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5화
교감 그리고 책임(1)
보통 농장의 일상은 매번 반복적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시간에 먹이를 주고, 농장을 청소하고, 정해진 기간에 시설들을 점검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계농장은 굉장히 이상했다.
안드라스가 주기적으로 결계를 점검하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일과가 불규칙적이고 허술했다.
그나마 내가 이곳에 오면서 여러 가지 부분에서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에는 예쁜이에게 젖을 짜는 일이 안정화됐다.
처음에는 젖이 나오는 양도 들쭉날쭉하고, 어떤 때는 예쁜이가 젖 짜는 일을 거부하는 때도 있었다.
지속적인 예쁜이의 먹이와 컨디션 조절로 최대한 스트레스를 줄이려 노력한 결과.
지금은 안정기에 접어들어 일정한 양의 젖이 계속 나왔다.
덕분에 아기 야쿰들도 매일매일 달라 보일 정도로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 * *
-무우우.
젖병 하나를 비워낸 아꿍이가 울음소리를 내며 살짝 물러섰다. 배가 부르다는 녀석의 표현이었다.
“아꿍아. 그만 먹을래?”
-무우우.
내가 빈 병을 내려놓자 아꿍이는 내 품에 안겨들며 몸을 비비적거렸다.
나는 기울어지는 몸의 균형을 겨우 잡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이쿠! 이제 덩치가 커져서 힘도 장난 아니네.”
-무우. 무우!
아기 세 남매 중에서 아꿍이는 나를 가장 따랐다.
거기다 어리광도 심해 식사가 끝나면 항상 이렇게 안겨들었다.
그나마 젖을 줄 때 세 남매를 따로 분리해서 망정이지, 주변에 있었으면 나머지 두 녀석도 덩달아 어리광을 부렸을 거다.
세 남매의 식사시간을 따로 분리해 놓은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최고의 선택인 것 같다.
-무우우…….
내가 부드럽게 털을 쓸어주자 아꿍이는 편안한 울음소리를 냈다.
나의 마음도 잔잔해지는 그런 울음소리였다.
한참을 어리광을 받아주다가 몸을 일으켰다.
-무우우.
“안 돼. 이제 형도 일하러 가야 해. 다음에 또 안아줄게. 알았지?”
아꿍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단호한 내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예쁜이와 다른 형제들을 찾아 축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수고하셨어요. 시현 님.”
“하아. 이제 삼 남매 모두 커져서 젖 먹이는 일도 쉽지 않네요.”
“빈 병 주세요. 제가 정리할게요.”
“네. 부탁드릴게요. 리아네 씨.”
축사 구석에 있던 리아네는 빈 젖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기 야쿰에게 먹이고 남은 젖병을 챙겼다.
“남은 ‘꿍유’는 그게 다인 거죠?”
“네. 한 병 분량은 되겠네요.”
‘꿍유’.
야쿰의 젖을 지칭하는 내가 붙인 이름이었다.
마계에서도 야쿰의 젖은 굉장히 희귀했기에 이름이 따로 없었다.
애초에 직접 본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니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항상 ‘야쿰의 젖’이라고 부르기 힘들어서 대충 ‘꿍유’라고 이름을 지었다.
딱히 큰 의미를 두고 지었다기보다는, 아기 야쿰들을 생각하며 귀여운 느낌으로 만들었다.
내가 쓰는 농장 일지는 물론, 마왕성에 보내는 보고서까지 ‘꿍유’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고.
그 영향으로 인해 ‘야쿰의 젖’을 나타내는 단어로 ‘꿍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앞으로 작성될 문서, 여러 기록물에 내가 만들어낸 단어가 사용된다고 하니 가슴이 웅장해졌다.
리아네와 함께 젖병을 챙기고 축사를 나오는데. 크고 우렁찬 울음소리가 나를 불렀다.
-부우우우!
야쿰 무리의 우두머리 큰뿔이었다. 녀석은 내가 있는 울타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평소에 큰뿔이가 먼저 다가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도 울타리 쪽으로 향했다.
