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0화
평온한 일상, 다가오는 위기(4)
“여기도 오랜만에 오네요.”
“네. 벌써 한 달 정도 지났네요.”
나와 리아네는 수인 마을 입구에 와 있었다.
“들어가 볼까요?”
“네. 시현 님.”
처음 방문했을 때 험한 대접을 받았던 터라 조금 긴장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도움이 꼭 필요하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입구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번에도 당연히 환영받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아주 열렬한 환영 인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사탕 아저씨! 마족 언니!”
-도도도도돗!
-와락!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고양이 소녀가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미루?”
“네. 맞아요. 헤헤. 저 기억해 주셨네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지. 그동안 잘 지냈니?”
내 물음에 미루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모아 꼼지락거렸다.
“저는 아저씨가 저를 잊어버린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다시 오겠다는 약속도 안 지킬 줄 알았거든요.”
“아, 아니, 잊어버린 게 아니라. 아저씨가 조금 바빠서 늦게 온 것뿐이야.”
“정말이에요?”
“물론이지.”
“헤헷. 그럼 이번 한 번만 믿어드릴게요.”
슬픈 표정으로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더니, 마지막에는 갸르릉거리는 애교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어휴. 나중에 크면 어떻게 하려고 벌써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지.
미루는 내 오른쪽 어깨 위로 얼굴을 쑥 내밀더니, 뒤편에 서 있는 리아네를 향해 인사했다.
“마족 언니도 오랜만이에요.”
“네. 오랜만이네요.”
미루는 품속을 뒤지더니 저번에 받았던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여기요. 저번에 치료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엄마가 귀한 물건이니까 깨끗이 씻어서 돌려드리라고 하셨어요.”
리아네는 깨끗하게 세탁된 손수건을 보고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손수건은 미루에게 선물로 준거니까 돌려주지 않아도 돼요.”
“정말요? 이거 귀한 거라고 하던데.”
“저는 또 있으니까 괜찮아요. 저는 미루가 써줬으면 좋겠어요.”
“꺄아. 정말 고마워요. 마족 언니!”
“어머!”
미루는 내 어깨를 살포시 뛰어넘어 리아네의 품 안으로 쏙 파고들었다.
리아네는 미루의 과감한 스킨십에 처음에는 당황한 듯 허둥거렸다.
하지만 이내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아주 포근한 미소였다.
우리가 미루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 저번에 보았던 검은색 고양이 수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또 왔군.”
“저번에 도와주셨던 분 맞으시죠?”
“도와준 건 모르겠고. 멍청이 두 놈을 대신 혼내줬던 건 기억나는군.”
“와! 레빌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는 리아네에게 안겨 있는 미루를 보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세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내게 물었다.
“또 너구리 영감을 찾아갈 생각인가?”
“네. 도움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그분이 이 주변을 잘 아시는 것 같아서요.”
“그럼 나도 같이 가지.”
“……?”
“걱정하지 마. 딱히 방해하거나 해코지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레빌은 먼저 길을 나섰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한발 늦게 그의 뒤를 쫓았고, 리아네도 미루를 안은 채 뒤를 따랐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변한 태도에 궁금함을 느끼고 있을 때, 레빌이 먼저 입을 열어 대화를 시도했다.
“저번에 다친 미루를 살펴줬다고 하더군. 그 사탕인가? 하는 것도 주고.”
“별거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도움을 받은 건 저희였으니까요. 또 미루가 워낙 귀여웠기도 했고.”
“훗. 그런가? 아무래도 너랑 뒤에 마족은 우리가 알던 마족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야.”
다른 마족들은 뭐 어쨌길래…….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금방 너구리 수인의 가게에 도착했다.
우리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가게 안쪽에서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헉! 너!”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이 사기꾼 녀석!”
너구리 수인은 수염이 부들거릴 정도로 화를 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나는 여유롭게 인사를 건넸다.
“사기꾼이 내 가게에는 뭐 때문에 온 거야.”
“사기꾼이라뇨? 저는 전혀 잘못한 기억이 없는데.”
“그 사탕을 내게 주기로 했으면서 몰래 도망갔잖아!”
“저는 분명히 줬습니다. 여기 귀여운 미루가 대신 먹었을 뿐이지요.”
“끄으응…….”
내가 논리적으로 대답하자 너구리 수인은 침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옆에 있는 레빌을 발견하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뭐하러 이놈들을 내 가게에 데려온 거야?”
