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28화
교감 그리고 책임(4)
창고 안에 들어서며 젖은 우비와 겉옷을 벗었다.
불편한 장화도 벗어놓고 편해진 복장으로 창고 구석으로 향했다.
-…….
아기 여우는 고개를 들어 잠시 나를 바라봤다.
평소의 경계하는 눈빛이 아니라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제멋대로인 여우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고 몸을 웅크렸다.
하하. 이 앙큼한 녀석 봐라?
이미 앞에서 구슬픈 울음소리를 들었던 나로서는 여우의 행동이 말 그대로 여우짓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도 이미 여우에게 홀려버린 것일까?
그런 아기 여우의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아기 여우가 있는 구석과 약간 떨어진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벽에 몸을 기대고 최대한 편한 자세를 잡았다.
창고 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기 여우는 전혀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계속 나를 힐끔힐끔 살폈다.
창밖에서 다시 한번 번개가 번쩍였다.
-콰콰콰쾅!!
거기다 강한 바람이 계속 창문을 두드리며 불안정한 소리를 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아기 여우를 살폈다.
녀석은 천둥소리가 무서운지 웅크린 상태로 온몸을 벌벌 떨었다.
다가가 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 속에 익숙한 음악을 선택해 재생 버튼을 눌렀다.
-♩∼♪∼♬♩
가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잔잔한 노랫소리와 어우러졌다.
꽤 오래전 발라드 가수의 히트곡.
어렸을 적 잠을 자거나, 공부할 때 수백 번은 들었던 노래다.
지금은 잘 듣지 않는 추억의 노래가 돼버렸지만, 가끔 편안한 분위기가 그리울 때 가끔 꺼내서 듣곤 했다.
감미로운 발라드 선율이 휴대폰을 통해 퍼져나갔다.
얼굴을 숨기고 있던 아기 여우도 귀를 쫑긋 세우고 이곳을 바라봤다.
마치 노래라는 마법으로 결계를 만들어 놓은 것처럼, 가수의 힘 있는 음색이 천둥과 비바람 소리를 슬며시 밀어냈다.
아기 여우는 천천히 휴대폰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동시에 축 처져 있던 귀가 다시 뾰족하게 세워졌다.
떨리던 몸도 편안함을 되찾고, 숨소리에 맞춰 안정적으로 오르내렸다.
휴대폰에서는 발라드 가수의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2집의 노래가 다 끝났을 때쯤, 아기 여우는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잠시 아기 여우의 잠든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 점점 나의 눈꺼풀도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 *
새벽이 되어서도 비바람은 강하게 몰아쳤다.
-두두두둑!
-쫑긋?!
강풍이 창고 벽면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기 여우는 귀를 쫑긋거리며 눈을 떴다.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나왔던 창고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가득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기 여우는 노래가 흘러나왔던 휴대폰으로 다가섰다.
-툭. 툭.
앞발로 몇 번 휴대폰을 건드렸지만, 다시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기 여우는 반응이 없는 휴대폰에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다.
자연스레 아기 여우의 시선은 벽에 기대서 잠든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리저리 남자의 주변을 맴돌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쿠우우…….”
-…….
아기 여우는 잠든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휘이이이잉!!
-두두두둑!
다시 한번 바람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기 여우는 무서워하거나 몸을 떨지 않았다.
놀라운 변화에 자신도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이어 아기 여우는 놀라운 변화의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자에게 의지하고 있었음을.
아기 여우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축 늘어진 팔 끝에 아직 흉터가 사라지지 않은 오른손이 보였다.
과거에 자신이 했던 일을 떠올리고 눈동자에 슬픈 감정을 띄웠다.
혹시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까? 두려움도 생겨났다.
-할짝…… 할짝…….
“으으응…….”
아기 여우가 오른손의 상처를 핥았다. 남자는 간지러웠는지 몸을 비틀었다.
용감해진 아기 여우는 남자의 허벅지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상체 쪽으로 몸을 기대며 몸을 웅크렸다.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에 아기 여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금방 잠이 들었다.
“쿠우우…….”
-고롱…… 고롱…….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비바람이 멈추고.
숨어 있던 풀벌레들의 소리와 별빛들이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별빛보다 환한 은빛 광채가 잠시 창고 안을 가득 채우고 사라졌다.
* * *
-짹. 짹짹!
아침을 일깨우는 맑은 새소리가 들려왔다.
불편한 곳에서 잠을 잔 탓인지, 개운함보다는 찌뿌둥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익숙한 창고의 모습이 보였다.
으으. 맞아.
어제 창고에서 잠들었구나.
금방 찌뿌둥함의 원인을 찾아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굳어 있던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켜려는데.
허벅지에 저린 통증과 함께 무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자연스레 향한 시선 끝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고롱…… 고롱…….”
“어…… 어?”
네다섯 살 정도에 흰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내 허벅지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시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구석에서 잠들어 있던 아기 여우는 사라지고.
은빛 머리카락에 뾰족한 여우 귀, 거기다 탐스러운 꼬리까지 있는 소녀가 나타났다.
“설마…….”
상식적인 추론은 아닐지라도.
본능과 직감이 한가지의 사실을 강하게 주장했다.
눈앞의 소녀가 바로 아기 여우라는 사실을.
너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사이, 소녀가 부스스 눈을 떴다.
“우웅…….”
“…….”
“…….”
소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붉은 기운이 맴도는 눈동자가 소녀의 정체를 더욱 확실하게 해줬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안녕……?”
“…….”
“…….”
“…….”
