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3화
새로운 에스테르(5)
칼디니움을 빠져나온 마차는 천천히 엘든 마을로 향했다.
“…….”
“…….”
“…….”
“…….”
마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리아네는 딱히 대화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 같았고, 나머지 레빌과 라구스는 내 눈치를 보느라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리아네에게 작게 말을 걸었다.
“리아네 씨. 제가 생각한 거랑 너무 다른데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에스테르가 평범한 명예직인 줄 알았는데. 도시에서도 그렇고, 앞의 두 사람도 완전히 얼어서 숨도 제대로 못 쉬잖아요?”
나는 에스테르가 그렇게 영향력이 없을 줄 알았다. 한국의 예를 들면, ‘명예 경찰관’ 혹은 ‘홍보대사’와 비슷한 느낌?
그런데 실제로 본 에스테르의 영향력이 절대로 작지 않은 듯했다.
도시를 빠져나가면서도 소문이 퍼졌는지 마차 주변으로 인파가 몰렸을 정도였다.
“에스테르는 분명 평범한 명예직이에요. 다만 그걸 누가 직접 임명했는지가 중요한 거죠.”
“전부 마왕님이 임명하는 게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4대 가문에서도 각자 에스테르를 임명할 수 있어요. 형식적으로는 같은 에스테르이지만, 마왕님의 에스테르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어요.”
조금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사장님이나 다른 분들이 가볍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이렇게 의미 있는 자리인 줄 몰랐거든요.”
“그렇게 느끼셨을 수도 있겠네요. 카네프 님, 안드라스 님 그리고 발레리안 님까지 모두 에스테르 출신이시거든요.”
“예?”
“아, 말씀드린 적 없었나요? 안드라스 님과 발레리안 님은 각자의 가문에서 임명받으셨고, 카네프 님은 전대 마왕님께 에스테르로 임명받으셨었죠.”
헐. 그래서 그렇게 반응했던 거야?
우리 농장 식구들 스펙 무엇?
리아네의 설명 덕분에 지금까지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에스테르라는 자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엘든 마을에 가까워졌다.
아직도 내 눈치를 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저기요. 두 분?”
-움찔!
-움찔!
화들짝 놀라는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굉장히 불편하니까 예전처럼 행동해 주시면 안 될까요? 도와드리고 싶어서 에스테르라는 지위를 사용한 거지, 이런 대접을 받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요.”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 두 사람은 굉장히 복잡한 눈빛을 했다. 그러다 라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희는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귀족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셨지만, 설마 에스테르이실 줄이야.”
“나도 이름뿐인 귀족 가문의 자제쯤일 거라 생각했는데…….”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었어요. 저도 최근에 임명돼서 이렇게 엄청난 자리인 줄 몰랐거든요. 죄송해요.”
라구스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큰 은혜를 입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을 뿐입니다.”
레빌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한 것도 별로 없는데요, 뭘.”
“시현 님에게는 작은 행동이지만, 그로 인해 엘든 마을의 많은 주민이 큰 도움을 받게 됐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조금 쑥스럽긴 했어도 그들의 행동을 말리지는 않았다.
“감사 인사는 그 정도면 됐어요. 원래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거잖아요. 저도 언젠가 도움받을 날이 있겠죠. 그러니까 지금은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시현 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으흠. 그럼 그렇게 할까? 사실 나도 좀 어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큭큭. 그런 것 치고 레빌, 자네도 아까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나?”
“그, 그건 공식적인 자리에서 시현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런 거지. 딱히 위축됐거나 그런 게 아니라고!”
“하하하하!”
“하하하하!”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하는 모습에 마차에는 오랜만에 훈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차의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엘든 마을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레빌과 라구스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을 불러모을 준비를 했다.
용병들을 구할 수 있다는 희소식을 전하면서, 상인의 방문에 대해 의논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당분간 나의 신분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함구하기로 했다.
아직은 마을 사람들에게 밝힐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차가 너구리 영감님 가게 근처에 접어들었을 때, 가게에서 은율이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머리에는 화환이, 팔에는 꽃 팔찌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은율아! 잘 놀고 있었어?”
많이 기다렸는지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품 안에 와락 안겨들었다.
“어이구! 나 많이 보고 싶었어? 아까 나갈 때는 신경도 안 쓰더니.”
솔직히 꽃 팔찌에만 신경 쓸 때 조금 섭섭했었는데, 이렇게 반겨주는 모습을 보니 섭섭한 감정이 스르륵 녹아났다.
-꾸욱. 꾸욱.
“응? 손은 갑자기 왜?”
은율이는 갑자기 내 팔을 잡아당기더니, 뭔가를 꺼내 손으로 집어넣으려 했다.
그것은 조금 엉성하게 만들어진 꽃 팔찌였다.
하지만 은율이의 작은 손을 기준으로 만든 꽃 팔찌가 내 손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대신에 나는 검지와 중지에 반지처럼 꽃 팔찌를 끼워 넣었다.
“이거 은율이가 만든 거야?”
-끄덕끄덕.
조금이라도 세게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뜯어질 듯 너덜거렸지만, 날 위해 끙끙대며 만들었을 은율이의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마워. 너무 잘 만들었다.”
내 칭찬에 은율이는 뾰족한 두 귀를 쫑긋거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차 짐칸에 화려한 장신구를 받았을 때보다 더욱 행복하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다녀오셨어요?”
“그래. 은율이랑 잘 놀아줬구나.”
“네. 꽃 팔찌 만들어주는 법도 알려주고, 머리 위에 화환도 제가 만들어 줬어요.”
“정말 고마워. 오늘 미루한테 신세를 졌는데?”
