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7화
새콤달콤 딸기(1)
현관문 앞에 가득 쌓인 상자.
나는 조금 질린 표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봤다.
“임시현 씨 맞으시죠.”
“네. 근데 이건 어디서 온 거예요?”
“딸기 농장의 이준호 님이 보내셨네요.”
“아…….”
사과 아저씨의 장남, 준호 형이 보낸 것들이었다.
“확인 끝났으니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생한 택배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상자를 살폈다.
안에는 새빨갛게 잘 익은 딸기들이 가득가득 들어 있었다.
얼마 전에 사과 아저씨에게 딸기를 보내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 많이 보낼 줄은 몰랐다.
어머니와 나 둘이서 먹기에는 확실히 많은 양이었다.
-스윽.
소란스러움 때문인지 옆집에 문이 열리고 누군가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뭘 그렇게 많이 시켰어?”
“시킨 게 아니라 지인분께서 보내주신 거야. 집에서 딸기 농장을 하시거든.”
“딸기?! 나 딸기 엄청 좋아하는데.”
서예린이 편한 복장으로 냉큼 곁으로 다가왔다.
균열에 휘말린 사건 이후로 옆집의 그녀는 우리 집과 굉장히 가까운 사이가 됐다.
어머니가 그때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꾸준히 반찬을 가져다줬고, 서예린은 집밥이 너무 그리웠다며 굉장히 고마워했다.
이어지던 교류는 급속도로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들었다. 지금은 스스럼없이 우리 집에 넘어와 식사를 함께할 정도로 친해졌다.
자신이 협찬받는 고급 화장품이나 명품 가방을 선물하거나, 같이 쇼핑을 함께 할 정도로 어머니에게 잘 대해주니.
내가 챙기지 못하는 부분을 챙겨주는 것 같아 고맙게 생각했다.
마침 나이도 동갑이라 얼마 전부터는 서로 편하게 부르기로 한 상태였다.
“좀 가져갈래? 어차피 나랑 엄마 둘이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진짜? 그럼 어머님한테 인사 좀 하고 얻어가야겠다. 어머니, 저 왔어요!”
서예린은 마치 자기네 집인 양 우리 집으로 쓱 들어갔다.
그 모습에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웃다가, 딸기 상자들을 집 안으로 들여놓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수많은 딸기 상자들을 보며 깜짝 놀라셨다.
“이게 다 뭐래?”
“준호 형네 딸기 농장에서 보낸 것 같아. 왜 얼마 전에 아저씨가 연락했었잖아.”
“아이고, 그래도 그렇지 두 명 사는 집에 이렇게 많이 보내면 어떻게 해. 예린아 일단 네가 좀 가져가.”
“헤헤. 잘 먹을게요. 어머니!”
서예린은 어머니에게 애교를 한 번 부리고, 상자에서 딸기를 골라 담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한참 남은 딸기 상자들을 보며 어머니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나머지는 다 어떻게 하지?”
“으음…….”
쌓여 있는 딸기 상자들을 보며 당연하다는 듯 몇몇 사람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 *
“이 빨간 열매 이름이 뭐라고?”
“딸기요. 저쪽 세계에서는 그렇게 불러요.”
“으음. 딸기라…… 나쁘지 않네.”
카네프는 딸기 하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한입에 베어 물었다. 미적지근한 반응과는 달리 손은 계속 딸기를 집어 들고 있었다.
“이렇게 달콤한 열매는 처음 먹어보는 것 같습니다.”
“저도요. 시현 님이 사는 세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을 정도예요.”
안드라스와 리아네도 딸기 맛에 흥분할 정도였다.
-툭. 툭.
“아빠, 아빠, 이거.”
“나 주는 거야? 잘 먹을게.”
나는 은율이가 집어준 딸기를 입으로 받아먹었다.
“으음. 은율이가 줘서 그런지 더 맛있는 것 같은데?”
“헤헤.”
내 과장된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은율이는 방실방실 웃었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던 카네프가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시현, 저놈은 은월족 꼬맹이가 온 뒤부터 갈수록 멍청해지는 것 같지 않냐?”
“왜요? 저는 보기 좋은 것 같은데. 카네프 님이 너무 삭막한 게 아닐까요?”
“리아네 양 말이 맞습니다. 삐뚤어진 마음에 질투하시는 거라면 조금 보기 추합니다.”
“아니! 누가 질투를 했다고 그래?! 날 뭘로 보고, 너희들은 딸기 먹지 마.”
-촤르르륵!
카네프의 손에서 생겨난 쇠사슬이 두 사람 앞에 놓여 있던 딸기 바구니를 휙! 가로챘다.
쇠사슬에 묶여 딸기 바구니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앗! 카네프 님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나이도 제일 많으신 분이 치사하게 왜 이러십니까?”
눈앞의 딸기가 사라지자 흥분한 리아네와 안드라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카네프는 마치 보란 듯이 사슬을 이용해 딸기를 하나씩 꺼내 먹었다.
그 얄미운 모습에 두 사람은 차마 달려들지는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 내 쪽을 향해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사장님. 빨리 딸기 바구니 내려놓으세요. 은율이도 보고 있는데 부끄럽지 않으세요?”
“내가 뭘? 저놈들이 먼저 시작했는데.”
“계속 그렇게 억지 부리시면. 남아 있는 딸기는 전부 안드라스 씨한테 드릴 거예요?”
“…….”
내 협박에 카네프는 마지못해 딸기 바구니를 제자리에 내려놨다.
의기양양한 리아네와 안드라스의 모습에 카네프는 ‘다음에 두고 보자’라는 얼굴로 노려봤다.
