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8화
새로운 시작(3)
“안녕하세요. 리안 씨!”
“좋은 아침입니다. 시현 씨.”
발레리안은 언제나처럼 사무실에 앉아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어제 많은 도움을 받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잘생긴 얼굴이 더 빛나 보였다.
“어제 집은 잘 구하셨나요?”
“네. 덕분에 좋은 집을 싸게 계약했습니다. 어머니도 많이 좋아하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전혀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충분히 해드릴 수 있는 선에서 도와드린 거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전해야 옳은 일이겠지만, 오히려 발레리안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아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현 씨. 오늘은 가져오신 짐이 좀 많은 것 같은데…….”
“아! 이번에 도움도 많이 받았고 보너스도 엄청 두둑하게 받아서, 농장 식구들에게 선물을 몇 개 준비했거든요. 혹시 문제가 될까요?”
“흐음…….”
발레리안은 예상외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혹시 문제가 되는 걸까 싶어서 살짝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혹시 못 가져가는 건가?
어제 선물 준비한다고 백화점을 몇 바퀴나 돌았는데…….
다행히 발레리안은 금방 심각한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정도는 괜찮을지도? 시현 씨가 직접 준비한 선물이라는데 돌려보낼 수야 없죠. 책임은 제가 질 테니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거 받으세요.”
“……저요?”
가져온 선물 중 하나를 발레리안에게 건넸다. 그는 선물을 건넬 줄 전혀 예상 못 했는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는데. 최대한 어울릴 것 같은 선물로 준비해 봤습니다.”
“조금 얼떨떨하네요. 지금 열어봐도 괜찮죠?”
“네.”
그는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안에서는 어제 백화점에서 산 남자 향수가 들어 있었다.
“이건 뭐죠?”
“향수예요. 저는 잘 안 쓰지만, 왠지 리안 씨는 잘 쓰실 것 같아서 사 왔는데. 혹시 향수는 싫어하시나요?”
“싫어한다기보다는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이쪽 세계에서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걸 몇 번 본 적은 있습니다.”
속으로 예상외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왠지 발레리안이라면 연예인처럼 화장품이나 향수를 많이 쓸 것 같았는데.
발레리안은 신기한 물건을 보는 아이처럼 향수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손에 향수를 조금 뿌리니 사방에 상큼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확실히 점원이 추천해 준 것처럼.
아저씨 같은 강한 향기가 아니라, 은은하면서 싱그러운 과일 향이 발레리안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정말 향기롭네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잘 쓸게요. 시현 씨.”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리고 참고로…….”
“……?”
나는 발레리안 쪽으로 다가가 살짝 속삭였다.
“리안 씨 선물이 제일 비싼 겁니다.”
물론 다른 농장 식구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가장 큰 도움은 발레리안에게 받았기에 선물에도 신경이 더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살짝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선물은 그 가치보다는 마음이 중요하지만, 확실히 그 이야기는 기분이 더 좋긴 하네요.”
“다른 분들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하하. 물론이죠.”
나와 발레리안은 웃으며 비밀을 약속했다.
* * *
마계로 향하는 문을 지나 농장으로 향하는 길.
하루 쉬었을 뿐인데도 이 상쾌하고 신선한 공기가 그리웠다. 특히 어제는 종일 시내를 돌아다녀서 그런지, 이 깨끗한 공기가 더 반갑게 느껴졌다.
짐들은 잠시 건물 입구에 두고 야쿰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울타리 안에는 아직 잠을 자거나, 벌써 일어나 풀을 뜯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울타리 너머 야쿰들을 잠시 구경하다가, 축사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에는 예쁜이와 삼 남매가 옹기종기 모여 잠을 자고 있었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예쁜이가 내 인기척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예쁜이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나를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부우우…….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잠을 깨운 게 미안해서 바로 준비해 온 선물을 꺼냈다. 바로 커다란 애완동물용 브러쉬였다.
“짜잔! 자. 손님 여기 앉아보세요.”
나는 예쁜이를 자리에 앉히고 천천히 빗질을 해주기 시작했다.