“큰뿔아, 왜 그래?”
-부우우우.
녀석은 짧게 울음소리를 내고, 고개를 돌려 농장 건물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부우우우.
“아…….”
나는 큰뿔이의 뜻을 이해했다. 녀석은 무리를 이끌고 신선한 풀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는 듯했다.
야쿰은 무리는 원래 신선한 풀을 찾아 움직이는데 일상이지만, 새로 태어난 아기들 때문에 최근에는 이 주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아기들이 움직일 만큼 자랐으니, 큰뿔이는 무리를 움직일 생각이었다.
“알았어. 큰뿔아. 그럼 다녀와.”
-부우우. 부우우우.
“응? 나도 같이 가자고?”
내가 되묻자 큰뿔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예쁜이와 아기 야쿰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무래도 내가 같이 가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한 것 같았다.
이렇게 나를 의지해 주고 있다니!
큰뿔이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알았어. 나도 따라갈게. 대신 조금만 기다려 줄래?”
* * *
-부우우우우!!
큰뿔이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야쿰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농장을 벗어나는 것이 기분이 좋은지, 모두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우리도 출발할까요?”
“네. 시현 님.”
“자! 출발하자.”
-히히히힝!
나와 리아네는 각자의 말을 몰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허접한 실력이지만, 굉장히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마치 소풍을 떠나는 것처럼 마음이 두근거렸다.
말의 움직임에 엉덩이가 적응될 때쯤.
농장의 건물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눈앞에는 초원의 싱그러움만이 가득해졌다.
화창한 날씨에 선선하게 불어오는 봄바람.
높은 말 안장 위에 앉아서 느끼는 바람과 풍경은 또 색다른 맛이었다.
“아아. 날씨도 좋고. 정말 좋네요.”
감탄이 뒤섞인 내 말에 리아네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오랜만에 외출이 굉장히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사장님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워낙 이런 걸 싫어하시는 분이라.”
함께 나갈 것을 권유해 봤지만.
카네프는 단칼에 거절했다.
-귀찮아. 집에 있는 게 제일 편한데. 뭣 하러 거길 나가.
어느 정도 예상된 대답이었기에 리아네와 나만 나오기로 했다.
천천히 말을 몰며 야쿰 무리가 있는 쪽을 살폈다. 대형을 이뤄 이동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무리 안쪽에 예쁜이와 아기 야쿰들의 모습이 살짝 보였다. 아기들을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 같았다.
근데 작은뿔은 어디 갔지?
예쁜이 옆에는 얌꿍이와 아꿍이의 모습만 보였다.
-무우우우우!!
작은뿔의 울음소리.
그곳에서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아기 야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우우! 무우우우!
농장을 벗어나 극도로 흥분한 작은뿔은 무리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팔랑거리는 나비를 발견하고 뒤쫓기도 하고, 커다란 바위가 신기한지 주변을 맴돌기도 했다.
신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저러다 혼날 것 같은데.
-부우우우우!!
역시.
마음대로 무리를 벗어난 작은뿔의 행동에 큰뿔이가 크게 화를 냈다.
움찔한 작은뿔이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녀석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울음소리를 냈다.
-무우우…… 무우우…….
아마도 나를 핑계 삼아 계속 마음대로 행동하려는 것 같았다.
촉촉해진 눈빛이 조금은 안쓰러웠지만, 여기서는 강하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안 돼! 큰뿔이 화난 거 보이지? 빨리 무리로 돌아가.”
-무우우…….
나까지 엄한 태도를 보이자. 작은뿔은 크게 기가 죽어서 무리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큰뿔이는 다시 무리를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뿔이 조금은 무리의 규칙을 이해했길 바라면서, 나도 리아네와 함께 야쿰 무리를 따랐다.
점심때가 좀 많이 지났을 때.
큰뿔이는 신선한 풀들이 가득한 곳에 무리를 멈춰 세웠다.
-부우우우!
