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1화
평온한 일상, 다가오는 위기(5)
레빌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숲을 헤맨 결과.
내가 원했던 열매와 버섯, 약초를 역시 모두 구할 수 있었다.
조금 모자란 양은 약속했던 대로 너구리 영감이 채워줬다.
덧붙여 꽤 많은 수의 회색늑대무리도 사냥할 수 있었다.
너구리 영감은 한동안 회색늑대 걱정은 없겠다며 크게 기뻐했고, 레빌 역시 생각했던 이상의 사냥 성과에 만족스러워했다.
한편 사슴 헤론과 돼지 그렉은 정신을 차렸는지 정말 열심히 우릴 도와줬다.
레빌이 시키는 잡일부터 채집한 것을 손질하는 일까지. 묵묵히 도움을 건네는 그들의 모습에 남아 있던 앙금이 살짝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수인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준비를 끝낸 뒤, 나는 계획한 것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야쿰 무리를 농장으로 끌어들이는 것!
결전의 날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나는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며 계획을 점검했다.
* * *
“안녕하세요. 시현 님.”
“어? 안드라스 씨?”
커다란 키에 온몸을 로브와 복면으로 가린 마족. 안드라스가 농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많이 바쁘신 거 아니셨어요?”
“급한 일은 대충 다 끝냈습니다.”
“저번에 무리한 부탁 들어주시느라 많이 힘드셨죠? 마지막에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마음이 안 좋았거든요.”
“그때는 조금 힘들긴 했었죠. 발레리안이 조금 도움을 준 덕분에 위쪽에 심하게 깨지지는 않았습니다.”
“아! 리안 씨가.”
“저랑 다르게 이런 쪽으로는 훨씬 유능한 친구라 가끔 이렇게 도움을 받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 것 같아서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보다 계획하셨던 일은 잘 진행되고 있으십니까?”
“일단 준비는 끝냈는데. 이게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저도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안드라스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리아네가 짐 마차에 연결된 두 마리의 말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녀도 안드라스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안드라스 님. 오셨습니까?”
“네. 근데 마차에 짐이 많군요.”
“저랑 리아네 씨가 3일 동안 고생해서 모았거든요. 일단 가시죠. 나머지는 가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세 사람이 마부석에 앉기에는 자리가 좁았기에.
나와 리아네가 마부석에 앉고, 가장 덩치가 큰 안드라스가 짐칸 쪽에 걸터앉았다.
세 사람과 짐을 잔뜩 실은 짐 마차는.
초원 옆 울타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울타리 너머 먼 곳에서 야쿰의 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점심의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저마다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부우우우우!
역시 이번에도 가장 먼저 나를 알아본 예쁜이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스스럼없이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친근함을 표현했다.
“그래. 그래. 쉬고 있었어?”
가볍게 예쁜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교감 능력을 사용했다.
뱃속의 새끼들이 보내는 신호가 이제는 선명하다 못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아기 야쿰들이 건강한 것 같아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잠시만 기다려봐. 안드라스 씨!”
“알겠습니다. 시현 님.”
안드라스는 짐칸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넘겨주었다. 주머니 안에는 숲에서 채취해 온 열매가 잔뜩 들어 있었다.
그중 몇 개를 손바닥 위에 올려 예쁜이에게 내밀었다.
열매 쪽으로 코를 몇 번 킁킁거리더니, 한꺼번에 열매를 집어 먹었다.
“맛있어?”
-부우우우!
입맛에 맞았는지 행복한 감정을 담아 울음소리를 냈다.
덕분에 내 주위로 다른 야쿰들이 조금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우우우.
-부우! 부우!
“그래. 알았어. 여기 많이 남아 있으니까. 천천히.”
나는 최대한 녀석들을 진정시키며 주머니 속의 열매를 조금씩 나눠줬다.
숲에서 고생한 보람이 느껴질 정도로 야쿰의 반응이 뜨거웠다.
물론 무리의 우두머리 큰뿔이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이곳의 상황만 살필 뿐이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최대한 천천히.
마부석에 타고 있던 리아네에게 슬쩍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내 신호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아주 천천히 말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와 안드라스도 그에 발맞춰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야쿰 무리 역시 우리의 뒤를 따랐고, 큰뿔이도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랐다.
나의 계획은 단순했다.
먹이로 야쿰을 천천히 유혹해 농장 건물 가까이 유인하고, 오늘 밤을 그곳에서 보내게 할 생각이었다.
해가 지고 난 뒤에는 야쿰 무리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만 잘 맞춰서 이동시키면 어쩔 수 없이 농장 근처에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한 번 휴식처를 정하면 잘 바꾸지 않는 습성이 있어서. 한 번만 잘 유도해내면 완전히 농장에 적응할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 농장 주변에는 마수의 기분을 좋게 하고, 흥분을 가라앉히는 약초들을 잔뜩 뿌려놨다.
축사에는 싱싱한 먹이와 깨끗한 물을 가득 채워놓았다.
조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마차에 준비한 버섯과 열매들이 점점 비어갈 때쯤, 멀게만 느껴졌던 농장 건물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머리 위에 있던 태양이 어느새 산 너머로 몸을 숨기려 했다.
조급해진 나는 여러 야쿰과 연속적으로 교감하며 그들을 농장 쪽으로 유도했다.
처음 해보는 연속적인 능력 사용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내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는지 안드라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시현 님? 괜찮으십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힘드네요.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괜찮습니다. 조금만 더 해볼게요.”
그래도 내 능력과 준비한 것들 때문인지, 야쿰 무리는 멈추지 않고 농장 건물 쪽으로 움직였다.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이제 어두워지면 오늘의 계획은 성공이야!