큰 애완동물을 위해 만들어진 용품이긴 해도, 야쿰의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작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털이 뭉쳐 있는 부분이나, 엉켜 있는 부분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쁜이도 마음에 드는지 편안히 눈을 감고 빗질을 즐겼다.
예쁜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좋은데.
생각보다 내가 엄청 힘드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려고 할 때쯤, 겨우 빗질을 끝낼 수 있었다.
그래도 예쁜이가 굉장히 만족스러워해서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잠시 자리에 주저앉아 몸에 열을 식히고 있는데.
-스윽.
생각보다 일찍 두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무우우.
“얌꿍이. 일어났어?”
둘째. 얌꿍이가 어느덧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예쁜이에게 빗질해 주는 모습을 계속 지켜봤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와 브러쉬를 바라봤다.
“으응. 얌꿍이도 해줄까?”
-무우우!
체력이 덜 회복되긴 했지만, 기대감이 가득한 얌꿍이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자. 그럼 손님도 이쪽으로 오실까요?”
이번에는 앉은 자세로 얌꿍이에게 빗질을 해주기 시작했다.
예쁜이와는 다르게 털이 더 부드럽고, 뻑뻑하지 않아 빗질이 훨씬 쉬웠다.
정성스러운 빗질이 끝나자. 얌꿍이는 훨씬 깔끔해진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조금 더 동글동글해진 느낌에 털에 윤기도 반짝거렸다.
나는 뭔가를 갑자기 떠올리고, 선물을 포장할 때 남았던 붉은 끈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잘 정리된 얌꿍이의 머리 쪽 털을 끈으로 묶어 붉은 리본을 만들어주었다.
정말 내가 만들어주고도 너무 귀여워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유! 얌꿍아!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엽니?”
-무우. 무우우!
내가 꽉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자 놀란 얌꿍이가 품속에서 잠시 버둥거렸다.
얌꿍이는 내가 만족할 만큼 사진을 찍고서야 내게서 풀려났다.
귀여운 얌꿍이의 사진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조금 소란스러웠던 탓일까?
-무우우우!
-무우! 무우!
금방 예약에도 없던 세 번째, 네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으…… 으응. 너희들도 해줄게.”
나는 어쩔 수 없이 작은뿔이와 아꿍이에게 모두 빗질을 해줘야 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손님의 빗질이 끝나고 나서야.
온몸에 털을 가득 붙이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축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예쁜이와 아기 야쿰들이 기뻐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잦은 빗질은 조금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아침 식사가 끝나고.
리아네가 따뜻한 차를 내왔을 때, 나는 준비한 선물을 꺼내놓았다.
“리아네 씨. 사장님 이거 받으세요.”
“……?”
“시현 님. 이게 뭐예요?”
“농장 일을 시작하고 제게 좋은 일이 많이 생겼거든요. 그래서 도움받은 농장 식구들에게 약소하지만, 선물을 준비해 봤어요.”
선물이라는 이야기에 카네프는 심드렁한 표정을 하면서도 슬쩍슬쩍 선물에 시선을 보냈고.
리아네는 온몸을 들썩거리며 눈을 반짝거렸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선물이라니.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입으로는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얼굴은 마치 크리스마스날 어린이처럼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아마 저번에 보았던 꼬리가 있었다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지 않았을까?
“열어보세요. 어떤 선물인지 설명해 드릴 테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리아네는 조심스럽게 선물들을 확인했다.
그녀에게 준비한 선물들은 두 종류였는데.
한쪽은 세면 용품, 나머지는 부엌일에 필요한 주방 용품이었다.
“저번에 제가 쓰는 거 보고 신기해하셨던 게 생각나서 준비해 봤어요. 이건 머리 감을 때 쓰는 샴푸랑 린스, 이건 바디워시랑 샤워 타월 그리고…….”
평소에 리아네는 내가 가져온 세면 용품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번 기회에 생각나는 대로 전부 선물로 가져왔다.
그녀는 새어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이걸 전부 주시게요? 이렇게 귀한 물건을…….”
