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2화
이게 무슨(3)
“오늘은 일찍 퇴근하겠다고?”
“네. 고향에서 고마우신 분이 오늘 찾아오셔서요. 평소보다 일찍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고향에서 온다는 그분은 빚을 갚고 최근에 연락이 닿았던 사과 아저씨였다.
근처에 일이 있다며 겸사겸사 방문을 알려왔다.
“저녁은 미리 다 만들어놨어요. 리아네 씨. 데우기만 하면 되니까 괜히 손댈 생각하지 마세요.”
-움찔.
리아네는 찔끔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틈만 나면 요리에 손을 데려는 습성은 이미 나에게 파악된 지 오래였다.
이번에는 키득키득 웃고 있는 카네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도 오늘 전해드린 보고서 확인해 보시고 전부 서명해 놓으세요. 저번에 마왕성에 보낸 거, 사장님 서명이 없어서 전부 되돌아왔잖아요.”
내가 일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네가 알아서 다 잘하는데. 대충하면 안 되나?”
“저는 여기 글도 쓸 줄 몰라서, 리아네 씨랑 같이 어렵게 적은 보고서라고요. 대충 보지 마시고 제대로 확인하세요.”
“끄응…….”
“내일 왔는데 제대로 확인 안 돼 있으면. 당분간 군것질거리 금지할 겁니다. 아셨죠?”
“먹는 거로 치사하게!”
카네프가 불만을 표했지만, 나는 완고한 표정으로 무시했다. 조금 치사하게 보이더라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에휴.
잔소리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런 식으로 공감하게 될 줄이야.
“아무튼, 저는 이제 가볼게요. 저녁 꼭 챙겨 드세요. 아! 그리고 오늘 제 몫으로 두 병 가지고 갈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시현 님. 내일 뵐게요.”
“…….”
평소처럼 인사를 건넨 리아네와 달리, 카네프는 토라진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돌려버렸다.
두 사람에게 인사를 끝내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곳의 ‘야쿰의 젖’ 전용 냉장고에서 두 병을 꺼내 가방에 챙기고 농장 건물을 나섰다.
사과 아저씨와 만나기로 한 장소와 시간을 확인하며, 평소보다 빠른 발걸음으로 차원의 문을 통과했다.
* * *
집 근처에 작은 카페.
카페 입구에 들어선 50대 부부가 매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한눈에 그들을 알아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아주머니! 여기에요.”
“허허. 기다리고 있었구나!”
사과 아저씨는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못 본 사이에 더 훤칠해졌구먼.”
“아저씨는 완전 그대로시네요.”
“형수님.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부담되실까 봐 이래저래 연락 못 드렸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언니.”
“아니에요. 준호 아버지랑 동생 도움 없었으면 정말 버티기 힘들었을 거예요. 두 사람 모두 고마워요.”
어머니의 감사 인사에 아저씨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주머니는 눈시울을 적시며 어머니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가까운 이웃에 지내면서 정말 한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몇 년 만에 어렵게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쉽게 인사가 끝날 리 없었다.
내가 눈치껏 카페의 마실 것을 주문해서 올 때까지도, 서로의 근황을 묻는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예전처럼 어머니와 아주머니가 수다에 빠져 있는 사이. 아저씨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요즘 무슨 일을 하는 거냐? 잠시 형수님 말 들어보니까 농장에서 일한다던데.”
“네. 운 좋게 취직한 곳인데. 열심히 해보고 있어요.”
아저씨는 조금 진지한 표정을 하더니,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계속 농장 일을 할 생각이면. 혹시 아저씨 밑에서 일할 생각 없냐?”
“……?”
“인연도 없는 농장에서 일하기 어려울 텐데. 어차피 할 거면 아버지 고향에서 하는 게 좋지 않겠냐?”
진지한 물음에 나는 잠시 마계의 농장을 떠올렸다.
확실히 처음에는 아주 낯설고, 어려운 곳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오히려 그곳에 빠져 있다고 할 만큼, 많은 애정을 가진 장소였다.
단순히 빚을 갚게 해준 것과 상관없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돼 준 곳이기도 했으니까.
“괜찮아요. 아저씨. 지금 일하는 곳이 충분히 만족스럽거든요.”
“그러냐?”
“네. 거기다 아직 어머니의 병이 완치됐다고 안심할 수 없어서. 당분간은 이곳에서 모시고 싶어요.”
“쩝.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저씨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솔직히 요즘 믿을 만한 사람 구하기가 힘들거든. 시현이 네가 도와주면 좋겠다 싶어서 욕심 좀 부려봤다.”
“죄송해요. 아저씨.”
“죄송은 무슨.”
크게 한숨을 내쉰 아저씨는 농장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 넋두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네가 일하는 농장은 일손 어떻게 구하고 있냐? 요즘 일할 사람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야.”
“그런가요?”
“그래. 외국인 노동자도 겨우겨우 데려올 정도라니까.”
으음.
마계농장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나도 외국인 노동자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면 마계농장도 상황은 비슷비슷한 것 같았다.
“준호 형이랑 유미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안 그래도 준호가 많이 아쉬워했어. 자기도 같이 얼굴 보고 싶은데 요즘 딸기 하우스 일이 바빠서 짬 내기 힘들 것 같다고.”
“와! 형은 딸기 하우스 시작한 거예요?”
“그래. 체험 농장이다 뭐다 해서 예약이 꽉 찼다더라.”