그리고 큰뿔이가 신호를 보내자 야쿰들은 천천히 흩어져 풀을 뜯기 시작했다.
“저희도 여기서 쉴까요?”
“네. 저기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이 좋겠네요.”
근처에 말들이 풀을 뜯으며 쉴 수 있게 묶어두고, 짐을 꺼내 리아네가 가리킨 나무로 향했다.
농장에서 가져온 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꺼냈다.
도시락 메뉴는 바로 샌드위치.
급하게 만들었어도 내용물은 알차게 만들었다.
리아네는 입맛을 다시며 샌드위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까 샌드위치를 만들 때부터 눈빛이 심상치 않더니, 꽤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그녀의 반응에 애써 웃음을 참으며 먼저 샌드위치 하나를 먼저 건넸다.
“맛있게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신선한 채소와 부드러운 식빵.
치즈의 고소함과 슬라이스 햄의 담백함.
조금 심심한 맛이 각가지 재료의 맛을 더 살렸다.
탁 트인 초원을 배경 삼으니 더 그 맛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리아네도 샌드위치가 마음에 들었는지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입을 멈추지 않았다.
가져온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난 뒤에는 리아네가 준비해 준 차를 음미했다.
평화로운 티타임이 끝나고.
여유를 즐기던 나는 아예 벌러덩 자리에 누웠다.
“조금만 누워 있을게요. 리아네 씨도 편하게 있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무우!
-무우우! 무우우!
풀냄새가 가까이 느껴지고, 멀리서는 아기 야쿰들이 뛰노는 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바람을 느끼며, 점점 의식이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정말 꿀맛 같은 낮잠.
꿈도 꾸지 않는 상태로 정말 깔끔하게 숙면을 취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뿔 특유의 신난 울음소리에 반쯤 잠에서 깨어났다.
“으으음…….”
포근한 기운이 얼굴을 감싸듯 느껴졌다. 나른한 느낌에 베개라고 생각하고 얼굴을 파묻었다.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나셨어요?”
“리아네 씨?”
누워 있는 자세로 리아네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금방 포근한 기운의 정체를 깨닫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후훗. 조금 더 누워계셔도 되는데.”
내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살포시 웃었다.
“분명 혼자서 누워 있었는데.”
“조금 불편해 보이시는 것 같아서 무릎을 빌려드렸어요. 혹시 불쾌하셨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는 말은 할 수 없어서 말을 얼버무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야쿰들도 이제 다시 돌아갈 것 같아요. 저희도 슬슬 떠날 준비를 해볼까요?”
“네. 알겠습니다.”
리아네가 먼저 일어나고 나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흩어져 있던 야쿰들도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도시락과 펼쳐둔 자리를 챙기고, 다시 말 위에 짐을 실었다.
그때 작은뿔이 내 쪽으로 다가와 울었다.
-무우우! 무우우!
돌아가기 싫어서 투정을 부리는 줄 알고, 녀석을 나지막이 타일렀다.
“작은뿔. 이제 돌아가야지. 나중에 또 나오자.”
-무우! 무우! 무우우!!!
“왜 그래?”
흥분한 작은뿔이 입으로 내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졌다. 어디론가 나를 데려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깐, 잠깐! 바지 뜯어져. 이제 집에 가야 하는데 어딜 가려고?”
-무우우!
작은뿔은 따라오라는 듯 한 번 울어주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뛰어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녀석을 뒤따랐다.
함께 도착한 곳에는 억센 풀들이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그 가운데에 커다란 돌들이 덩그러니 자리했다.
작은뿔은 풀을 헤치고 돌 틈으로 쏙 들어갔다.
“엇? 작은뿔, 어디가?”
-무우! 무우!
작은 틈으로는 따라갈 수 없었기에 돌의 위로 올라가 작은뿔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커다란 돌의 사이에서 작은뿔의 모습을 찾아냈다.
“거기서 뭐 해? 지금 또 장난치는 거면…….”
-무우우!!
그곳에는 작은뿔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작은 덩치에 은빛 털을 가진 아기 여우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