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46화
꿀벌 대소동(1)
빨간색 고무공을 향해 작은뿔이 달려들었다.
-무우우!
작은뿔의 박치기에 날아간 고무공은 이리저리 튕기며 움직였다.
멀리 떨어진 공을 보고 작은뿔과 아꿍이가 쪼르르 달려갔다.
“헉…… 헉! 얘들아,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벌써 1시간이 넘게 뛰어다니는 아기 야쿰들은 뒤따르다가, 그만 내 체력이 먼저 고갈돼 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장난감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신나서 뛰어다녔는데, 이 작은 녀석들은 도저히 지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쫓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이 녀석들은 또 귀신같이 알아채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무우우! 무우!
-무우우!
야기 야쿰들이 빨리 일어나라고 나에게 매달렸다. 이제 덩치도 작지 않은지라 상체가 휘청휘청했다.
“아이고. 이 녀석들아. 숨만 좀 돌리자. 이러다 형 죽겠다!”
내 말을 들어준 것인지, 아니면 재미가 없어졌는지.
두 녀석은 나를 내버려 두고 다시 공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지치지 않는 그 모습이 정말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상체를 뒤로하고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멀리 나무 그늘에 리아네, 은율이, 얌꿍이가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쪽과는 달리 서로 꽃장식을 해주며 오순도순하게 놀고 있었다.
예쁜이나 큰뿔이, 다른 야쿰은 아직 경계가 심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내 손을 탄 아기 야쿰들은 경계심이 덜했고, 리아네는 아기 야쿰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아기 야쿰 돌보는 일이 조금 수월해졌다.
아아. 조금 있으면 초롱이 출산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기들이 더 늘어나면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으려나…….
햇볕에 뜨거워진 풀 냄새를 맡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멀리서 은율이가 나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아빠!”
“은율아, 왜 그래?”
“저기. 저기.”
은율이는 내 팔을 붙잡고 농장 건물 쪽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울타리 바깥쪽에 서서 손을 흔드는 안드라스와 발레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안드라스 씨랑 발레리안 씨가 오셨네. 은율아, 가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이야기해 줄래?”
“응!”
“그래그래, 착하다. 우리 은율이.”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방긋 한 번 웃어주고, 울타리 쪽으로 다시 쪼르르 달려갔다.
여우 꼬리가 살랑거리는 은율이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잠시 숨을 고른 뒤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차차! 이 녀석들, 이제 놀이 시간은 끝이야. 당장 그 고무공을 뺏어주겠어!”
-무우우?
-무우! 무우!
자신만만하게 나섰던 것과는 달리.
무려 20분을 더 미친놈처럼 뛰어다니고 나서야, 아기 야쿰으로부터 고무공을 뺏어올 수 있었다.
* * *
온몸의 땀을 씻어내고 1층으로 내려왔다.
카네프의 방에서 농장 식구들 모두와 발레리안, 안드라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애들이랑 놀아준다고 열심히 뛰었더니 땀이 너무 나서.”
“괜찮습니다. 불쑥 찾아온 건 저희니까요.”
“근데 무슨 일이세요? 두 분이 함께 찾아오는 일은 잘 없는데.”
나는 은율이를 무릎에 올리고 앉으며, 두 사람이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뭔가 말하기 껄끄럽다는 듯이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답답한 건 참지 못하는 카네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야? 뭘 그렇게 눈치를 봐?”
“이게 좋은 소식이라고 해야 할지, 나쁜 소식이라고 해야 할지…….”
“그러니까 궁금하게 하지 말고 말해봐. 도대체 무슨 소식이길래 그래.”
계속된 재촉에 발레리안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일단 확실히 좋은 소식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시현 씨, 위험하긴 했지만, 균열에서 거대 나무 괴수를 잡았던 것 기억하시죠?”
“네, 당연히 기억하죠. 겨우 지난주에 있었던 일인데.”
“거대 나무 괴수 사냥에 시현 씨의 공로가 인정돼서, 영혼석과 마석을 할당받게 됐습니다. 생각보다 꽤 많은 양입니다.”
“오오. 그런가요? 그건 확실히 좋은 소식이네요.”
나뿐만 아니라 카네프와 리아네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럼 이제 천족 놈들 때문에 간식 못 가져올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네, 카네프 님. 시현 씨 몫으로 많은 영혼석을 챙겼으니 당분간은 문제없을 겁니다.”
필드 보스를 잡게 된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지만, 어쨌든 결과는 좋게 마무리된 것 같았다.
“흠흠. 여러분 알고 계셨습니까? 시현 님이 위험했던 상황에 제가 만든 아티팩트가 엄청나게 활약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안드라스는 굉장히 뿌듯한 표정으로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하지만 자랑하는 상대가 별로 좋지 못했다.
“저 녀석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애초에 네가 대충 ‘인피거’ 등급이나 만들어주니까 위험한 상황에 빠진 거 아냐? 거기다 그 아티팩트는 이제 망가져서 못 쓴다며?”