준호 형은 유년기부터 사춘기까지 함께 겪은 아저씨 집의 장남이었다.
그리고 나보다 네 살 어린 여동생 유미까지, 이렇게 셋이서 친남매처럼 지냈었다.
“유미는요? 나랑 네 살 차이니까 아직 대학생이려나?”
유미의 근황을 묻는 말에 아저씨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으응. 대학생은 아니고. 지금 길드에 들어가 있어.”
“네? 길드요?”
“그렇게 됐다. 사실 너랑 형수님 만나기 전에 유미를 만나고 오는 길이야.”
전혀 상상하지 못한 근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물론 치열하게 싸웠던 과거와는 다르게, 현재의 길드 활동은 평범한 직장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위험한 일이라는 건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이다.
내 기억 속에는 착하고 여린 여동생의 모습뿐인데, 그사이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체감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 아주머니와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어둑해졌다.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형수님, 시현아. 우리 가봐야겠다.”
“네? 같이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시죠.”
“내일 아침 일찍 딸기 하우스에 일손을 거들어야 하거든. 그래서 돌아가는 버스표를 예약해 놨다.”
그동안 만나지 못하며 생겼던 그리움을 털어내기엔 너무 짧은 만남이었다.
네 사람 모두 아쉬운 표정으로 카페를 나섰다.
“그럼. 버스 터미널까지 배웅해 드릴게요.”
“너도 일하고 와서 피곤할 건데. 얼른 들어가 쉬어야지.”
“그래도…….”
“됐다. 이 녀석아! 나는 집사람이랑 오붓하게 도시 구경하는 게 더 좋아. 형수님, 시현이 데리고 어서 들어가세요.”
“언니. 저희 가볼게요.”
부부는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떠나갔다. 나와 어머니는 카페 앞에 서서 그들을 배웅했다.
“아들. 오랜만에 고향 사람 만나니까 좋은 것 같아.”
“그러게. 다음에는 우리가 아저씨, 아주머니 만나러 가야겠네. 준호 형도 만나고.”
“그래야지. 우리도 집에…… 어머! 예린 씨, 안녕하세요?”
어머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손에 커피를 든 여자가 막 카페 입구를 나서는 중이었다.
응? 누구지?
낯선 여자의 인상에 내가 당황하는 사이. 여자 쪽에서도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집에 들어가시는 길이신가 봐요.”
“네. 아들이랑 같이 고향 지인들 만나고, 이제 들어가려고요. 시현아. 너도 얼른 인사해야지.”
나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누구신데?”
“누구긴 누구야. 우리 옆집에 사는 아가씨지.”
“아…….”
그제야 짧은 첫 만남의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너무 달라진 지금의 모습에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에 옅은 화장기. 화려하지는 않지만, 맵시 있는 옷차림까지.
첫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지나다니는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미인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상대방도 역시 어색한 기색이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어제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신경 써주신 덕분에 괜찮아요. 오히려 너무 신세를 진 것 같아서…….”
“신세는요. 이웃에 살면서 서로 도와야죠. 오늘 집 반찬 좀 새로 만들었는데. 좀 가져다줄까요?”
어머니는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며 옆집 아가씨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행히 그녀도 어머니의 태도를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았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 뒤쪽으로 슬쩍 빠지려는 순간.
-찌이이잉!
날카롭게 찌르는 감각을 느끼고 흠칫 몸을 떨었다. 불길한 예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느낌은 분명…….
금방 과거의 비슷한 상황을 떠올렸다.
바로 숲속에 회색 늑대를 감지했을 때와 굉장히 흡사한 느낌이었다.
나는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균열 경보 어플을 확인했다.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에는 사각지대 없이 균열의 발생을 감시하기 때문에, 발생을 미리 감지하면 곧바로 인근 주민 모두에게 재난문자를 보낸다.
하지만 재난문자는 물론, 어플에도 주변에 균열 발생 예정이 없다고 나왔다.
온몸을 조여오듯 엄습하는 불안감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행인과 평소의 가게 모습 그대로였다.
“시현아, 왜 그러니?”
“엄마. 혹시 오늘 균열 경보 메시지 받은 거 없어?”
“없는데?”
어머니는 물론이고 옆집 아가씨도 약간 이상하게 나를 쳐다봤다.
더는 참기 힘든 불안함에 무작정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일단 다른 곳으로 가자.”
“갑자기 왜 그래? 집이 코앞인데. 가긴 어딜 가.”
“설명은 나중에 해줄 테니까. 일단 따라와!”
당황하는 어머니를 이끌고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두려워하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오싹!
소름 돋는 기분과 동시에 멀지 않은 허공에 공간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쩌억!
유리가 깨져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공간이 갈라지더니, 이윽고 엄청난 마나의 흐름이 주변을 휘감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머니를 등 뒤로 숨기고. 휘몰아치지는 마나에 대비했다.
-파아아악!
“아아아악!”
거센 폭풍과 어머니의 비명이 끝날 때.
나는 금방 깨달았다.
이미 균열의 영향권에 들어왔고, 더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두 분, 괜찮으세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그곳에는 굉장히 침착한 모습의 옆집 아가씨가 있었다.
“네. 일단은.”
“남자분. 정신 차리고 빨리 어머니 챙기세요.”
“예?”
“옵니다…… 그놈들이.”
그녀의 시선이 균열로 향했다.
-차르르르륵!
-차르륵!
그리고 갈라진 공간의 틈에서 벌레의 형상을 한 괴수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