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8화
새콤달콤 딸기(2)
에르긴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며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네. 오랜만이네요. 에르긴. 저번에 보내주신 선물은 잘 받았어요. 너무 많아서 조금 돌려보내기는 했지만, 나머지는 잘 쓰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직원들을 통해서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게 부담스러워하실 줄 알았다면 미리 언질을 좀 드릴 걸 그랬습니다. 대부분의 귀족분들은 그러지 않아서…….”
“지위를 얻긴 했어도 스스로 귀족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렇군요.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인사를 끝낸 뒤, 에르긴은 옆에 있던 라구스와 레빌과도 짧게 인사를 나눴다.
잠시 후 상인들은 싣고 온 물건들을 하나둘 풀어놓기 시작했다.
엘든 마을의 사람들도 라구스의 지시에 따라 판매할 물건들을 내놓았다.
나는 은율이와 미루의 손을 잡고 상인들에게 다가갔다. 금방 설치된 좌판대에는 아이들의 눈길을 끌 만한 물건들이 많았다.
굉장히 비싸 보이는 장신구부터, 아기자기한 나무 조각품도 있었다.
그중에 아이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은 건 천으로 만든 봉제 인형이었다.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 인형들은 얼마죠?”
“각각 10페니입니다.”
10페니?
이곳에 물가를 잘 모르니 이게 싼 건지 비싼 건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뒤쪽에 있던 리아네를 바라보니 작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마도 부담스러운 가격은 아닌 듯했다.
“얘들아. 갖고 싶은 거 하나씩 골라봐. 내가 사줄게.”
“에엣? 정말요?”
“……!”
은율이는 내 말을 이해하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인형들을 둘러봤다.
미루는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선뜻 인형을 고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괜찮아. 미루가 은율이를 잘 챙겨주니까, 아저씨가 고마워서 사주는 거야. 걱정 말고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봐.”
부드러운 목소리로 미루를 안심시키며 살짝 등을 떠밀었다. 그제야 미루는 신중하게 인형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은율이는 예쁜 드레스를 입은 공주 인형을, 미루는 멋진 칼을 든 모험가 인형을 골랐다.
리아네를 통해 상인에게 인형값을 지불하고. 은율이와 미루에게 각각 인형을 전해주었다.
“아저씨, 고마워요! 소중히 간직할게요.”
“아빠…… 고…… 마워.”
각자 인형을 꼭 끌어안고 웃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 * *
아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노는 걸 지켜보고 있을 때.
라구스와 거래가 끝난 에르긴이 내게 다가왔다.
“귀여운 인형이군요. 저에게 미리 말해주셨다면 더 좋은 걸로 준비해드렸을 텐데.”
“괜찮습니다. 아이들도 충분히 마음에 든 것 같으니까요. 거래는 다 끝나셨나요?”
“네. 마을의 촌장님과 이야기는 다 끝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긴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리아네 씨. 아이들 좀 부탁드릴게요.”
아이들과 리아네를 뒤로하고 나는 에르긴과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 에르긴의 표정은 조금 진지해져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엘든 마을에 상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
“지난번 시현 님께 저질렀던 무례를 사죄하기 위해 이 마을의 상행을 시작했습니다만. 사실 상인들에게도 상회에게도 큰 이득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
“제 개인적인 권한으로는 상행을 계속 이어나가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에르긴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려움을 내게 전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래도 상행을 바로 그만두지는 않을 겁니다. 라구스 촌장과 약속한 거래는 확실히 진행할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에르긴은 밝은 표정과 말투로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뵀는데 너무 심각한 이야기만 한 것 같군요. 시현 님에 대한 재미있는 소문이 있는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또 소문이 생겼습니까?”
“네. 아무래도 에스테르라는 지위가 많은 관심을 받는 자리니까요. 혹시 ‘꿍유’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 아니요.”
“소문에 야쿰의 젖을 꿍유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워낙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많아서, 귀족뿐만 아니라 이름 있는 부자들까지 엄청난 관심을 보이는 중이죠.”
“…….”
“그런데 꿍유가 새롭게 임명된 에스테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시현 님은 이 소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은근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에르긴.
일단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으음. 글쎄요? 소문은 그저 소문이겠죠?”
“그렇습니까? 최근에 저희 상회뿐만 아니라, 모든 상인들이 꿍유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이거든요. 혹시 꿍유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면 개인적으로도 꽤 여유가 생길 것 같은데…….”
“…….”
에르긴은 잠시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굉장히 짧은 순간임에도 그의 의도와 생각이 순식간에 전해져왔다.
그는 이미 내가 꿍유와 연관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고, 엘든 마을과 거래를 빌미로 나를 압박하려 했다.
문득 이곳에 오기 전에 카네프와 안드라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딱히 아는 게 없어서…… 아쉽네요. 에르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엘든 마을을 돕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그렇다고 가장 중요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철저히 모르는 척 연기를 계속했다.
“그렇습니까? 굉장히 아쉽군요.”
