굴이 반쯤 가려져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말투에서 놀라움과 약간의 허탈함이 묻어나왔다.
그의 반응에 나는 민망함을 느꼈다.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 급히 입을 열었다.
“가까이 오셔도 괜찮아요.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신 것 같은데.”
“크흠. 저는 이 정도가 적당한 것 같습니다.”
내 제안에 안드라스는 양손을 내저으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저번에 리아네가 보였던 비슷한 반응을 생각하면, 마족들은 내 생각 이상으로 야쿰을 꺼리는 듯했다.
내가 보기에는 귀엽기만 한데…….
그때.
멀리서 아주 커다란 야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우우우!!!
울음소리는 땅이 살짝 떨릴 정도로 크고 우렁찼다.
그 소리를 들은 야쿰들은 하나둘 내 곁을 떠나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예쁜이도 아쉬워하며 그들을 뒤따랐다.
“시현 님. 이 울음소리는?”
“야쿰 무리의 우두머리가 내는 울음소리예요. 무리를 부르는 신호죠.”
“아아∼.”
“저기 저쪽에 가장 큰 녀석 보이시죠? 저는 ‘큰뿔이’라고 부르는 녀석인데, 저 녀석이 무리를 이끌고 있어요.”
예쁜이보다 1.5배는 더 큰 것 같은 덩치. 위협적으로 자란 커다란 뿔.
큰뿔이는 경계심 가득한 눈동자로 이쪽을 노려봤다.
다른 야쿰들은 조금씩 친밀도가 오르고 있는데, 저 녀석은 도저히 친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저랑 야쿰들이 같이 있으면 항상 저러더라고요.”
내 이야기를 들은 안드라스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시현 님. 저 우두머리가 언제부터 저런 행동을 했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음.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확실한 건 최근에 점점 심해지더라고요.”
살짝 떨리는 눈동자와 함께 그의 미간에 심하게 주름이 생겨났다.
그러더니 소매에서 아까 보았던 커다란 책을 꺼내 들고, 다급하게 무언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아까 예쁜이라고 부르는 야쿰이 새끼를 가졌다고 하셨죠?”
“네. 그런데요?”
“확실하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방금 책에서 봤던 내용을 보면, 그 큰뿔이라는 우두머리의 행동은 새끼를 가진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무리에서 출산을 앞둔 개체가 있으면. 무리의 우두머리는 새끼와 어미의 안전을 위해 안전한 장소를 찾는다고 합니다.”
나는 뭔가 불안함을 느끼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만약에 주변의 상황이 안전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
“안전에 위협을 주는 요소가 사라질 때까지 폭주한다고 합니다.”
그의 입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