“데려온 게 아닙니다. 따라왔을 뿐입니다. 영감님이 또 이상한 짓을 하나 감시하려고요.”
“내가 뭘?!”
“저번에 사탕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미루를 처음 본 자들과 함께 보내지 않았습니까? 위험한 일이 일어났으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과격한 반응에 너구리 영감은 찔끔하며 수그러든 자세를 보였다.
“그, 그게 아니라. 그렇게 나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이고, 또 미루도 여기 일을 돕고 있으니 대신 보낸 거지.”
“다 필요 없습니다. 한 번 더 미루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시키면, 영감님 가게고 뭐고 다 뒤집힐 줄 아십시오.”
“끄응. 알았으니. 그만 진정해.”
레빌이 으르렁거리며 엄포를 놓자, 너구리 영감은 눈치를 보며 그를 진정시켰다.
소리 한 번 질렀다가 된서리를 제대로 맞은 그는 원망이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노려봤다.
분위기가 정리되어갈 때쯤에 나는 준비해 온 물건을 슬쩍 너구리 영감에게 건넸다.
알록달록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는 사탕 봉지였다.
너구리 영감 눈에서는 원망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벌써 행복한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짐짓 관심 없는 척을 하며 슬쩍 물었다.
“흠흠. 이건 뭐야?”
“저번에 도움받은 것도 있고,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준비해 왔습니다.”
은근한 목소리와 함께 사탕 봉지를 들이밀었다. 그는 못 이기는 척 사탕을 받으려다 마지막에 손길을 거둬들였다.
“흥. 솔직히 말해. 또 부탁할 게 있어서 이러는 거지?”
아.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너구리 영감은 쉽게 선물 작전에 넘어오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몇 년을 장사한 줄 알아? 이런 장난질에는 안 넘어가.”
“하하. 부탁이 있어서 찾아온 건 맞지만, 이건 정말로 그냥 드리는 겁니다. 받으시죠.”
“크흠. 일단 이야기 먼저 들어보지.”
그래도 사탕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끝까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나는 준비해 온 종이를 꺼내 너구리 영감에게 건넸다.
“필요한 것들인데 혹시 구할 수 있을까요?”
“뭐 이렇게 많아? 붉은 초승달 버섯, 악귀 나무 열매, 유령초…….”
안드라스가 번역해 준 책에서 찾은 야쿰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었다.
보랏빛 물망초 같은 먹이 종류뿐만 아니라.
마수의 흥분을 가라앉히거나, 마약처럼 기분이 좋게 만들어 주는 등. 여러 가지 효능을 가진 식물들이었다.
너구리 영감은 진지하게 종이에 적힌 것들을 살펴봤다.
“이 지역에서 아예 찾을 수 없는 몇몇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구할 수 있겠군.”
희소식에 나와 리아네의 표정이 밝아졌다.
“전부 모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죠?”
“필요한 양에 따라 다르지.”
나는 계획한 수량을 너구리 영감에게 설명했다.
“그 정도면 2주는 걸리겠는데.”
“안 돼요. 2주는 너무 길어요. 3일! 3일 안에 다 구해야 해요.”
“3일? 말도 안 되는 소릴.”
“방법이 없을까요?”
너구리 영감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리아네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봐. 거기 마족 아가씨. 소문으로 듣기에는 저번에 왔을 때 힘자랑 좀 했다고 들었는데.”
“먼저 공격을 해와서 위협만 했을 뿐입니다. 위해는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위험을 조금 감수하자면 빠르게 이것들을 모을 방법이 없지는 않아.”
그는 가게 안쪽에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지도 하나를 우리 앞에 펼쳐놨다.
그리곤 지도에 동그랗게 표시된 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표시된 여기가 바로 마을이다. 그 옆에는 쪽빛거울 호수고.”
너구리 영감의 손가락이 지도의 오른쪽 아래로 쭉 내려갔다.
“여기가 마을 남동쪽에 있는 숲인데. 몇 개월 전부터 회색늑대 무리가 자리를 잡았어. 예전에는 약초를 자주 캐러 갔던 곳인데, 지금은 얼씬도 못 하고 있지.”
“혹시……?”
“맞아. 여기서는 원하는 것들을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해. 회색늑대들이 워낙 영악한 녀석들이기도 하고, 주변 지역이 워낙 나무로 빽빽해서 길 찾기도 어렵거든.”
위험하다는 말에 나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여기서 내 제안이다. 여기 있는 회색늑대 무리를 처리해 준다면, 부족한 것들을 최대한 구해주지. 어때?”
