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9화
새로운 시작(4)
카네프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안드라스와 리아네는 긴장한 기색을 내비쳤고, 나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역시 카네프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건물 밖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나머지 사람들은 그 뒤를 따랐다.
건물 밖에는 무장한 기사와 병사, 그리고 누가 봐도 관직에 있을 것 같은 차림의 중년 마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온 중년 마족은 다시 위압적인 어조로 명령했다.
“여기 농장에 있는 자들은 모두 나와 예를 표하시오.”
그 말에 맞춰 옆에 있던 병사가 깃대를 크게 휘둘렀다. 끝에 매달린 커다란 휘장이 펄럭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리아네와 안드라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눈치껏 자세를 따라 했다.
하지만 카네프는 빳빳이 고개를 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그의 행동을 본 기사와 병사들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당장에라도 칼과 창을 겨눌 것처럼 투지를 불태웠다.
물론 그런다고 물러설 사장님이 아니었다.
머리에는 캐릭터 안대, 목에는 핑크 목베개를 두르고 저렇게 당당할 사람이 또 있을까?
중년 마족은 잠시 병사와 기사를 물러서게 한 뒤, 카네프에게 말을 걸었다.
“……카네프 공. 꼭 이렇게 해야겠소?”
“뭐래? 내 소문은 익히 들었을 거 아냐? 할 일이나 빨리 끝내고 꺼져.”
거친 답변에 뒤쪽의 기세가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하아아.”
중년 마족은 포기했는지 짧은 한숨과 함께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엄숙한 자세로 그것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영원히 녹지 않는 왕좌의 주인이자, 지엄한 율법을 수호하며 아라크단을 지배하는 마왕님께서 보내는 전언이오.”
카네프를 제외한 두 사람의 고개가 더욱 깊숙이 숙여졌다.
마왕? 갑자기?
내심 굉장히 당황스러웠지만, 나랑은 별 상관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마음을 놓고 있는데…….
“이계에서 이곳으로 찾아온 인간, ‘임시현’은 앞으로 나서서 그분의 말씀을 받드시오!”
……나?
이번에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주변을 살펴보니 리아네와 안드라스가 눈빛으로 무언의 압박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쭈뼛쭈뼛 앞으로 나섰다.
중년 마족 앞에서 다시 무릎을 꿇으려 고개를 숙이는데.
-턱!
누군가 나의 목덜미를 강하게 잡아챘다. 그 덕에 나는 강제로 얼굴을 들어야 했다.
“사장님?”
“카네프 공! 이게 또 무슨 짓이오?”
“이 녀석은 마족도 아닌데 굳이 예의 차릴 필요 없잖아. 그냥 나머지 부분이나 읽고 돌아가지?”
“그분과의 관계를 생각해. 한 번은 넘어갔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더는 좌시할 수 없소.”
“니들이 뭘 어쩔 건데?”
순식간에 주변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기사와 병사들은 칼과 창을 겨누며 전의를 내비쳤고, 이에 질세라 카네프도 기세를 끌어올렸다.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농장을 가득 채워나갔다.
그런데 이 농장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부우우우우우!!!
전투의 전조를 느낀 큰뿔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접근해 왔다. 당장에라도 울타리를 부술 기세였다.
“허헉! 저건?!”
“야쿰이야! 야쿰이라고!!”
“모, 모두 전투 준비! 마수의 공격을 대비하라!”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기사들은 크게 동요하는 병사들에게 소리치며, 허겁지겁 대열을 정비했다.
“잠깐! 잠깐만요!”
“……?”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울타리 쪽으로 빠르게 달려나갔다.
다행히 큰뿔이는 기세를 낮추고 울타리 앞에 멈춰 섰다.
“왜 이렇게 흥분했어. 응?”
-부우우우!! 부우우!!
“아냐. 아냐. 너희를 위협하려고 한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서로 신경전을 벌인 거야. 진짜로!”
큰뿔이의 털을 살살 쓰다듬어주며.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나의 노력 덕분에 적대적인 기운은 수그러들었지만.
녀석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거칠게 콧바람을 내뱉었다.
“알았어. 그러니까 너도 흥분을 좀 가라앉혀. 다른 친구들도 불안해하잖아.”
-부우우.
큰뿔이는 마족 무리를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고마워. 큰뿔아! 나중에 맛있는 거 챙겨줄게!”
-부우우우!
“휴우우. 식겁했네.”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마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농장의 식구들은 그나마 덜했지만, 이곳을 방문한 마족들은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기사들은 웅성거리는 병사들을 통제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나를 바라볼 정도였다.
그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카네프에게 다가갔다.
“아오. 사장님! 적당히 좀 하세요!”
“내, 내가 뭘?”
“그냥 대충 넘어가면 될 일을. 바빠 보이는 분들한테 왜 심술을 부려요?”
“바쁘기는 무슨. 매번 쓸데없는 말만 주절거리는 놈들인데.”
“아. 공무원이 원래 다 그렇죠. 방해할 생각 말고 들어가서 과자나 드시고 계세요.”
마치 애 다루듯 카네프를 대하는 모습에 마족들의 표정이 해괴하게 변해갔다.
“쳇.”
카네프는 짧게 혀를 차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더는 참견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의 반응을 보고 주변에서 헛바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입을 벌리고 있는 중년 마족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크흠. 큼.”
“죄송합니다. 사장님 성격이 좀 삐뚤어져서.”
“괜찮소. 마족들 사이에서는 워낙 유명한지라.”
다시 정신을 차린 그는 점잖게 대답했다. 그리고 나를 향한 태도와 눈빛이 대단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뒤에 계신 분들. 죄송한데 무기를 집어넣고 기세를 낮춰주실래요? 워낙 예민한 친구들이라서 많이 불편한가 봐요.”
