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41화
감시관의 임무(3)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균열은 갑자기 생겨나고, 없어지는 종류를 생각하지만, 사실 균열은 그 규모와 형태에 따라서 종류가 다양하다.
대부분 잠재적 위험도와 예측의 어려움을 따져 균열을 분류하는데, 몇몇 특이한 균열은 예외로 분류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상시개방형 균열이다. 다른 말로 필드형 균열이라고도 부른다.
이 균열의 낮은 위험도와 큰 내부 규모가 특징이다.
보통 균열 내부에 괴수가 계속 생성되어 가득 차면 외부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필드형 균열은 그 내부 규모가 커서 빠르게 괴수가 가득 쌓이지 않는다. 그리고 위험도가 낮기 때문에 손쉽게 청소가 가능하다.
이런 특성들이 합쳐져 필드형 균열은 아주 좋은 영혼석과 마석의 수급처가 된다.
또 안전시설이 잘되어 있기 때문에, 처음 전투를 체험하는 초보자들이 안전하게 연습해 볼 수 있는 장소다.
그래서 나도 안전하게 영혼석을 얻기 위해 서예린과 같이 필드형 균열로 가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의 남녀다 보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되는……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서예린이 워낙 털털하고 쿨한 성격이기도 했고.
최근에 자주 우리 집을 들락거릴 정도로 친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동성 친구와 놀러 가는 기분이었다.
또 부탁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게 더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자! 도착했어. 내리자.”
도시에서 1시간 반 정도 외곽으로 빠져나와 목표 장소에 도착했다.
나는 낯선 곳에 도착한 어린아이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조금 신기해서. 생각보다 훨씬 번화하고 사람들도 많이 돌아다니네.”
“큭큭. 그럼 어떤 풍경을 상상했는데?”
“보통 균열은 무조건 경찰이나 군인이 통제하는 모습만 봤으니, 조금 엄격한 분위기일 것 같았는데, 그냥 평범한 관광지 같아 보여서 놀랐거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일단 들어가자.”
차를 주차시키고 균열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주변은 균열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가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균열 내부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체험 관광을 제공하는 곳도 있었다.
많은 가게들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균열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균열의 가까운 곳은 안전장치와 보안 직원들로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다.
균열 입구 앞쪽 매표소같이 생긴 건물들이 보였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서예린을 따라 우리도 줄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건 무슨 줄이야?”
“모두 균열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야. 시간과 자리를 배정받아야 균열에 들어갈 수 있거든.”
“근데 사람들이 엄청 많다.”
“대부분 균열 광부라 불리는 사람들이야. 매일 이곳으로 출근해 마석과 영혼석을 캐오는 일이 직업인 셈이지.”
그녀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필드형 균열이 커다란 광산인 셈.
기다리던 사람들 모두 어떤 카드를 꺼내 들더니, 기계에 뭔가를 툭툭 입력하고는 금방 자리를 떠나갔다.
덕분에 우리는 금방 창구 여직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균열 내부에서 사냥 좀 하려고요.”
“출입 카드는 따로 없으신가요?”
“네.”
“알겠습니다. 두 분 신분증과 각성자 ID카드 제출해 주세요.”
나는 지갑에서 미리 준비한 신분증과 ID카드를 꺼내 건넸다.
신분증과 ID카드를 받은 여직원은 뭔가를 확인하다가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디언즈 길드의 서예린 님 맞으시죠?”
“네. 맞아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두 분 모두 확인 끝났습니다. 출입증이 나오는 동안, 옆쪽 화면에 균열 내부의 주의 사항이 있으니 한번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창구 옆에 설치된 모니터에 몇 가지 주의 사항이 표시됐다.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면 안 된다…… 출입증을 타인에게 양도해서는 안 된다…… 균열 내부 이용자 간의 다툼이 적발될 시 곧바로 퇴장 조치한다 등등.
상식선에서 행동한다면 크게 문제 될 것 없어 보이는 규칙들이었다.
“엑! 오늘이 필드 보스 출현하는 날이에요? 거기다 백호 길드?!”
“네. 맞습니다. 오늘 출현하는 보스는 백호 길드 분들께서 사냥할 예정입니다. 혹시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뇨…….”
서예린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잠시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다 이내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금방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직원은 창구의 구멍을 통해 출입증 두 개를 건넸다.
“입장은 오전 9시부터 시작되고. 입장 대기는 30분 전부터 가능합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수고하세요.”
“네. 좋은 하루 되세요!”
우리는 여직원의 친절한 배웅을 받으며 가게들이 있는 거리로 되돌아왔다.
입장 시간인 9시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나는 달달한 바닐라 라떼 한잔, 서예린은 치즈 케이크 한 조각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서예린은 아침부터 운전하느라 고생했으니 당연히 계산은 내 몫이었다.
균열의 모습이 보이는 카페 외부 자리에 앉았다. 아직 입장 대기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입구에 몰려들고 있었다.
직원이 주문한 음료와 조각 케이크를 가져다줬다.
각자 음료를 마시며 잠시 여유를 즐기고 있던 도중,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이런 곳에서 보네요.”
우리와 비슷한 나잇대로 보이는 남자가 서예린을 향해 말을 걸었다.
“윽?!”
“…….”
그녀는 아까 전에 보여줬던 것보다 더 심하게 불쾌감을 드러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남자는 서예린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굉장히 바쁘신 ‘굉음의 대지술사’님께서 이런 곳에는 무슨 일로 와 계십니까?”
“하아…… 제가 여기에 무슨 일로 왔건 그쪽이랑 아무 상관 없잖아요.”
서예린이 대놓고 짜증을 내며 반응했다.
