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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6)화 (16/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6화

새로운 시작(1)

어려우리라 생각했던 것이 너무 쉽게 해결되거나, 계속 꿈꿔왔던 일이 갑자기 일어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허무함과 얼떨떨한 감정이 뒤섞인 느낌이었다.

농장에서 열심히 일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 목표만을 이루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야쿰들과 교감을 나누면서 느끼는 게 많았고, 일하면서 얻어지는 성취감도 있었다.

그래서 목표를 의식하지 않고 눈앞의 농장 일에만 집중했는데, 너무 황당하게 ‘야쿰의 젖 짜기’가 성공해버리고 말았다.

-무우. 무우우.

젖을 다 먹은 아꿍이가 입으로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아무래도 그릇에 먹는 일이 서툴러서인지 옆으로 흘린 양이 꽤 많아 보였다.

“잘했네. 이제 배부르지?”

-무우우…….

배고픔을 해결한 아꿍이는 졸린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다른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모여든 삼 남매는 옹기종기 붙어서 금방 낮잠에 빠져들었다.

천사처럼 잠든 삼 남매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허무함 따위는 금방 잊어버리고 핸드폰을 들어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 * *

빈 그릇을 가지고 돌아가는 길에 건물에서 나오던 리아네를 만났다.

손에는 세탁한 빨랫감이 담긴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시현 님. 그릇을 가지고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아. 그게…… 아기 야쿰 중에 막내가 젖을 못 먹어서. 제가 직접 어미 젖을 짜서 줬어요.”

“…….”

“…….”

그녀는 내가 말한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내 얼굴과 비어 있는 그릇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니까 뭘 하셨다고요?”

“삼 남매 중 막내가…….”

“아니, 그거 말고, 뒷부분이요.”

“……제가 직접 어미 젖을 짜서 줬어요.”

리아네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후다닥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나는 뻘쭘한 표정을 짓다가 땅에 떨어진 빨랫감을 정리했다.

떨어진 것들을 다 주웠을 때쯤, 리아네가 흥분한 표정의 카네프를 데리고 나왔다.

그는 다짜고짜 내 어깨를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시현! 리아네 말이 사실이야?”

“사장님. 흥분을 좀 가라앉히시는 게.”

“정말로 야쿰의 젖을 짰냐고? 정확히 못 들었으니까 다시 설명해 봐!”

나는 카네프의 요구대로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차례로 설명했다.

리아네는 두 번째 듣는 이야기인데도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고, 카네프는 정말로 보기 드물게 기쁜 감정을 마음껏 드러냈다.

그리고 잠시 후.

소식을 듣고 발레리안과 안드라스까지 허겁지겁 농장 앞으로 모여들었다.

카네프는 안드라스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연락도 안 했는데 또 왜 왔어? 지금 근무 시간인 거 아냐?”

“정말 섭섭하게 왜 이러십니까? 그렇게 따지면 리안도 근무 시간이지 않습니까?”

“리안은 너처럼 농땡이 안 부리니까.”

“제가 언제 농땡이를 부렸다고…….”

“잠깐만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발레리안은 카네프와 안드라스의 대화를 차단하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현 님. 정말. 정말로 야쿰의 젖을 직접 짜신 겁니까?”

“네. 그렇긴 한데요…….”

“아아아! 드디어…… 드디어!”

내 대답을 듣자마자 발레리안은 정말로 감격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안드라스 역시 기쁜 표정으로 발레리안의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했다.

마족들의 이런 반응에 나는 오히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별로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반응이 너무 크고 격정적이었다.

마족들의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고.

그들의 눈에는 어떤 열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열망이 담긴 시선은 고스란히 나에게로 향했다.

총대를 멘 사람은 발레리안이었다.

“시현 씨. 혹시 가능하시다면 그 모습을 한 번만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해볼게요. 근데 예쁜이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라 지금은 안 될 수도 있어요.”

마족들의 기대가 가득한 눈빛을 도저히 거절할 수는 없으니, 일단 그들을 데리고 다시 축사로 향했다.

나를 제외한 마족들은 아기 야쿰이 있는 곳으로 들어올 수 없어서 축사에서 조금 떨어져 지켜보기로 했다.

삼 남매가 낮잠을 자는 사이, 예쁜이 편안히 앉아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부우우우.

축사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르르 몰려온 마족들 때문인지 예쁜이는 약간 긴장한 기색을 내비쳤다.

