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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2)화 (32/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2화

새로운 에스테르(4)

건물 안은 난장판이 돼버렸다.

“으으윽…….”

“컥. 컥.”

꽤 많은 용병이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버렸고, 바닥에는 떨어뜨린 무기들로 가득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데얀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버렸다.

일행들은 충격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레빌과 라구스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듯 허망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나와 리아네만는 농장에서 키득거리고 있을 카네프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0초.

2층에 있던 길드장이 1층으로 내려오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인상적인 턱수염과 다부진 체격의 길드장은 1층에 벌어진 진풍경에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하지만 모두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그는 주변을 살피던 도중 나와 시선이 딱! 맞닥뜨렸다.

그리고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신분패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기괴하게 변해갔다.

주춤주춤 다가온 길드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에스테르…… 이십니까?”

* * *

“차…… 내왔습니다.”

1층에서 봤던 접수원은 온몸을 떨며 내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예의상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시선을 마주했는데, 그녀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화들짝 놀랐다.

순간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

쯧쯧. 그러게 평소에 근무 태도를 확실하게 했어야지.

아까 우리에게 했던 태도를 보면 그렇게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두 분은 안 앉으세요? 옆에 자리 있는데.”

“크흠. 나는……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저희는 이곳이 편합니다.”

“……?”

앉아 있는 내 뒤에 리아네 그리고 레빌과 라구스까지 주르륵 호위하듯 서 있었는데.

리아네야 원래 메이드의 신분이라 그렇다 쳐도.

두 사람, 특히 레빌은 안 쓰던 존댓말까지 쓰면서 자리에 앉길 거부했다.

그들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짐작이 갔지만, 관계가 굉장히 어색해진 것 같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잠시 후.

방 안으로 길드장과 남자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먼저 온 손님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칼디니움의 용병 길드를 맡고 있는 ‘하르뎀’입니다.”

길드장의 정중한 인사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짧게 이름만 밝혔다.

“임시현입니다.”

이번에는 호리호리한 느낌에 안경을 낀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자신을 소개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에스테르 임시현 님. 저는 황금시계 상회에 소속된 상인. ‘에르긴’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임시현입니다.”

“소문으로만 전해 들었었는데. 여기서 직접 뵙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예? 소문이요?”

에르긴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마왕님께서 새로 임명한 에스테르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셨기 때문에. 그 정체를 궁금해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여러 소문이 퍼져 나왔습니다.”

전혀 처음 듣는 이야기라 리아네를 슬쩍 바라봤다. 그녀도 아는 게 없는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소문이 돌았을지 궁금증이 살짝 생겨났다.

“주로 어떤 소문이었죠?”

“혹시 불쾌해하실까 봐 말씀드리기가…….”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요.”

에르긴은 살짝 내 눈치를 보더니 차분히 입을 열었다.

“흥미 위주로 과장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흥분한 야쿰을 한 손으로 제압했다든가, 더 나아가 야쿰 무리를 마음대로 통제한다든가…….”

“…….”

“하지만 역시 그중에 최고는 야쿰의 젖을 직접 짜냈다는 소문입니다. 오래된 기록에서 ‘불사의 영약’이라 칭할 만큼 구하기 어려운 것으로 아는데. 새로운 에스테르는 밥 먹듯이 젖을 짜낸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소문은 참 재미있네요.”

여러 의미로 당황한 나는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고, 리아네는 남몰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임시현 님의 능력이 뛰어나서 생긴 소문들 아니겠습니까? 너무 허무맹랑한 소문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것참 다행이네요…….”

에르긴과 내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약간 조급해 보이던 길드장 하르뎀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큼. 에르긴, 괜찮다면 내가 먼저 임시현 님과 대화를 나눠도 되겠나?”

“물론이죠. 저도 이곳에 손님으로 온 입장이니, 길드장님 편하게 하세요.”

하르뎀의 요청에 에르긴은 대화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임시현 님이 기다리시는 동안 건물 1층을 수습했습니다. 그나마 멀쩡한 용병에게 물어 사정을 확인해 보니, 소속된 용병 몇몇이 임시현 님께 위협을 가했다고 하더군요. 정말 사실입니까?”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는 자가 한 명 있었고, 몇몇이 그를 따라 동조했습니다.”

“데얀 이 미친 새…… 크흠. 원래 길드 내에서도 평소 행실이 좋지 않은 자였는데, 미리 조처하지 않은 제 잘못입니다. 길드를 대표해서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는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자의 행동이 불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미 어느 정도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길드를 엉망으로 만들어서 죄송하기도 하고요.”

“아닙니다. 죄송하실 것 전혀 없습니다.”

“적당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힘 조절을 할 수 없는 부분이라…….”

내 마지막 말에 하르뎀과 에르긴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하르뎀은 마치 탈색된 것처럼 안색이 핼쑥해졌고, 에르긴은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두 사람 모두 내 말의 의도를 잘못 파악한 것 같았지만, 굳이 정정해 주기도 귀찮아서 그만뒀다.