“으음…….”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리아네 씨?!”
고민하는 와중에 리아네가 먼저 나서서 제안을 수락했다. 그녀는 당황하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저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시현 님은 시현 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면 돼요. 이런 일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아아…… 리아네 누님!
나는 너무 믿음직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살짝 감격했다.
“좋아. 계약은 이루어졌고. 이제 길을 안내해 줄 사람만 구하면 되겠어.”
너구리 영감의 말에, 그동안 조용히 있던 미루가 슬쩍 앞으로 나섰다.
“레빌 아저씨. 아저씨가 도와주면 안 돼요?”
“응?”
“아저씨는 저기 혼자서도 곧잘 다녀오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아저씨∼∼!”
“알았다. 알았어.”
미루의 초롱초롱 눈빛 공격이 가해지자, 레빌은 결국 버텨내지 못했다.
“너희가 원한다면 길 안내는 내가 해주지. 자랑할 만한 실력은 아니지만, 짐이 되지는 않을 거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대신에 늑대의 부산물은 내가 챙기겠어. 그쪽은 따로 챙겨가는 게 있으니까 불만 없겠지?”
나와 리아네는 짧게 눈빛을 교환한 뒤, 레빌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바로 준비하지.”
“헤헤. 레빌 아저씨 최고!”
“크흠. 큼.”
미루는 곧바로 레빌에게 안겨들어 애교를 부렸다. 그는 괜히 헛기침하며 조심스럽게 미루를 안아 들었다.
치명적인 애교에 레빌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미루는 내 쪽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살짝 깜빡였다.
마치 ‘저 잘했죠?’라고 묻는 것처럼.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영악함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 * *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던 우리는 곧바로 숲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나와 리아네, 레빌 거기에 두 명이 더 추가됐는데.
처음 마을에 왔을 때 우리에게 시비를 걸었던.
돼지, 사슴 수인.
차례로 ‘그렉’과 ‘헤론’이 따라나섰다.
우리에게 폐를 끼쳤던 잘못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레빌이 억지로 데려왔다.
물론 ‘마족의 일 따위는 돕지 않겠다.’ 라고 말하며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레빌의 묵직한 꿀밤 한방에 불만은 금방 수그러들었다.
“이게 악귀 나무다. 저 열매가 필요하다고 했지?”
레빌이 가리키는 곳에 푸른색 열매를 가진 나무가 보였다.
기분 나쁘게 뻗어난 가지가 마치 유령의 팔처럼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근데 왜 이름이 악귀 나무인지 알 것 같네요.”
“어두운 밤에 이 나무를 마주치면, 유령을 만나는 기분이 뭔지 느낄 수 있지.”
이렇게 레빌의 도움을 받아 중간중간 필요한 것들을 채집하면서 숲 안쪽으로 향했다.
숲의 경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음산한 기운이 흘렀다.
분명 하늘에 해가 있는데도 주변이 어둡게 느껴질 정도로 나무가 빽빽했다.
“너무 간격을 떨어뜨리지 마. 방심하면 그대로 혼자 고립되니까.”
레빌의 경고에 두 명의 수인은 물론 나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생겨났다.
리아네만 평소의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조금씩 숲을 뒤지며 나아가던 중.
피부를 찌르는 듯한, 아주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요.”
“시현 님, 왜 그러세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뭐라고 설명을…… 아! 큰뿔이가 나를 바라보는 기분? 방금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으음. 적대적인 기운을 느끼셨다는 건가요?”
“그게 정말인가?”
내 말을 들은 레빌과 리아네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뾰족한 느낌은 더욱 강해졌기에,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킁. 레빌 아저씨도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자기가 뭘 안다고.”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거 아냐? 큭큭.”
비웃는 두 명에게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레빌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리아네도 곧바로 움직임을 보였다.
“온다!”
-그르르르르.
-크릉.
회색 털을 가진 늑대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는 우리를 포위하는 것처럼 반원을 그리며 자리를 잡았다.
늑대들의 흉흉한 기세에 그렉과 헤론이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군.”
“아, 아저씨?!”
“정신 차려. 절대 자리를 벗어나지 마! 마족 아가씨. 이 녀석들을 좀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리아네는 저번과 같은 방식으로 오른손을 변화시키며 말했다.
“시현 님. 제 곁에 딱 붙어 계세요.”
-우득. 우드드득.
순식간에 생겨난 위협적인 발톱과 붉은 비늘.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은 늑대들의 경계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크와아앙!