아주 뻘쭘하게도 소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살짝 마음에 상처를 입으려고 하던 그 순간.
-생긋!
소녀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한 미소로 내 인사에 답했다.
그 미소를 보자마자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며, 동시에 찌뿌둥하던 피로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소녀는 다시 눈을 감고 내 쪽으로 몸을 기대왔다.
나는 양팔로 아주 조심스럽게 소녀를 감싸 안았다.
* * *
농장 식구들의 아침 식사.
오랜만에 안드라스가 자리에 참석했다.
아침 메뉴는 토마토 달걀 볶음, 버터에 노릇하게 구워낸 식빵, 어제 만들어 뒀던 감자 샐러드에 과일 주스 한 잔.
식탁 위에는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가 솔솔 퍼져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카네프는 안드라스에게 왜 또 왔냐며 구박을 하면, 억울해하는 안드라스를 내가 두둔하고.
이 와중에 리아네는 주변 신경 쓰지 않고 음식에 푹 빠져 있었을 텐데…….
오늘은 모든 농장 식구들이 평소 같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나와 옆에 앉아 있는 은발의 소녀에게 향해 있었다.
-오물오물.
가리지 않고 넙죽넙죽 받아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잘 먹네. 이게 마음에 들어? 더 줄까?”
-끄덕끄덕.
감자 샐러드를 가리키며 묻자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신이 나서 감자 샐러드를 향해 수저를 움직였다.
리아네도 음식을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소녀의 귀여움에 푹 빠져 있었다.
카네프는 약간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하아…… 은색 털을 보고 바로 눈치챘어야 했는데.”
“사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은색 털에 변신한 모습을 보니까. 그 꼬맹이 아마도 은월(銀月)족일 거다.”
“은월(銀月)족이요?”
내가 되묻자 안드라스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은빛 털을 가진 여우 일족을 부르는 말입니다. 뛰어난 영혼 마법을 구사하기로 유명하죠.”
“그럼 이 아이도 마족인 건가요?”
“아닙니다. 엄밀히 따지면 마수에 가깝습니다만, 그렇다고 야쿰과 같은 마수는 아닙니다. 설명하기 힘든 부류죠.”
조금 이해하기 힘든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툭. 툭.
설명을 듣느라 내가 가만히 있으니, 소녀가 보채듯 내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응. 알았어. 금방 줄게.”
수저로 먹기 좋게 음식을 담아 금방 입에 넣어줬다.
소녀는 빵빵해진 볼을 움직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네? 밥 다 먹이고 나면 씻기러 갈 생각인데요.”
“아니! 그거 말고! 저 꼬맹이를 어떻게 할 거냐고.”
“…….”
카네프가 말하려는 뜻을 깨닫고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이 소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으니까.
눈치를 보던 리아네가 슬쩍 의견을 제시했다.
“일단은 여기서 지내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은월족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들의 영역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그것도 쉽지 않을걸? 은월족은 폐쇄적인 종족이라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거든. 뭐, 발레리안의 가문이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네. 이런 쪽으로는 영향력이 꽤 크니까.”
그들의 논쟁이 계속되는 사이, 소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아마도 눈치껏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 같았다.
의기소침해진 소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소녀는 투명한 눈동자로 올려다보았다.
나는 환한 미소와 함께 눈을 마주하고 속삭였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
내 마음이 제대로 전해진 것일까.
소녀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내 옷을 꼬옥 붙잡았다.
의지 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마음을 무겁게 하는 책임감에 다시 신중한 얼굴을 했다.
나의 변화를 알아차린 카네프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충 마음을 정한 것 같은데?”
“네.”
“결정 내리기 전에 한 가지만 분명히 알아둬. 그 꼬맹이는 단순히 길을 잃어서 여기에 오지는 않았을 거야. 우리가 모르는 복잡한 사연이 있겠지.”
“그 정도는 저도 예상했어요.”
“훗날에 저 꼬맹이 때문에 크게 곤란을 겪을지도 몰라. 그래도 너는 결심을 바꾸지 않을 거야?”
카네프의 말대로 나중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의 선택을 후회할 정도로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감을 통해 아기 여우의 슬픔과 괴로움을 이해하고, 나를 의지하여 내 곁으로 다가오게 만든 순간.
마치 족쇄처럼. 나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젠가 아기 여우가 자라 스스로 나를 떠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끔찍했던 과거로부터 지켜주고 싶었다.
나는 결심한 표정으로 카네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피식.
“너는 그럴 줄 알았다. 에효…… 나중에 귀찮은 일 생기면 저 꼬맹이랑 둘 다 내쫓아버릴 거야.”
그리고 그는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적휘적 내저은 뒤, 조금 식어버린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이 행동이 그만의 독특한 허락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 기쁜 마음을 그대로 표정에 담아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잠시 나를 멍하게 쳐다보더니, 금방 생긋이 웃어 보였다.
안드라스와 리아네도 흐뭇하게 우리 둘을 지켜봤다.
“시현 님, 시현 님! 그럼 저 아이도 이제 같이 지내는 거죠? 이름은 있나요? 아니면 제가 한번 지어볼까요?”
“흠흠.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쪽으로는 제가 또 전문가 아니겠습니까? 신화 속 요정의 이름을 따서…….”
“그냥 꼬맹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사장님은 좀 빠져 계세요. 음음. 뭐라고 지으면 좋을까?”
두 사람이 떠들썩하게 소녀의 이름을 생각하는 사이.
나는 다시 한번 소녀를 지긋이 바라봤다.
이름이라…….
“이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