미루는 몸을 비비 꼬면서 은근한 어투로 물었다.
“도시에는 재미있고 멋있는 물건이 엄청 많다던데. 혹시 선물 같은 건 안 사 오셨나요?”
“하하하! 그럼 오늘 고생한 미루를 위해서 마차 안에 뭐가 있을지 찾아볼까?”
“저도 구경해도 되요?”
“물론이지.”
“꺄악! 신난다!”
잔뜩 신난 미루가 쏜살같이 마차 위로 뛰어올랐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은율이와 함께 뒤따랐다.
에르긴에게 받은 것 중에서 적절히 골라서 미루와 너구리 영감님께 선물했다.
미루에게는 희귀한 열매가 가득 담긴 주머니와 예쁜 머리 장식을, 너구리 영감님에게는 고급스러운 병에 담긴 과일주를 건네줬다.
두 사람 모두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꼬리가 귀에 닿을 듯 올라갔다.
미루는 도시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졸랐지만, 날이 늦어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기에 다음을 기약했다.
농장으로 돌아가는 길.
천천히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선물로 받은 열매의 껍질을 까서 은율이의 입안에 넣어줬다.
-오물오물.
작은 여우 소녀는 열매가 마음에 들었는지, 내 옷깃을 살짝살짝 잡아당겼다.
다시 열매를 까서 앙증맞은 입 쪽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은율이는 직접 열매를 집더니, 손을 내 쪽으로 쭉 내밀었다.
“어? 나 주는 거야?”
-끄덕.
내가 열매를 받아먹자 은율이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내게서 열매를 받아, 이번에는 리아네에게 열매를 건넸다.
“고마워요. 은율아.”
은율이는 재미가 들렸는지 그 뒤로도 계속 나와 리아네에게 번갈아 열매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쁘게 움직이던 여우 소녀는 내 품 안에서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혹시 은율이가 잠에서 깰까 봐 속삭이듯 말했다.
“금방 잠들어버렸네요.”
“네. 저희가 도시에 가 있는 사이에 미루랑 재미있게 놀았나 봐요.”
“아! 리아네 씨. 이거 받으세요.”
“예?”
나는 미리 챙겨두었던 장신구 상자 하나를 리아네에게 건넸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나와 상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에르긴이 보낸 선물인데 저는 별로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이건 리아네 씨가 받으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저는…….”
“빨리요. 생각보다 무거워서 팔 아파요.”
리아네는 반쯤 억지로 상자를 받아들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내가 보내는 무언의 압박에 못 이겨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붉은색 보석으로 장식된 목걸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잠깐 살펴봤었는데. 리아네 씨한테 잘 어울릴 것 같더라고요.”
“이런 걸 제가 받아도 될까요?”
“당연하죠. 이곳에 와서 저를 가장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고마워요.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품 안에 꼭 껴안았다.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 님, 근데 그거 아세요?”
“……?”
“저한테 이런 선물을 해준 사람은 시현 님이 처음이에요.”
“……으음.”
그녀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싱긋 웃어 보였다.
나를 놀리는 것 같으면서도 진심이 담긴 그 미소는, 장신구의 붉은 보석처럼 아름다워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농장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에서는 은율이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리아네의 흥겨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저 멀리 물드는 석양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에스테르…… 나쁘지 않네?
* * *
어머니의 정기 검진이 있는 날.
지난번에는 바빠서 함께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농장에 미리 휴가를 내고 억지로 따라왔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휴가를 냈다며 어머니에게 타박을 좀 들었지만. 이번에는 의사 선생님도 직접 만나보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수연 환자분! 들어오세요.”
“엄마, 들어가자.”
안내에 따라 진료실로 들어섰다.
의자에 앉아 있는 50대 의사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긴장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으음…….”
“…….”
“…….”
의사는 오늘 받았던 검사 결과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혹시나 결과가 안 좋을까 봐 조금씩 마음이 초조해졌다.
“일단 이수연 환자분. 3개월 전에 검사받으셨죠?”
“네.”
“허허. 이것 참…….”
“혹시 상태가 안 좋아졌나요?”
“아뇨. 그 반대입니다.”
그는 짧게 헛웃음을 터뜨린 뒤, 모니터 화면에 촬영 영상을 띄워놓으며 설명했다.
“이게 수술 직후 모습, 이건 3개월 전, 그리고 마지막이 오늘 검사한 모습입니다. 이쪽이 수술했던 부위인데 3개월 전과 비교해서 확연하게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혈액 검사에서도 수치가 아주 좋고요.”
“정말입니까, 선생님?”
흥분한 내가 되묻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너무 결과가 좋아서 저도 어리둥절합니다. 아까 들어오실 때부터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다고 생각했는데, 당분간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혹시 모르니 정기 검진 예약만 해두세요. 두 분 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짧은 진료를 끝내고 다시 나오는 길.
나는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머니도 크게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한결 여유를 되찾은 것 같았다.
뭔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에, 병원 입구를 나오는 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엄마.”
“내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진짜 고생은 우리 아들이 다 했지.”
농장에 휴가 내고 따라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식을 직접 의사 선생님께 듣지 못했다면, 아마 쉽사리 믿지 못했을 테니까.
“엄마,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아니면 먹고 싶은 게 있다든지.”
“하고 싶은 거 말이니?”
“응. 몇 년 동안 일만 하고, 수술받느라고 제대로 놀러 가본 적도 없잖아. 이참에 여행이라도 짧게 다녀올까?”
내 물음에 어머니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긴 한데.”
“어디야?”
“우리 아들이 일하는 농장.”
“……?”
“아들이 일하는 농장을 직접 가보고 싶어. 한번 데려다주면 안 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