눈앞으로 다가온 성공에 마음을 놓으려던 그때.
무리의 뒤를 따르던 큰뿔이가 우뚝 멈춰 섰다.
-…….
녀석은 우두커니 서서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천천히 움직이는 야쿰 무리도 아니고, 먹이가 가득 준비된 축사도 아니었다.
그 너머 어딘가에 큰뿔이의 눈동자가 고정됐다.
무엇을 바라보는 것일까?
야쿰 무리가 축사의 먹이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큰뿔이의 입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부우우우우웃!!!
“안 돼…….”
녀석은 결국 이곳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나머지 녀석들은 아쉬운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에는 우두머리의 경고를 무시하지 못했다.
어렵게 어렵게 이끌고 온 야쿰 무리가 고개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시현 님. 야쿰 무리가…….”
“실패…… 인가요?”
리아네와 안드라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도대체 왜?
큰뿔이는 무엇을 봤던 거지?
며칠 동안의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허무함,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머릿속은 뒤죽박죽 흐트러졌다.
두 손으로 내 양쪽 뺨을 강하게 때렸다.
-짝!
강한 통증과 함께 복잡했던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덕분인지 지금 해야 할 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망설일 것 없이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아앗!! 시현 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울타리를 뛰어넘으려는 나를 두 사람이 동시에 붙잡았다.
“놔주세요. 제가 큰뿔이랑 직접 교감을 해봐야겠어요. 남은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울타리를 넘어가는 건 위험해요. 거기다 저 우두머리는 계속 우리를 경계했잖아요.”
“리아네 양의 말이 맞습니다. 시현 님.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기를 쓰고 말리는 두 사람에게 나는 부탁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에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주세요.”
두 사람 모두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보다 훨씬 야쿰을 경계하는 마족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과감한 결정이 안드라스 쪽에서 나왔다.
“좋습니다. 시현 님.”
“아! 감사합니다.”
“대신 이걸 사용해 주십시오.”
“예?”
그는 품속에서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로브를 하나 더 꺼냈다.
나는 얼떨결에 그의 로브를 걸쳐 입었다.
안드라스와 덩치 차이 때문에 로브는 흘러내릴 것처럼 헐렁거렸다.
“임시로 제가 가져 다니는 로브입니다. 원래 저희 가문의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인데. 임시로 방어 마법은 발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와 내가 입고 있는 로브에 스며들었다.
-샤아아아!
로브가 안드라스의 기운과 반응하면서 주변에 푸른색 막을 생성해냈다.
“마나 쉴드를 발동시켰습니다. 웬만한 충격은 막아줄 겁니다.”
“고마워요. 안드라스 씨.”
“그럼 저도 따라가겠어요.”
“그건 안돼요. 오히려 큰뿔이의 경계심만 자극할 거예요. 저만 다녀올게요.”
리아네와 안드라스는 표정에서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지만, 결국에 나를 붙잡던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울타리를 넘어 떠나가는 야쿰 무리를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 녀석들은 아직 멀리 가지 못했고, 나는 금방 무리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야쿰들은 울타리를 넘어온 나의 등장에 조금은 놀란 행동을 보였다.
마치 ‘네가 왜 여기 있어?’라고 묻는 것 같았다.
-부우우우.
나를 지켜보는 야쿰들 사이로 큰뿔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천천히 다가와 나를 내려다봤다.
가까이서 본 큰뿔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위압감 넘치는 녀석이었다.
두 눈에 나를 향한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꿀꺽…….”
나는 손을 뻗어 녀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온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은 계속 심해졌지만, 절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점점 큰뿔이에게 다가서는 내 행동을 다른 야쿰들이 조용히 지켜봤다.
천천히…… 한 걸음씩…….
그 몇 걸음이 몇 시간처럼 느껴질 정도로 집중한 끝에. 나는 큰뿔이에게 도달할 수 있었다.
[마수와 교감을 시도합니다.]
[대상은 당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덩치 큰 친구. 이유를 말해봐.
도대체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건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건지!
나는 최대한 집중해 큰뿔이의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그 순간.
지난번에 겪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큰뿔이의 기억과 감정이 내 머릿속으로 쏟아지듯 흘러들어왔다.
혼란스럽게 뒤섞인 과거의 장면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생생하고 처절한 감정들.
이건 도대체……?!
큰뿔이와의 교감이 끊기기 직전, 가장 큰 감정의 울렁임과 함께 끔찍한 장면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부우우우우!!!
커다란 울음소리와 함께 이어져 있던 교감은 끊어졌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괴로움으로 가득한 큰뿔이의 눈동자가 보였다.
아직 확신하지 못한 내가 다시 한번 교감을 시도하려 했지만, 녀석은 격렬히 저항했다.
그 반동으로 나는 트럭에 부딪힌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뒤로 튕겨 나갔다.
“시현 님!”
“시현 님!”
잠시 아득해지는 정신과 함께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브의 마나 쉴드 덕분에 큰 충격은 받지 않았고, 금방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이 로브 덕분에 살았네요.”
걱정이 가득 담긴 리아네의 물음에 나는 괜찮다며 몸을 일으켰다.
“안드라스 씨. 저 좀 일으켜 세워주실래요?”
“어디 다치신 겁니까?”
“아뇨. 그냥 힘이 좀 빠졌을 뿐이에요. 그것보다 빨리 돌아가야 해요.”
“예?”
“분명 사장님이었어요…… 그 모습은…….”
마지막에 내 머릿속에 새겨진 장면.
그것은 커다란 뿔을 가진 야쿰의 목숨을 잔인하게 끊어버리는 카네프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