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9화
감시관의 임무(1)
페이슈타의 감시관? 차원의 균형?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내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자, 발레리안이 나와 여자 사이에 끼어들며 중재했다.
“아슈미르 씨. 다짜고짜 그렇게 말씀하시면 시현 씨가 놀라지 않습니까?”
“저는 있는 그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하아아,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제가 시현 씨에게 설명을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그렇게 하시죠. 하지만 많은 시간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음 임무를 위해 곧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여자의 기계처럼 딱딱한 태도에 발레리안은 조금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 씨. 퇴근하시는 길에 죄송하지만, 시간을 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네. 그렇게 하시죠.”
“자리에 앉으실까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으니. 아슈미르 씨도 같이 앉으시죠?”
“저는 괜찮습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서 있겠습니다.”
“…….”
그녀는 의자가 있는 곳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리를 잡았다.
대화를 방해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존재만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것처럼 답답하게 만들었다.
일단 발레리안이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은 뒤, 현재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시현 씨. 혹시 천족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네…… 뭐, 엄청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아는 정도라면 알고 있습니다.”
천족!
마족과 함께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또 하나의 존재다.
사람들에게 악마와 비슷하게 인식된 마족과는 정반대로, 천족은 천사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사람들이 보는 이미지가 그렇다는 거지.
천족과 마족, 둘 다 천사와 악마 같은 존재가 전혀 아니다.
“아슈미르 씨는 천족의 ‘페이슈타의 순찰자’라는 곳의 감시관을 맡고 계십니다.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차원의 균형을 어지럽히는 존재나 현상을 찾아내시는 분이죠.”
“으음…… 그럼 제가 그 균형을 어지럽히는 존재라서 저분이 찾아오셨다는 거죠?”
“물론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상황은 일단은 그렇습니다.”
“정확히 제가 뭘 잘못한 건가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발레리안이 아니라, 아슈미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현 씨. 오늘 딸기 상자를 가지고 마계로 가셨죠?”
“네.”
“그리고 오늘뿐만 아니라 이쪽 세계의 물건들을 마계로 가져가신 적 있으시죠?”
“네.”
“이제 뭘 잘못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
아니, 딸기 몇 상자를 가져간 게 차원의 균형을 어지럽히는 일이라고?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순간 눈앞의 천족이 제정신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발레리안이 잠시 내게 손을 들어 보이고. 나를 대신해서 그녀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슈미르 씨. 아까 전에도 설명드리지 않았습니까? 마계로 가져간 물건들은 전부 일반적인 생활 물품들이라고.”
“어떤 물건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저희들의 허가 없이 차원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안일한 대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미 한 번 경험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 사람과 시현 씨는 다릅니다. 충분히 믿을 만한 분이고, 저희 쪽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일을 맡고 계십니다.”
“마족의 입장이 어떻든 저희들의 결정은 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정해진 원칙대로.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 방향으로 행해질 겁니다.”
“하아아…….”
결국, 발레리안도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아슈미르는 자신의 할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본인이 있었던 사실을 인정했으니. 오늘은 구두 경고로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저희들의 허락 없이 마계로 물건을 가져가지 않으셔야 합니다.”
“잠깐만요! 그럼 어떻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요?”
“그건 발레리안 씨께서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끝났으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녀는 짧게 고개를 숙인 뒤, 미련 없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
사무실에 남겨진 우리들은 한동안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아. 시현 씨,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저녁이라도 같이 드시겠습니까?”
“술도 함께 마실 수 있으면 더 좋겠네요.”
“동감입니다. 지금 바로 가시죠.”
* * *
미디어나 언론을 통해 대중들이 접하는 천족의 이미지는 꽤 좋은 편이다.
균열 사태로 혼란스러웠던 인간 사회에 실제로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고, 더 나아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거기에 더해 도움을 주면서도 천족은 자신들의 사명이라 말하며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계약을 통해 득과 실을 철저히 따졌던 마족과는 사뭇 비교되는 행보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천족을 정의로운 존재, 마족을 이익만 좇는 이기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 역시 마족을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편견을 가진 쪽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직접 천족을 만나고, 예전에 처음 마족을 만났을 때처럼 꽤 충격을 받았다.
순백으로 뒤덮여 신비한 분위기와 우아함을 가졌지만.
생각보다 훨씬 딱딱하고 고압적인 행동이 조금은 깔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발레리안과 술잔을 나누며 이런 생각들을 털어놓으니, 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족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차원의 균형을 수호한다는 그들의 절대적인 사명감은 마족인 제가 봐도 대단해 보일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너무 심해 독선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죠.”
“하하. 리안 씨도 그동안 꽤 당한 게 많나 보네요?”
장난스러운 물음에 발레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고집이라면 어디서 꿇리지 않는 카네프 님도 겪어봤지만, 천족은 더 심합니다. 그냥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수준이거든요.”
“허허…….”