“네? 넵. 알겠습니다. 모두 무기를 집어넣어라!”
기사와 병사들은 순식간에 무기를 집어넣고 기세를 거둬들였다.
내 말에 허둥지둥 움직이는 모습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주변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
내가 다시 무릎을 꿇고 예의를 표하자, 중년 마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글을 읽기 시작했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독특한 단어들로 인해 이해가 쉽지 않았다. 통역 반지의 고장이 의심될 정도였다.
그래도 짧게 요약하자면.
내가 농장에서 해낸 일에 마왕이 굉장히 흡족해하고 있고, 또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이계의 인간이지만. 그대가 보여준 노력과 성과는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마왕의 이름으로 임시현, 그대에게 합당한 보상이 내려질 것이다.”
중년 마족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기사 한 명이 화려한 상자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마왕님께서 그대에게 하사하는 것이오. 고개를 들어 직접 상자 안을 확인해 보시오.”
나는 그 말에 따라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작은 금속 패와 고급스러운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한 손 크기의 금속 패에서는 은은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나머지 의미 모를 장신구를 손으로 꺼내자, 뒤쪽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시현 님이?!”
“오오오! 축하드립니다. 시현 님!”
“예?”
장신구를 보자마자 리아네와 안드라스는 크게 기뻐하며 나를 축하했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축하한다.”
카네프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무심하게 축하를 해줬고.
“이계의 인간. 아니, 임시현 공. 축하드리겠소.”
중년 마족도 한층 정중해진 태도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뒤쪽에서 지켜보던 기사와 병사들도 간결하게 예를 표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들고 있던 장신구를 가리키며 물었다.
“죄송한데. 이게 뭐죠?”
* * *
차원관리본부.
처음 균열이 생겨났을 때, 새로운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정부 조직이다.
과거에는 균열의 발생, 천족과 마족의 등장이 국가적인 위협으로 분류됐던 만큼, 차원관리본부의 규모는 엄청나게 비대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사회가 안정화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집중되어 있던 업무 권한이 개편, 이전되었고. 지금은 축소된 인원으로 조직이 유지되고 있다.
겉으로 보면 껍데기만 남은 조직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공식적인 업무만 개편되었을 뿐,
쉽게 공개할 수 없는 비공식적인 사안들은 전부 이곳에서 해결되고 있었다.
“본부장님! 이기석 본부장님!”
차원관리본부를 책임지고 있는 이기석은 헐레벌떡 뛰어들어온 부하 직원을 무심히 바라봤다.
평범한 곳이었다면 부하 직원의 행동이 무례하다 욕을 먹겠지만. 이곳에서는 일의 특성상 아주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왜?”
“그게 큰일 났습니다.”
“마족이 또 불법 아티팩트라도 팔아넘겼어?”
“아니. 그런 종류의 큰일이 아니라…… 직접 보시죠.”
이기석 본부장은 직원이 건넨 서류를 받아들고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뭐야? 발레리안이 보내온 거잖아.”
인페리스 차원계에서 넘어온 마족 발레리안.
그는 이기석 본부장이 만나본 마족 중에서 정말 몇 안 되는 말이 통하는 존재였다.
딱히 억지를 부리거나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복잡한 문제가 생겼을 때도 항상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간 발레리안이 보여준 좋은 인상 때문에 이기석은 부하 직원의 설레발에도 아무런 걱정 없이 서류를 읽어나갔다.
하지만 그의 믿음과는 달리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게 도대체…….”
-현계의 시간을 기준. 오늘부로 임시현 씨가 마왕님에게 ‘에스테르’의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에스테르는 과거 마신께서…….
-……지금은 명예직에 가까운 지위이지만, 마왕님께서는 앞으로 임시현 씨의 활약에 큰 기대를 하고 계십니다.
마계 쪽으로 잔뼈가 굵은 그에게도 서류는 아주 생소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임시현? 에스테르? 거기다 마왕?’
이기석 본부장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서류를 계속 읽어나갔다.
서류의 나머지는 임시현이라는 사람이 굉장히 중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해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길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무쪼록 귀 기관에서 임시현 씨와 관련해 절대적인 지원과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임시현이 누구길래?”
“혹시 필요하실까 봐. 그 사람과 관련된 최근 기록을 좀 뽑아왔습니다.”
이기석 본부장은 부하 직원에게 잘했다는 눈빛을 보내며 자료를 넘겨받았다.
그 자료에는 임시현의 간단한 신상과 마계로 넘어가는 것을 허가한 내용이 기록돼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부적응 각성자였고, 아주 최근에 각성. 특이한 케이스군. 응?’
기록을 살피던 그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한 달, 두 달, 석 달…… 겨우 석 달?!’
임시현이 마계로 넘어가기 시작한 기간은 두 달이 조금 넘은 정도. 짧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길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시간.
‘석 달 남짓한 활약으로 에스테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는 말인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에스테르’라는 지위가 얼마나 큰 위상을 가졌는지는 정확히는 몰라도.
-마왕님께서…… 큰 기대를…….
이 문구만으로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마족에게 마왕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봤을 때, 절대 평범한 자리일 리 없었다.
“지금 당장 임시현에 관한 자료 긁어모아.”
“얼마나?”
“전부! 부족하면 정보부에 내 이름으로 협조 요청해. 급한 사안이라고.”
“알겠습니다.”
직원이 후다닥 방을 나서고. 혼자 남겨진 이기석 본부장은 서류 한 부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곳에는 최근 임시현의 신분증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임시현 씨.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