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0화
이게 무슨(1)
예쁜이가 새끼를 낳은 뒤에도 농장에서 업무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예쁜이와 삼 남매만 챙겨주면 나머지는 야쿰은 알아서 풀을 뜯으며 생활했다.
그것 말고는 마구간 청소, 식사 준비, 가끔 야쿰이 좋아하는 열매와 풀을 찾는 일 정도였다.
이것밖에 안 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직접 해보면 생각보다 쉬운 일과는 아니다.
출근하고 마구간 청소 좀 하면 아침 준비.
삼 남매와 예쁜이 좀 챙기다 보면 점심 준비.
다른 농장 일 좀 하다 보면 곧바로 저녁 준비와 퇴근 시간.
생각보다 일정이 빡빡했다.
마왕의 전령이 방문한 이후에는 중요한 업무가 더 늘어났다.
-꿀꺽. 꿀꺽.
아아. 잘 먹는다. 잘 먹어.
앉아 있는 내 품 안에 쏙 들어와 얌전히 젖병을 물고 있는 얌꿍이.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졌다.
한 손으로는 젖병을 편하게 물도록 해주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등 쪽의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정말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마음이 따뜻해지고 힐링이 되는 기분에 취해…… 컥!
-무우우우!
등과 어깨 쪽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동시에 들려오는 힘찬 울음소리.
나의 평온한 힐링을 방해한 범인은 바로 내 왼쪽 어깨에 매달린 작은뿔이었다.
“작은뿔! 너는 벌써 먹었잖아. 동생이 밥 먹는 거 방해하면 안 되지.”
-무우우우.
이 욕심 많은 첫째는 조금 전에 젖병 하나를 꿀꺽 해치워놓고는 동생의 젖병도 탐내는 중이었다.
“너 배부른 거 다 알아. 괜히 동생들한테 심술부리지 말고 저리 가. 형 진짜로 화낸다?”
-무우우. 무우우!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타이르려 노력해 봤지만, 작은뿔이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따라 끈덕지게 달라붙는 작은뿔이의 방해 속에서도. 나는 철벽 수비를 해내며 얌꿍이의 평온한 식사시간을 지켜냈다.
하지만.
-무우우우!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에 아꿍이가 달라붙었다.
“컥! 아꿍이 너까지?!”
-무우우!
작은뿔이와는 달리 이 어리광쟁이는 우리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덤벼든 것 같았다.
두 마리의 아기 야쿰이 동시에 덤벼들자. 나의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아. 형 이러다 또 몸살 나!”
작은뿔과 아꿍이에게 치이고 있을 때, 구경하고 있던 예쁜이가 나섰다.
-부우우우.
예쁜이가 작은뿔이를 떼어내자 아꿍이도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리며 얌꿍이에게 남은 젖을 먹일 수 있었다.
마지막 아꿍이에게 물린 젖병을 끝으로.
겨우 전쟁 같았던 야쿰 삼 남매의 식사시간을 끝낼 수 있었다.
내가 기진맥진한 상태로 일어서자. 아기 야쿰들은 천사 같이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마치 자신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때 예쁜이가 다가와 부드럽게 얼굴을 비볐다.
아마 고생한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 같았다.
-부우우우.
“그래.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예쁜이밖에 없다.”
나는 예쁜이를 끌어안으며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삼 남매들도 뭔가 느끼는 게 있는지, 내 다리에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무우우.
-무우우우!
“그래. 알았어. 너희들한테 화난 거 아니야. 그리고 앞으로 식사시간에는 좀 얌전히 있고.”
달라붙는 삼 남매를 부드럽게 타이르며 쓰다듬어줬다. 그제야 녀석들은 애교를 멈추고 떨어져 나갔다.
아무리 힘들게 해도 삼 남매의 귀여운 애교를 보고 있으면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예쁜이와 삼 남매에게 인사를 하고 축사를 빠져나왔다.
이른 아침과 저녁에 젖을 짜고.
그 젖을 아기 야쿰에게 하루 세 번 직접 먹이는 일.
이것이 농장에 새롭게 생긴 일과였다.
처음에는 젖을 짜는 일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예쁜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나에게 젖 먹이는 일을 맡기면서 예쁜이는 육아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된 것처럼 보였다.
대신에 내가 직접 젖을 먹이면서. 삼 남매에게 매일매일 시달리고 있었다.
아기들을 먹이고 남은 젖은 안드라스가 특별 제작한 병에 담아 전용 냉장고에 저장한다.
이렇게 신선하게 보관된 ‘야쿰의 젖’은 날짜에 맞춰 마왕성으로 전달된다.
축사를 벗어나 이번에는 야쿰이 모여 있는 울타리 쪽으로 향했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한 야쿰을 향해 외쳤다.
“곱슬아! 곱슬아 이리 와봐.”
-부우우우!
내 부름에 야쿰 한 마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른 녀석들에 비해 털이 곱슬곱슬해 붙인 이름 ‘곱슬이’. 물론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미세한 차이였다.