먼저 움직인 쪽은 회색 늑대 무리였다. 사슴 수인 헤론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이 번쩍였다.
“흐이익!”
두려움에 주저앉은 헤론 앞에 리아네가 나타나고. 그녀의 커다란 오른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콰지지지직!
-크헝!
오른손에 담긴 파괴적인 기운은 순식간에 늑대의 몸을 찢어버렸다.
늑대는 단말마의 비명을 남긴 채 땅바닥에 몸을 뉘었다.
늑대들의 시선이 리아네에게 쏠려 있는 사이, 레빌은 기민한 몸놀림으로 늑대 무리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파앗! 스윽!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하고 유연한 움직임은 괜히 고양이 수인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리아네와 레빌.
두 사람의 활약 덕분에 늑대 무리는 하나둘 바닥에 쓰러져갔다.
“역시 레빌 아저씨!”
“킁! 별거 아니잖아.”
빠르게 정리되는 늑대 무리를 보면서, 헤론과 그렉의 표정에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린 탓일까?
그들은 레빌의 경고를 잊어버리고, 리아네와 레빌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벗어나고야 말았다.
-찌르르르.
다시 한번 등 뒤쪽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늑대 한 마리가 헤론과 그렉의 등 뒤를 덮치기 직전이었다.
“위험해!”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둘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크와앙!
두 수인과 뒤엉키며 사정없이 땅을 구르긴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둘을 늑대의 공격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금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는 리아네가 마지막 늑대마저 처치한 뒤였다.
“시현 님! 괜찮으세요?”
“조금 굴렀을 뿐이에요.”
“갑자기 그렇게 혼자 움직이시면 어떡해요!”
“죄송해요. 너무 급해서 저도 모르게…….”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리아네에게 사죄했다.
옆으로 슬쩍 시선을 돌리니 헤론과 그렉은 아직 멍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콱! 콱!
“끄악!”
“아앗! 아파요. 레빌 아저씨!”
“절대 떨어지지 말라니까. 그거 하나 못 지켜!”
매서운 꿀밤과 불호령에 둘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가 봤을 때도 애처롭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레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둘을 몰아붙였다.
“빨리 일어나. 또 걸리적거리면 여기다 버려두고 갈 거다.”
“히익!”
“크킁, 컥!”
헤론과 그렉이 겁먹은 표정으로 재빨리 일어났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레빌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빛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두 사람도 조금만 도와줘. 혹시 다른 녀석들이 오기 전에 뒤처리를 끝내는 게 좋으니까.”
“알겠습니다.”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기 전에 우리는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나와 리아네의 짐 안에는 열매와 버섯, 갖가지 약초가 가득했다.
아직 모자라지만 남은 시간 안에 충분히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리아네 씨.”
“별말씀을요.”
“아뇨. 아까는 정말 대단했어요.”
늑대와 싸우던 상황을 떠올리며 칭찬하자, 리아네는 저번과 비슷하게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이름이 시현이라고 했었던가? 고생했다. 시현.”
레빌이 다가와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도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저보다 레빌 씨가 더 고생하셨죠.”
“아니야. 아까 네가 늑대들의 접근을 눈치채주지 않았더라면 굉장히 귀찮아졌을 거야. 나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때의 상황을 되짚어보면 지금도 굉장히 놀라웠다.
늑대의 기척을 읽어내고, 위협적인 상황에 이상할 정도로 침착하게 행동했다.
이것도 마수 사육사의 능력인 걸까?
지금으로써는 딱히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레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손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헤론과 그렉이 쭈뼛쭈뼛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게…….”
“……?”
“아까 도와주셔서 고마웠…… 습니다.”
“……고맙습니다.”
어색한 표정과 말투로 우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늘 있었던 일 때문인지 기가 팍 죽어 있었다.
“어…… 응.”
나도 덩달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은 레빌의 손짓에 따라 늑대의 부산물들을 가지고 후다닥 마을 안쪽으로 향했다.
레빌은 우리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마을에서 사고만 치는 놈들이라 정신 좀 차리라고 데려갔었는데, 너희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정말 고맙다.”
처음 우리에게 보여줬던 냉정한 태도와 완전 다른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헤론과 그렉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지만, 내심 그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든 레빌은 오늘 채취한 것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필요하다고 했던 것들 아직 다 모으지 못했지?”
“네. 아직.”
“걱정하지 마라. 원한다면 얼마든지 숲을 안내해 줄 테니까.”
그는 믿음직한 말과 함께 지금껏 본 적 없는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따라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