그러자 남자는 이번엔 내 쪽을 바라보더니 아래위로 훑어봤다.
굉장히 무례한 행동에 나 역시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못 보던 얼굴인데. 가디언즈 길드의 신입인가요? 요즘 사정이 별로인가 보네요. 딱 봐도 변변치 않은 것 같은데…….”
“야! 변태 새끼!”
“…….”
“저번처럼 또 창피당하기 싫으면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그때 길드장님 안 계셨으면 넌 이미 내 손에 죽었어.”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
그 소리가 조금 컸는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남자의 표정이 울그락불그락해지더니 쌩하고 몸을 돌렸다. 자신의 일행과 합류하여 멀리 떠나가고 나서야 서예린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야 주위의 시선이 좀 신경 쓰이는지 모자를 푹 눌러썼다.
“으으. 저 미친놈이랑 괜히 얽혀서…….”
“…….”
“미안. 나 때문에 괜한 소릴 들었네.”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뭘.”
서예린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지난날의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방금 봤던 놈은 ‘백호 길드’의 길드장 아들, 장현재라는 놈이야. 예전에 백호 길드와 합동해서 임무를 맡았을 때 처음 만났었지.”
백호 길드.
아까 여직원이 말했던, 필드 보스를 잡으러 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임무 자체는 무난하게 잘 끝났는데, 문제는 회식 자리에서 터졌지. 저 미친놈이 술을 좀 먹더니 엄청 치근덕대기 시작했어. 솔직히 길드장님도 계셨던 자리라 웬만하면 참으려고 그랬거든? 근데 이 새끼가 바로 선을 넘더라고.”
“……?”
“내가 취한 줄 알았는지 손으로 내 몸을 더듬거리기 시작했어.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으으!”
“그래서?”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그래서 바로 따귀를 한 대 올려붙였어. 그놈도 이런 반응은 생각 못 했는지 얼빵한 표정이 가관이었지.”
그녀는 잠시 킬킬거리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회식 자리 분위기는 싸해지고. 두 길드가 서로 난처해졌지. 백호 길드장은 상황을 대충 눈치챘는지 어물쩍 넘어가려 했는데. 우리 길드장님이 끝까지 사과하라고 엄청 화를 내시는 바람에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
“그래도 너네 길드장님이 대단하시네.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하시기 쉽지 않았을 텐데.”
“헤헤. 우리 길드장님이 좀 멋있기는 하지.”
서예린은 마치 자기가 칭찬을 받은 것 마냥 쑥스러워했다.
“아무튼, 그날 일은 어찌저찌 마무리됐는데. 저 변태 놈이 주변에 내 욕을 그렇게 하고 다녔더라고. 마치 내가 처음부터 꼬드겼던 것처럼 말이야.”
“으음…… 쓰레기 새끼네.”
“맞아. 완전 쓰레기야. 아오! 저 변태 놈이 오는 줄 알았으면 이날은 피했을 텐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정말로 싫은지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어차피 저 사람들은 필드 보스? 그거 잡느라 바쁠 텐데 우리랑 크게 상관없지 않을까?”
“아마도? 설마 균열 내부에서도 따라오는 또라이는 아니겠지. 에잇! 더는 신경 쓰지 말자. 오늘은 아주 중요한 시현의 화려한 데뷔전이니까!”
서예린은 다시 기운을 되찾고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자리에 일어났다.
“이제 우리도 슬슬 출발해야겠다. 지금쯤이면 그렇게 대기 시간도 길지 않을 것 같으니.”
“알았어. 그렇게 하자.”
그녀의 의견대로 우리는 카페를 빠져나와 균열의 입구로 향했다. 일찍부터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미 입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행렬을 따라 천천히 입장 순서를 기다렸다.
“어서 오십시오. 출입 카드 또는 출입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균열로 입장하는 절차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출입증을 제시한 다음 간단한 소지품 검사가 끝난 뒤, 바로 출입이 허가됐다.
“들어가볼까?”
서예린이 힘찬 발걸음으로 먼저 균열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치 마계로 넘어갈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으며, 눈앞에는 순식간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 * *
“저 미친년…….”
장현재는 균열로 들어가는 서예린과 임시현을 죽일 듯 노려봤다. 엄지손톱까지 물어뜯으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던 그는 돌연 두 눈동자를 빛냈다.
“야!”
“네, 형님.”
그의 부름에 백호 길드원 중 한 명이 바로 튀어나왔다.
“방금 균열에 들어간 두 연놈들 어느 자리에 배정받았는지 당장 확인해 봐.”
“예? 제가 그걸 어떻게…….”
-빡!
장현재는 길드원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그 충격에 길드원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흑!”
“X발! 알아오라면 그냥 알아와! 백호 길드든 아버지 이름이든 대충 둘러대서 알아오라고!”
“아, 알겠습니다!”
쓰러져 있던 길드원은 기겁하며 자리를 떠났다.
점점 포악해지는 그의 언행에 나머지 길드원들도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오늘 보스 사냥에 사용할 해독제 챙겨왔지?”
“넵!”
“얼마나 챙겼어?”
“사냥에 참여하는 길드원 몫에 추가로 넉넉하게 챙겼습니다.”
“그래?”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도 오랫동안 악소문과 손가락질에 시달려야 했다.
애초에 잘못은 본인에게 있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차오르는 질투, 자괴감, 분노, 치욕…….
이미 장현재의 머릿속에는 즐겁게 웃고 떠드는 서예린과 임시현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쌍년, 내가 맛본 치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어.’
머릿속에서 복수할 계획을 세워나가는 동안.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멀스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