“곱슬아. 요즘 잘 지내?”
-부우우우.
편안한 인사와 함께 교감 능력을 사용했다.
[대상은 당신에게 ‘친밀’한 감정을 가집니다.]
[대상은 보랏빛 물망초를 원합니다.]
“우리 곱슬이가 보랏빛 물망초가 먹고 싶었구나?”
-부우우우.
“미안. 지금은 남은 게 없어서. 나중에 형이 꼭 찾아다 줄 테니까. 조금만 참자.”
나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브러쉬를 꺼내 곱슬이의 털을 빗겨주기 시작했다.
예쁜이와 삼 남매를 통해 단련된 빗질 실력에, 곱슬이는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조만간에 야쿰이 좋아하는 열매와 풀을 구하러 수인 마을에 들러야겠다. 브러쉬도 큰 걸로 하나 장만해야겠어.
으으. 그러고 보니 새집 이사준비도 해야 하는데…….
빡빡한 일정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빗질에 만족한 곱슬이를 돌려보낸 뒤, 주머니에서 메모장을 하나 꺼내 들었다.
아까 곱슬이와 교감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꼼꼼히 메모했다.
야쿰 무리를 살피며 특별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짐을 챙겨 농장 건물로 돌아갔다.
“시현 님. 일 끝나셨나요?”
“네. 방금 다 끝냈습니다.”
“주세요.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리아네에게 빈 젖병과 짐을 맡기고 2층 방으로 올라갔다.
더러워진 작업복을 벗고 간단하게 씻었다.
살짝 몰려오는 피곤함을 이겨내고. 책상에 앉아 농장 일지와 그 옆에 메모장을 펼쳤다.
오늘 예쁜이에게서 짠 젖의 양과 삼 남매가 먹은 양을 꼼꼼히 기록했다.
또 곱슬이의 특이사항과 야쿰 무리를 관찰한 내용을 세심하게 체크했다.
새롭게 생긴 두 번째 일과, 농장 일지 작성이었다.
농장 대부분이 성장과 변화를 쉽게 파악하려 일지를 작성한다.
마계농장은 초반에 어수선했던 분위기로 인해 조금 늦게 시작한 감이 없지 않았다.
아직은 조금 어색한 일지 작성을 끝내고 짧게 기지개를 켰다.
혹시 쉴 틈이 있을까 싶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바쁘다, 바빠.
나는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 * *
오늘 준비한 점심 메뉴는 크림 파스타였다.
내가 챙겨온 기본 재료에 마계에서 구한 버섯과 고기를 추가했다.
예쁘게 접시에 올려진 파스타가 식탁 위에 올려지자, 식당에는 고소한 크림소스 향기가 가득해졌다.
“잘 먹겠습니다. 시현 님.”
“잘 먹을게요.”
“…….”
“네. 맛있게 드세요.”
이제는 같이 식사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안드라스 그리고 리아네가 인사를 건넸다.
카프네는 평소 같았으면 안드라스를 구박했을 텐데, 어딘가 어두운 표정으로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농장 식구들이 먹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나도 뒤늦게 파스타 면을 집어 들었다.
-후르르륵!
첫맛은 크림 특유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입안 가득 느껴지다가, 면의 쫄깃한 식감과 다른 재료들이 함께 어우러졌다.
특히 마계에서 구한 버섯의 독특한 향과 탱탱한 식감이 파스타와 정말 잘 어울렸다.
반면 고기는 생각보다 소스와 잘 배어들지 않았고, 질긴 식감 때문에 아주 아쉬웠다.
다음번에 마계에서 구한 고기는 조금 주의해서 사용해야겠네.
속으로 고쳐야 할 점을 생각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됐을 때쯤, 안드라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안드라스 씨, 오늘 ‘야쿰의 젖’을 가져가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지금 몇 병 정도 저장 중이시죠?”
“으음. 오늘도 아침에 2병 넣었으니 8병 정도 있겠네요.”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농장의 현황을 간략하게 보고서로 작성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마왕성에서 요청이 들어와서요.”
“가능합니다. 근데…….”
나는 슬쩍 카네프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눈치채자마자 발작하듯 외쳤다.
“밥 먹는 동안에는 일 이야기 꺼내지 마!”
그의 반응에 나머지 사람들은 각가지 감정을 드러냈는데.
안드라스는 난감, 리아네는 한심, 마지막으로 나는 반반씩 섞인 표정을 지었다.
“하아…… 사장님. 이제 포기하세요. 애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러실 거예요?”
“으으윽. 이건 인정할 수 없다고.”
“인정하고 말고를 떠나서 어차피 결정 난 사항이라면서요.”
카네프가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이유는 바로 마왕성에서 새롭게 내려온 지시 때문이었다.
농장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대신.
정해진 수만큼 ‘야쿰의 젖’을 생산해야 하고. 농장의 야쿰을 조금 더 철저히 관리할 것을 당부했다.