“의뢰를 맡기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의뢰인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라구스 씨?”

“네?”

“라구스 씨가 설명하시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은데. 말씀 좀 해주세요.”

내 부탁에 라구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긴장한 탓인지 말이 횡설수설했지만, 갈수록 정확하고 세세하게 의뢰에 관해서 설명했다.

“으음…….”

의뢰의 내용을 전해 들은 하르뎀이 침음을 흘렸다.

“혹시 수인 마을이라서 의뢰를 받을 수 없는 건가요?”

“어엇…… 그게…… 저…….”

당황해서 이상한 말을 내뱉던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으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길드장으로서 의뢰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용병들을 억지로 참여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건 길드의 규칙에도 어긋나는 일이고, 용병들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용병들이 스스로 의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는 덥수룩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적절한 명분만 있으면 좋을 텐데…….”

“명분?”

“용병들이 수인 마을의 의뢰를 받지 않는 건 자존심 문제에 가깝습니다. 그들의 자존심을 조금만 세워주는 선에서 움직일 만한 명분만 있다면…….”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나와 길드장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에르긴이 중간에 나섰다.

“수인 마을에서 의뢰를 하는 게 아니라, 황금시계 상회에서 의뢰하는 거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에르긴,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엘든 마을로 가는 상행을 꾸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상행을 이유로 용병을 모집하는 거죠.”

“오오! 그런 방법이?”

“저희가 도시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 거기다 에스테르 님에게 실례를 저질렀다는 점을 이유로 용병들의 등을 떠민다면 꽤 그럴 듯한 명분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르뎀은 손으로 무릎을 탁 내려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역시 에르긴! 참으로 절묘한 방법이로군. 그 정도라면 용병들도 마지못해 움직일 거야.”

“칭찬 감사드립니다. 임시현 님, 어떻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나서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으음…….”

나는 대답을 미루며 뒤쪽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반응을 보아하니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르긴의 제안 말고는 딱히 대안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에르긴 씨의 제안대로 해볼게요.”

내가 제안을 수락하자.

에르긴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편하게 에르긴이라고 불러주십시오.”

* * *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에르긴은 곧바로 엘든 마을로 향하는 상행 날짜를 지정하고, 길드장에게 의뢰를 부탁했다.

거기다 라구스를 따로 불러서 마을에 필요한 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세심한 배려에 라구스는 몇 번이고 에르긴에게 고개를 숙였다.

용병을 고용하는 비용은 길드에서 지급하기로 했다. 오늘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사죄의 뜻이라고 했다.

길드 건물을 빠져나가면서 길드장과 에르긴의 배웅을 직접 받았다.

중간에 용병들이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황급히 물러서는 모습을 보며-

아아.

달콤한 권력의 맛이란 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일행은 건물을 빠져나와 마차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마족들이 우리 마차에 열심히 뭔가를 싣고 있었다.

“누구세요?”

“아! 저희는 에르긴 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차에 에르긴 님이 보내는 선물을 실어뒀습니다.”

“예?”

텅 비어 있던 마차에는 어느새 각가지 선물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처음 보는 열매, 각가지 향신료, 고급스러운 상자에 담긴 장신구, 화려한 옷가지들.

그중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화려한 깃털을 가진 새 한 쌍이었다. 요즘 귀족들에게 인기 있는 애완용 새라고…….

나는 리아네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리아네 씨. 이런 거 받으면 큰일 나는 거 아닌가요?”

“왜 큰일이 나죠?”

“……?”

“상인이 귀족을 만났을 때, 적당한 선물을 보내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에요. 오히려 선물을 보내지 않았을 때가 문제죠.”

“하하하…….”

다시 한번 진하게 느껴지는 달콤한 맛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화려한 선물들에 마음이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그냥 되돌려보내기로 했다.

그 말에 선물을 가져온 일꾼들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땅에 바짝 엎드리며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어떤 벌이라도 받을 테니. 제발 선물을 받아주십시오.”

“아니. 그게 아니라요…….”

나는 한 명씩 직접 일으켜 세우며 진땀을 빼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선물 몇 가지만 받아가기로 했다.

일꾼들은 그것도 불안한지 안절부절못했지만, 괜찮다고 몇 번이나 설득하고 나서야 이해하고 물러섰다.

일단 먹을 것 위주로 챙기고, 거추장스러운 건 다 빼버려야겠다. 향신료는 나중에 써보게 챙겨볼까?

먹을 수 있거나 직접 사용 가능한 것들만 고르니, 지켜보던 일꾼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장신구 상자 몇 개를 건넸다.

그것도 안 가져가면 다시 땅바닥을 뒹굴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챙겨 넣었다.

이래저래 선물 정리가 끝나고 마차 위에 올라섰다.

“그만 가볼게요. 에르긴…… 한테는 정말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상회 일꾼들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우리의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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