사장님보다 더 심하다는 이야기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아까 아슈미르? 그분 말로는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처럼 말하던데,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요?”
“아…… 꺼내기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시현 씨에게는 말해드려야 할 것 같네요.”
그는 술잔에 남아 있는 술을 비워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현 씨가 농장에 오기 이전에, 취직을 하셨던 분들이 몇 분 더 계십니다.”
“들어는 본 것 같네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거의 다 금방 두셨는데. 딱 한 분, 굉장히 적극적이셨던 분이 있었습니다. 시현 씨 만큼 성과를 내지는 못했어도 농장 일에 꽤 열심이셨죠. 그런데 그건 굉장히 큰 착각이었습니다.”
“……?”
“그 사람은 마계에 출입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불법적인 단체와 밀반입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카네프 님이 이상한 점을 미리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꽤 큰 사건이 될 뻔했습니다.”
발레리안은 그때를 떠올리며 아찔하다는 표정을 했다.
“사건은 미수로 끝났지만, 천족은 강경하게 우리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때 마왕님께서 직접 나서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꽤 무거운 이야기에 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 서로의 술잔이 채워지고.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났다.
“리안 씨를 탓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런 큰일이 있었던 것 치고는 지금까지 꽤 허술하지 않았나요? 저도 나쁜 생각을 했을 수도 있는데.”
“으음…….”
내 질문에 발레리안은 뭔가를 고심하더니. 아주 어렵게 입을 열었다.
“불쾌하실까 봐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시현 씨도 알게 모르게 감시당하셨습니다.”
“네? 제가요?”
“초반에는 제 능력을 이용해서 시현 씨를 감시했었습니다. 일종의 최면술 같은 겁니다. 지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불가능해졌지만요.”
“……?”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발레리안이 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기운이 나를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야쿰의 신뢰’ 효과가 발동합니다.]
[의지에 간섭하려는 기운에 저항합니다.]
-파바밧! 파삭!
효과가 발동되면서 주변에 기운들이 순식간에 터져나갔다.
발레리안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나는 전혀 몰랐던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 중얼거렸다.
“으음…… 이런 식이었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 있었던 사건 때문에 몰래 시현 씨의 의지를 간섭했었습니다.”
발레리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속으로 약간의 찜찜함과 불쾌함이 생겨났다.
또 마음 한편으로는 그의 사정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솔직히 기분이 좀 나쁘기는 해도, 리안 씨의 결정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제가 농장에 취직할 수도 없었겠죠.”
“그건…… 그랬겠죠.”
“거기다 중간에는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셨지만, 계속 저를 믿어주셨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해요.”
“시현 씨…….”
발레리안은 술기운 때문인지.
눈동자까지 촉촉해져서 굉장히 감동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잘생긴 외모에 약간 취해서 흐트러진 모습.
거기다 진한 감정까지 실리니 영화의 한 장면인 것처럼 멋있었으나…….
저기 리안 씨.
같은 남자로서 굉장히 부담스럽거든요?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재빨리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2주 안에 마계로 가져가야 할 물건이 있는데. 천족의 허락을 받을 수 있을까요?”
에르긴과 맺은 계약을 상기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방법은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귀찮은 일이 될 것 같습니다.”
“……?”
발레리안은 차분히 그 방법을 설명해나갔다.
* * *
가게에는 아직 술을 마시는 손님들로 가득했으나.
우리는 빠르게 술자리를 끝냈다.
내일 농장에 출근을 해야 했으니까.
발레리안은 아까 숨겼던 사실이 많이 미안했는지, 나에게 택시비를 챙겨주겠다고 한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내 주머니에 택시비를 넣어주고 나서야 웃으며 떠나갔다.
택시를 잡기 전.
잠시 술 좀 깰 겸 도로를 따라 걸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술기운 덕분인지, 조금 늦은 시간임에도 거침없이 저장된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달칵!
“여보세요?”
-응? 임시현?
휴대폰을 통해 서예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나야. 미안해 늦게 전화해서.”
-괜찮아. 아직 깨어 있었거든. 근데 무슨 일이야?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혹시 어머니가 반찬 새로 하셨어?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어머니의 반찬 타령을 했다. 실제로 내가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긴 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으음. 그렇다면 설마?
“……?”
-데이트 신청?
“…….”
-아아. 결국 너도 내 매력에 빠져버렸구나. 음음. 사람의 마음은 어쩔 수 없지.
“…….”
-근데 우리가 아직 그 정도 사이는 아니지 않아? 어머니의 반찬을 조금 더 열심히 가져다준다면 한 번 생각은…….
아마 술을 조금만 더 마셨으면 험한 말이 튀어나왔을 것 같았다.
천족과는 다른 의미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서예린의 말을 끊었다.
“그런 거 아냐.”
-에에. 뭐야? 재미없게. 그럼 뭐 때문에 전화했는데?
“너 예전에 명함 주면서 했던 말 기억하지?”
-명함? 아! 기억하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
“나 좀 균열에 데려가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