“여기서는 귀할지 몰라도. 저쪽 세계에서는 흔한 물건이에요.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 안 하셔도 돼요. 다 사용하시면 또 드릴 테니까 마음껏 쓰세요.”
“시현 님…….”
“큼큼. 나머지 주방 용품도 설명해 드릴게요.”
리아네는 정말 감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약간 쑥스럽기도 해서 재빨리 주방 용품 설명을 하는 척 주제를 돌렸다.
그녀에게 선물에 관해 설명을 끝내고, 이번에는 카네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장님. 선물을 설명해…… 드리려고 했는데.”
“으응? 뭐?”
이마에는 분홍색 캐릭터가 그려진 안대, 목에는 분홍색 목베개, 양발에는 역시 분홍색 수면 실내화까지.
핑크핑크해진 카네프가 같이 선물한 금박에 싸인 초콜릿 과자를 까먹고 있었다.
“…….”
“왜? 이렇게 쓰는 거 아냐?”
“아뇨. 잘 사용하고 계시네요.”
뭐랄까.
선물을 100% 활용하는 모습이 뿌듯하면서, 고마움은 1도 보이지 않는 무신경함이 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이 평소의 카네프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에 금방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 세면 용품에 정신이 팔려 있는 리아네에게 초콜릿 과자를 건넸다.
“리아네 씨도 이거 드셔보세요. 초콜릿 과자는 같이 먹으려고 사 왔어요.”
“아! 네. 잘 먹을게요.”
세 사람이 이탈리아 정통 고급 초콜릿 맛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누군가 식당으로 빠르게 걸어들어왔다.
“여기 계셨군요. 급하게 전할…… 이건 다 뭡니까?”
“안드라스 씨 오셨네요?”
언제나처럼 후드, 복면 차림의 안드라스.
그는 여기저기 어지럽게 놓여 있는 선물들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드라스 님. 이것 보세요. 이거 전부 시현 님이 저에게 주신 것들이에요.”
“흐흐. 시현이 우리에게 감사하다고 사준 선물들이다. 부럽지?”
“그런가요?”
안드라스는 뜯어져 있는 선물 상자들을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의 커다란 어깨가 안쓰럽게 처지려고 할 때, 나는 웃으며 따로 준비한 선물 상자를 꺼냈다.
“여기. 안드라스 씨 것도 준비했어요.”
“헉! 제 것도 준비하셨습니까?”
그는 펄쩍 뛰며 놀라움을 표했다.
“당연하죠. 안드라스 씨도 저를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시현 님…….”
그는 크게 감동을 하였는지,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쯧쯧. 맨날 농땡이나 부리는 녀석한테 선물이라니.”
안드라스는 중간에 감동을 파괴하려는 카네프를 잠시 째려보다가, 다시 부드러운 눈빛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지금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는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어내고 선물을 확인했다.
“이건?”
“핸드크림이라고 손이 상하지 않게 보호하는 물건이에요. 일하실 때 손을 많이 사용하신다고 들어서 준비해 봤어요.”
“아. 그렇군요.”
“손이 크신 것 같아서, 용량이 많은 거로 2개 넣어놨으니 넉넉하게 쓰세요.”
안드라스는 내 설명에 따라 직접 손에 핸드크림을 발랐다.
은은한 향기와 촉촉한 느낌이 나쁘지 않은지 눈매가 둥글둥글해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카네프가 툭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너는 또 뭐하러 온 거냐? 아까 보니까 급하게 들어오던데.”
“아! 이런!!”
“뭐? 왜 그렇게 깜짝 놀라?”
“이러고 있을 때가…….”
중요한 뭔가를 잊고 있었는지 엄청나게 허둥대는 안드라스.
그리고 곧이어.
-우우우웅!!
묵직한 진동음이 건물 밖에서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안드라스에게로 향했다.
“미리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선물 받은 게 너무 기뻐서 그만…….”
“건물 안에 있는 자들은 지금 당장 밖으로 나오시오!”
위압적인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