“미안해. 예쁜아. 저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러 온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부우우.

부드러운 말투로 달래주자 예쁜이의 긴장감이 살짝 누그러졌다.

“예쁜아. 쉬고 있는데 방해해서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될까?”

-부우우우?

나는 예쁜이에게 미안한 감정을 담아 부탁했다.

그러자 녀석은 대수롭지 않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돌아섰다.

내가 젖을 짤 수 있게 자세를 잡아준 것이다.

“고마워. 예쁜아. 금방 끝낼게.”

짧게 고마움을 표하고 바로 젖을 짜기 시작했다.

마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고, 삼 남매가 나중에 먹을 양도 남겨야 하니까 많은 양을 짜내지 않았다.

접시에 반이 조금 안 될 정도만 담았다.

“끝났어. 귀찮게 해서 미안해. 아기들 자는 사이에 얼른 더 쉬어.”

-부우우우.

예쁜이는 오랜만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고마운 마음에 잠시 어리광을 받아준 뒤, 마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멀리서 이 과정을 쭉 지켜본 마족들은 아까보다 더욱 생생하게 감정을 표출했다.

아직 따뜻한 젖이 담긴 그릇을 내보였을 때.

발레리안은 경이로운 기적을 본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 있던 나는.

아주 간접적으로나마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정신없이 그릇 안을 구경하던 마족들에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자, 잠시만요. 안드라스 뭐 없어?”

“나? 어, 어엇. 잠시만…….”

발레리안이 시선을 보내자 안드라스는 당황해서 품속을 막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한 물건이 잘 안 나오는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금속판이나, 천 조각, 장비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아! 여기 있다.”

한참을 찾던 안드라스는 밝은 표정과 함께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한 손 크기의 유리병들이 담겨 있었다.

“빈 포션 병인데, 이 정도면 괜찮겠지?”

그릇을 받아든 마족들은 아주 신중하게 새하얀 젖을 빈 포션 병으로 옮겨 담았다.

얼마나 신중한지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숨 막힐 정도였다.

도대체 ‘야쿰의 젖’이 뭐길래?

중간에 이런 궁금증이 생길 정도로 마족들의 모습은 대단히 진지했다.

그렇게 신중한 작업 끝에, 6개의 빈 포션 병에는 새하얀 야쿰의 젖이 담겼다.

안드라스는 포션 병을 다시 주머니에 담아 소중히 품 안에 집어넣고는 내 쪽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시현 님.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이 많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는 나머지 마족에게도 짧게 인사하고 농장 한쪽의 공터로 향했다.

-우우우웅!

-번쩍!

그리고 차원 도약 마법을 사용해 금방 농장을 떠나갔다.

“시현 씨! 괜찮으시면 오늘은 저랑 같이 일찍 퇴근하시죠?”

“네?”

“처음 여기 오셨을 때 했던 이야기 기억하시죠? 성공적으로 목적을 달성하셨으니 이번에는 제가 약속을 지켜야죠.”

“아…….”

발레리안은 내 대답은 듣지 않고, 바로 카네프에게 허락을 구했다.

“카네프 님. 오늘 하루는 괜찮겠죠?”

“음. 시현이 저녁을 준비 못 하는 건 아쉽지만. 오늘 같은 날에 억지를 부릴 수는 없지. 마음대로 해.”

“하하. 감사합니다. 시현 씨. 그럼 바로 갈까요?”

“조금만 기다려주실래요? 예쁜이가 저녁에 먹일 먹이만 준비해 주고 갈게요.”

나는 급히 예쁜이의 저녁을 챙기기 위해 움직였다.

자기가 저녁을 만들겠다는 리아네와 어떻게든 저지하려는 카네프의 분쟁이 있긴 했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발레리안과 조기 퇴근을 했다.

* * *

“…….”

손에 쥐고 있던 통장을 들어 계좌 잔액을 확인했다.

벌써 5번 넘게 확인했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계좌에 찍힌 2억이라는 금액.

그리고 아버지 농장이 망하면서 생긴 빚과 어머니 치료비로 생긴 빚이 말끔히 청산됐다.

수년간 나와 우리 가족을 숨 막히게 했던 것들이, 고작 통장의 숫자 몇 개 바뀌면서 해결되다니…….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후련함, 그리고 뒤늦게 밀려오는 허무함.