에르긴은 아쉽다는 제스쳐를 보이더니. 다시 평소의 편안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아주 잠시라도 그의 진면목을 본 것 같아 살짝 소름 돋는 기분이 들었다.
-툭. 툭.
“으응?”
뒤에서 나의 바지를 당기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형을 든 은율이가 나를 올려다봤다.
“아빠…… 나 딸기…….”
“은율이 딸기가 먹고 싶어요?”
“응.”
귀여운 은율이의 모습에 진지하고 머리 아팠던 고민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은율이를 안아 들었다.
“마침 잘됐네요. 에르긴도 같이 딸기 먹으러 갈래요?”
“딸…… 기? 그게 뭔가요?”
“하하. 따라오세요.”
은율이를 안고 앞장서자 에르긴이 나의 뒤를 따랐다.
마차 근처에는 리아네와 미루뿐만 아니라, 레빌과 라구스도 모여 있었다.
나는 마차의 짐칸에서 가져온 딸기를 꺼내 모두에게 나눠줬다.
생소한 이름과 생김새에 모두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아주 맛있게 딸기를 먹는 은율이의 모습에 하나둘 딸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와아! 너무 맛있어요! 쓴맛은 전혀 없고 새콤달콤해요.”
“숲속에서 수많은 열매를 봐왔어도 이렇게 달고 맛있는 열매는 처음 보는군.”
“아이들에게 나눠주시는 과자와 사탕도 신기했는데. 이것도 정말 굉장하군요.”
미루는 너무 맛있다며 폴짝폴짝 뛰어올랐고, 레빌과 라구스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맛에 감탄을 드러냈다.
그리고 조용히 딸기를 맛본 에르긴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혹시 입맛에 안 맞으세요?”
“…….”
“에르긴?”
-휘익!
그는 갑자기 말도 없이 내 가까이 다가와 무서운 눈빛을 했다.
아까의 날카로움과는 다른 약간의 집착과 광기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시현 님! 이렇게 엄청난 열매를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직접 길러내신 겁니까? 혹시 얼마나 가지고 계신 겁니까? 가능하다면 제가 전부…….”
“에르긴! 일단 진정하세요.”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는 번쩍하고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상인으로서 누구 못지않게 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난생처음 보는 정말 매력적인 물건이라…… 대귀족에게 진상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맛입니다.”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약간 흥분이 남아 있는 말투로 딸기의 맛을 칭찬했다.
“혹시 이 딸기라는 열매를 어떻게 구하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는 지인분이 딸기 농장을 하시거든요. 감사하게도 최근에 꽤 많이 보내주셨어요.”
“그렇군요. 아쉽게도 직접 기르시지는 않았……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 정도의 맛과 품질, 거기다 에스테르의 이름까지 더한다면…….”
이번에는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안에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이 약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품 안의 은율이를 멀리 떨어뜨려 놔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와중에. 다시 깨어난 에르긴이 다급하게 외쳤다.
“시현 님! 저랑 거래해 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 * *
에르긴과의 거래는 금방 성사됐다.
그가 원한 것은 두 가지.
하나는 딸기. 그리고 또 하나는 에스테르라는 이름값이었다.
이 세상에는 없는 딸기라는 신선한 물건. 거기다 새롭게 등장한 에스테르의 이름값을 더해 상품화시킬 계획이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그게 얼마나 영향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에르긴은 무조건 성공을 장담했다.
딸기와 이름값 대신 그가 내건 조건 두 가지.
하나는 당분간 엘든 마을과 거래를 이어나가겠다는 것.
그리고 독점적인 계약을 하는 대신 최고의 가격으로 대우해 주겠다는 것.
딸기는 원하면 언제든지 쉽게 구할 수 있고, 아직까지는 엘든 마을에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내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거래인 듯했다.
리아네, 라구스, 레빌.
이렇게 세 사람과 짧은 상의 끝에 에르긴의 제안을 수락했다.
2주 뒤. 에르긴이 상행과 함께 엘든 마을을 찾아올 때, 그가 필요한 만큼의 딸기를 구해오기로 약속했다.
마지막에 선물용으로 준비했던 딸기 상자를 에르긴에게 건네자, 영업용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기뻐하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농장에 리아네와 은율이를 데려다주고, 퇴근하는 길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했다.
흠. 딸기는 준호 형네에서 부탁하면 되려나?
적당히 준비하면 되겠지.
평소처럼 문을 지나 인페리스 사무실로 돌아왔다.
“리안 씨, 저 돌아왔습…… 어어. 손님이신가요?”
사무실 안에는 발레리안 혼자가 아니었다. 한 번도 이 사무실에 손님이 있던 적이 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 시현 씨…….”
“저분이 임시현 씨군요.”
나를 발견한 손님이 발레리안의 말을 끊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각 잡힌 제복 차림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흰색으로 물들어 있는 의문의 여자.
그녀는 고압적인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임시현 씨.”
“예?”
“페이슈타의 감시관 ‘아슈미르’라고 합니다. 당신에게 차원의 균형을 어지럽힌 죄를 묻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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