특별한 용기를 사용하면서 젖을 저장하는 것과 농장 일지를 작성하는 것 모두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카네프가 치를 떤 내용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야쿰 농장의 책임자로 카네프를 임명한다.’라는 것 때문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도 사장님이 책임자나 다름없으신데. 왜 싫다는 거예요?”
“부탁으로 잠시 맡는 거랑 정식으로 책임자가 되는 건 차원이 달라. 엄청 귀찮다고!”
“어차피 농장 일은 저랑 리아네 씨가 다 하는데. 뭐가 그렇게 귀찮으시다는 거예요?”
“그것도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책임을 진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니까? 이제 에스테르 지위를 얻은 이 녀석에게 맡기면 안 되나?”
카네프가 나를 가리키며 묻자. 안드라스는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현 님이 에스테르의 지위를 인정받은 일은 대단하지만. 아시다시피 명예직에 가깝지 않습니까? 또 마왕님 입장에서는 카네프 님이 계시는데 책임자를 다른 이에게 맡기기 어려웠을 겁니다.”
에스테르.
뛰어난 재능이나 기술,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인재에게 마왕의 권한으로 내리는 지위.
아주 오래전, 마신을 추종했던 4명의 마족을 지칭하던 명칭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엄청난 특권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월급처럼 지원금도 나오고, 에스테르를 상징하는 장신구만 차고 있어도 어디서 무시당할 일은 없다고 했다.
말 그대로 명예직.
물론 이계의 인간이 받았다는 점에서 굉장히 대단한 일이라고…….
“으으. 귀찮아 죽겠네.”
“그래도 좋은 점도 있잖아요? 이제 필요한 게 있으면 리안 씨에게 부탁 안 해도 되고. 모두에게 급여도 따로 나온다는데. 그렇죠?”
나는 나머지 사람에게 시선을 맞추며 동의를 구했다. 그러자 안드라스와 리아네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저…… 시현 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는 원래 소속이 따로 있어서 이미 급여를 받고 있습니다.”
“저도 마왕성에서 지원을 나온 거라…… 죄송해요.”
“……네?”
잠깐만…….
리아네와 안드라스가 여기 소속이 아니라고?
그럼 농장에 소속된 사람은 나랑 사장님 두 명?!
원래 소속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왠지 배신당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기분을 그대로 눈빛에 담아 두 사람에게 보냈다. 움찔한 안드라스와 리아네는 황급히 내 시선을 피했다.
둘뿐이라니.
저 대책 없는 사장님이랑 나, 둘뿐이라니!
가혹한 진실을 깨닫고 망연자실한 나에게 사장님이 악마 같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시현. 너도 나랑 단둘이 여기 책임지긴 싫지? 빨리 마왕성에 연락해. 책임자 교체 안 해주면 농장 일 때려치우겠다고. 얼른!”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에 리아네는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고, 안드라스는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얄미운 카네프의 얼굴에 한 방 날리고.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천사 같은 아기 야쿰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그래도 진짜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안드라스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억지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뭔데요?”
“마왕성에서 야쿰의 젖을 모두 가져가는 게 아니라, 일부를 농장 식구들에게 지급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일주일에 나는 두 병, 카네프와 리아네는 각각 한 병을 가져갈 권리를 준다고 했다.
“어? 이렇게 된 거, 지금 당장 마셔볼까? 나도 아직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는데.”
카네프가 오늘 처음으로 밝은 얼굴을 하고 관심을 드러냈다.
리아네도 기대 어린 표정으로 내 쪽을 슬쩍 바라봤다.
젖을 직접 짜내는 나 역시 마셔본 적이 없어서, 기대감과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할까요?”
“그럼 제가 가져올게요!”
리아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야쿰의 젖을 가지러 냉장고로 향했다.
“안드라스 씨는 안 드셔도 되겠어요? 제가 한 병 드릴까요?”
“오늘은 식사를 대접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부탁드리겠습니다.”
혼자 맛을 보지 못하는 안드라스에게 권유해 봤는데.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여기 가져왔어요.”
리아네는 각자의 자리에 야쿰의 젖이 담긴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차가운 유리병 안에는 우윳빛 액체가 들어 있었다.
“어디 한번 마셔볼까?”
카네프는 뚜껑을 열고 거침없이 내용물을 들이켰다. 리아네도 곧바로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입가에 가져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야쿰의 젖을 입안에 가득 머금었다.
달큰한 향기가 먼저 코를 통해 느껴지고, 뒤이어 입안 가득 풍부한 맛이 휘몰아치듯 느껴졌다.
고소함과 달콤한 맛의 조화는 그 어떤 음료보다 뛰어났고. 평범한 우유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목구멍을 넘어가며 식도를 부드럽게 감싸는 기분 좋은 감각.
그리고 완전히 삼켰을 때, 입안에 남은 은은한 느낌은 절로 아쉬움이 들게 했다.
“와?! 진짜 맛있네.”
“이런 맛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봐요.”
먼저 마신 카네프와 리아네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나도 따라서 놀라움을 표현하려는 순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야쿰의 신뢰’ 효과를 받습니다.]
[‘체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근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마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저항’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