어휴. 나이도 적지 않은 분들이…….
은율아! 너는 저렇게 철없는 어른으로 자라면 안 된다?
“흠흠. 시현 님, 혹시 돌아가는 길에 딸기 조금만 받아갈 수 있을까요? 같이 일하는 마족들에게 맛이라도 보여주고 싶은데.”
“네. 괜찮아요. 선물용으로 빼 둔 것만 남겨두시고 나머지는 마음껏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시현 님!”
카네프가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물이라니? 누구한테 주려고?”
“오늘 수인 마을에 황금시계 상인들이 찾아오거든요. 저번에 여러 가지로 신세를 져서 조금이나마 보답하려고요.”
“그 ‘에르긴’인가 뭔가 하는 상인?”
그는 금방 에르긴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뭣 하러 그런 놈한테 선물을 준비해?”
“당연히 도움을 받았으니까 보답을 하는 거죠.”
“도움? 황금시계 상회에 소속된 상인에게 순수한 호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하지만 정말로 아무런 대가 없이 도와주고 있는데…….”
“아무런 대가가 없긴. 설마 네가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 까먹고 있는 건 아니지?”
마왕이 직접 임명한 에스테르.
그것이 마계에서 내가 가진 지위였다.
“황금시계 상회 입장에서는 새로운 에스테르와 인연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큰 이득이라고 생각할 거야. 아니, 어쩌면 벌써 네 정보를 다른 곳에 팔아넘겼을지도 모르지.”
“…….”
“조심해. 겉으로는 항상 웃으며 상대를 배려하는 척해도, 절대 손해 보는 일은 안 하는 놈들이니까.”
카네프의 경고에 안드라스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도 가문을 통해서 황금시계 상회와 많이 거래를 주고받지만, 카네프 님의 말대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어쩌면 시현 님께 얻은 호의를 바탕으로 뭔가 이득을 취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리아네. 에르긴인가 뭔가 하는 놈이 헛소리하면 그냥 입을 찢어버려.”
“입을 찢다니…… 그 상스러운 표현은 마음에 안 들지만, 제가 시현 님 옆에서 제대로 정신 차리고 있을게요.”
생각보다 부정적인 반응에 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 * *
수인들이 모여 사는 엘든 마을.
이 작은 마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변 마수들의 영향으로 큰 피해를 입을 뻔했었다.
다행히 황금시계 상인들이 용병을 고용해 마을에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마수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지금은 다시 예전의 안정을 되찾았다.
이전과 비교도 하기 힘든 규모의 상인들과 교역을 하면서, 마을에는 이전에 없었던 활기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나와 리아네도 한눈에 그 분위기를 알아챌 정도였다.
가장 먼저 우리의 방문을 알아챈 건, 역시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는 마을의 아이들이었다.
과자와 사탕에 목마른 아이들 사이에 내다 도착했다는 소식이 금방 퍼져나갔다.
내 주변으로 아이들이 몰려드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몰려든 아이들에게 사탕과 과자를 나눠주고, 만족한 아이들이 흩어지고 난 다음에 레빌과 미루가 천천히 다가왔다.
“사탕 아저씨, 오늘도 고생이 많군.”
“하하.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잘 지내셨어요?”
“물론 덕분에 잘 지냈지. 메이드 아가씨랑 여우 아가씨도 잘 지냈나?”
리아네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율이는 아직 레빌의 인사가 익숙지 않은지 내 쪽으로 바짝 붙었다.
“아빠…….”
은율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레빌과 미루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들의 반응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레빌은 씨익 웃었다.
“좋은 일은 시현에게 있었나 보군. 가지. 라구스가 기다리고 있어.”
“레빌 아저씨. 저는 은율이랑 놀래요.”
미루는 폴짝 마차 위로 뛰어올라 은율이 옆에 자리 잡더니 재잘재잘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직 말하는 게 익숙지 않은 은율이였지만,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꽤 적극적으로 미루의 대화에 응했다.
레빌과 함께 라구스를 만나러 마을 안쪽으로 향했다.
상인이 방문하는 날이라 그런지 확실히 마을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익숙한 집 앞에 도착하자 라구스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시현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라구스 씨.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은데.”
“저는 아직 이게 편한 것 같습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라구스, 레빌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마을 사정은 좀 나아진 것 같네요?”
“네. 그렇습니다. 황금시계 상인들이 용병을 대신 고용해 준 덕분에 마수 걱정은 더 필요 없게 됐습니다. 거기다 질 좋은 물건들까지 싼값에 들여오니, 이래저래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예전에 이곳까지 찾아오던 상인들은 작은 씨앗 하나도 바가지 씌우기 일쑤였으니까. 이것도 다 네 덕분이지.”
라구스와 레빌이 보내는 신뢰 가득한 눈빛에 나는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런 날들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걱정입니다. 시현 님 덕분에 잠시나마 그들의 호의를 얻었지만, 상인 입장에서 이곳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을 텐데…….”
엘든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해봐야.
숲에서 직접 채취한 열매, 약초. 아니면 사냥으로 얻은 마수들의 부산물 정도였다.
작은 보따리 상인들이야 바가지를 씌워가며 소소하게 이득을 챙길 수 있겠지만, 황금시계 정도 되는 거대 상회 입장에서는 전혀 이득될 만한 거리가 없었다.
라구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표정이 밝을 수만은 없었다.
“라구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그렇고 다른 마을 사람들도 조금씩 대비하고 있으니까. 너무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
“그래요. 저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두 사람 모두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마을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근처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상인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행렬의 선두를 이끄는 남자.
도시 칼디니움에서 만났던 에르긴이 나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시현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