은행 정문 앞에 멍하니 서 있던 내 앞으로 익숙한 외제 차 한 대가 다가왔다.

“시현 씨. 은행 업무는 다 끝나신 거죠? 타세요.”

나는 일단 발레리안의 차에 올라탔다.

그는 웃으면서 아직도 약간 멍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입금은 확인하셨나요?”

“예. 리안 씨. 뭐라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정말 감사합니다.”

“저에게 감사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부 시현 씨가 해낸 일의 정당한 대가일 뿐이죠.”

“글쎄요. 별로 대단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 안 하거든요.”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시현 씨가 한 일을 비교하면 대가가 적은 겁니다. 이쪽 세계의 규칙만 아니었으면 더 드렸을 텐데. 제가 죄송할 정도입니다.”

진지하게 아쉬운 표정을 짓던 발레리안이 다시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이야기보다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카네프 님에게는 조금 죄송하지만, 우리는 맛있는 음식과 함께 축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리안 씨. 오늘은 빨리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요. 무엇보다 어머니에게 빨리 말씀드리고 싶거든요.”

나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발레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저번에 모셔다드렸던 주소로 가면 되겠죠?”

“굳이 태워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저녁 초대는 거절하셨으니, 이 정도는 제 마음대로 해야겠습니다. 하하하!”

발레리안은 시원한 웃음과 함께 차를 우리 집 쪽으로 운전해 나갔다.

* * *

-철컥! 끼이이익!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무섭게 안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벌써 퇴근했어?”

“응. 오늘은 일이 있어서 좀 일찍 퇴근했어.”

“손에 든 건?”

“같이 일하시는 분이 엄마 전해주라고 선물로 줬어. 영양제랑 종합 비타민 이것저것.”

발레리안이 억지로 건넨 선물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통장을 꺼냈다.

“엄마. 이거.”

“이건 뭐니? 갑자기 웬 통장. 보너스라도 들어왔어?”

“봐봐.”

통장을 열어본 어머니의 표정에 큰 놀라움이 번져나갔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렇게 큰돈을 어디서?”

“일하는 곳에서 받았어.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마계농장의 일은 설명할 수 없으니. 거짓말을 섞어 만든 이야기를 풀어놨다.

믿기 힘든 이야기에 어머니는 몇 번이고 받아도 괜찮은 돈이냐고 물었다.

10번 가까이 괜찮다고, 절대 위험한 돈이 아니라고 설명한 뒤에야 어머니는 겨우겨우 의심을 거둬들였다.

“그럼…….”

“응. 맞아. 아빠 농장 빚, 엄마 치료비까지 전부 다 갚았어. 방금 은행에 다녀오는 길이야.”

“그렇구나. 빚을 전부…….”

어머니는 아까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엄마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아냐…… 너무 기쁜데…… 흐윽!”

울음을 참지 못한 어머니는 방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혼자 있게 해달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농장이 망해 화병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암에 걸려 힘겨운 치료를 이어나갈 때도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던 어머니였는데.

처음에는 어머니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혼자 거실에 앉아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어머니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빚 때문에 우리 가족은 힘든 삶을 살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억지로 버텨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그 많던 빚이 사라지자. 어머니 마음속에 쌓여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진 것 같았다.

나도 어렵게 버텼지만.

가장 부담을 느끼고, 힘들게 버텼던 사람은 역시 어머니였을 테니까.

시간이 흐르고.

방에서 새어 나오던 흐느끼는 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어머니의 모습을 확인했다.

어머니는 이불도 펴지 않은 채 쓰러지듯 잠들어 계셨다.

그리고 한 손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찍었던 사진이 들려 있었다.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사진 속 아버지의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한참을 사진 속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빠. 이제 은행 빚 다 갚았어. 다행히 마을 아저씨들한테 빌린 돈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아.”

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흐리게 보였다.

“이제 다시 시작할 거야. 늦었지만 집도 좋은 곳으로 옮기고. 엄마 호강도 시켜주고. 아빠한테 못 해준 만큼 두 배로 해줄 거야…… 혹시 아빠 거기서 질투하는 건 아니지? 우리만 행복하다고 원망 안 할 거지?”

물기 어린 내 질문에도 사진 속의 아버지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사진을 조심스럽게 어머니 머리맡에 내려놨다.

이불을 꺼내 어머니를 덮어드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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