“…….”
“맞아요. 안드라스 님. 심지어 시현 님은 후유증 때문에 다음 날 하루 더 쉬셨다고요.”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가 욕을 먹은 안드라스.
뿌듯했던 표정은 금방 시무룩해지고, 어깨는 축 처졌다.
안쓰러운 안드라스의 모습에 나는 커다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내 무릎에 앉아 있던 은율이도 따라서 그의 팔을 토닥거렸다.
그리고 눈빛으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해줬다.
다행히 내 위로가 통했는지 안드라스는 다시 뿌듯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좋은 소식 이야기는 끝난 것 같고. 나머지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시현 씨.”
“네?”
“최근에 황금시계 상인에게 딸기를 판매하셨었죠?”
“예, 판매했었죠. 혹시 문제라도 생겼나요?”
“그게…… 이걸 문제라고 해야 할지…….”
발레리안은 굉장히 껄끄러운 표정을 짓다가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 시현 씨가 판매한 딸기가 마족들, 특히 귀족과 부유층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으음.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좋은 일이긴 한데, 그 열기가 너무 과열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
내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안드라스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 딸기 한 알에 가격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200골드는 가뿐히 넘어간다고 합니다.”
“200골드요?!”
“허어…….”
“……?”
200골드라는 이야기에 리아네는 너무 놀랐는지 소리를 질렀고, 카네프 마저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이곳의 시세를 잘 모르는 나만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발레리안의 설명에 금방 나도 비슷하게 반응했다.
“시현 씨. 200골드면 한국의 가치로 소형차 한 대 가격 정도 될 겁니다.”
“컥! 소형차 한 대요?!?! 거기다 한 상자가 아니라 한 알에??”
“믿기 힘드시겠지만, 그 가격에도 딸기를 못 구해서 지금 난리입니다.”
에르긴에게 겨우 딸기 한 상자만 건넸을 뿐인데?
“어떻게 그렇게 비싸진 거죠?”
“딸기 자체가 상류층의 취향에 어울릴 만큼 고급스러웠고, 거기다 화제의 중심이었던 새로운 에스테르가 판매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관심이 폭발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도 발레리안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시현 씨, 사실 진짜 전해야 할 소식은 지금부터입니다.”
“또 뭐죠?”
“워낙 많은 마족이 딸기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새로운 에스테르에 대한 궁금증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정체를 공개해 달라는 요청이 마왕님께 쏟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혹시 마왕님께서 화가 나셨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직접 딸기를 먹어보시고 굉장히 마음에 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가 본론인데…….”
“……?”
“마왕님께서는 좀 더 많은 딸기가 마계에 풀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시현 씨에게 맡기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제가요?”
아니, 갑자기 이게 뭔…….
내가 굉장히 당황한 표정을 짓자, 발레리안은 다급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건 강제사항이 아닙니다. 애초에 시현 씨와 계약되지 않은 내용이니까요. 대신에 성과를 내신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은 충분히 이뤄질 겁니다.”
“그냥 딸기를 가져오는 거로는 부족하겠죠?”
“아무래도…… 지금은 영혼석의 여유가 좀 있기는 해도, 딸기를 가져오는 일에 다 써버릴 수는 없겠죠.”
마계로 딸기를 가져오는 게 힘들다면 남아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마계에서 딸기를 직접 재배하는 것.
우리 집이 직접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마을 이웃들의 농사를 도와주러 간 적은 꽤 많았다.
그때 절실히 느꼈던 것은 농사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트나 백화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 농부들은 1년 내내 땀 흘리며 고생해야 한다.
경험 많은 농부도 날씨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할 만큼 어려운 일이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은율이가 옷을 잡아당기며 나를 올려다봤다.
“아빠…… 나 딸기 먹고 시퍼.”
“은율이. 딸기 먹고 싶어?”
“우웅.”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저 누군가의 명령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머리가 복잡하고 부정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직접 기른 딸기를 은율이가 행복하게 먹고 있을 상상을 하니, 조금씩 의욕이 샘솟고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처음 야쿰을 만났을 때처럼 그냥 한 번 해보는 거야.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리고 한 번 피식 웃어 보였다. 그리고 긴장한 표정의 발레리안에게 말했다.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한 번 해볼게요.”
* * *
딸기 재배를 결정하고 처음 한 일은 딸기를 보내준 준호 형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이었다.
갑자기 딸기 재배하는 법을 알려달라는 황당한 부탁에도 형은 성심성의껏 자신의 정보와 노하우를 알려줬다.
하지만 형의 도움에도 그 시작이 쉽지만은 않았다.
농사라는 게 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고 해서 그냥 막무가내로 시작할 수 없다.
알아보고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심으려는 작물의 특성, 영양분이 될 땅의 성질, 날씨의 변화 등등.
나에게는 어느 것 하나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준호 형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그나마 가능성이 커 보이는 딸기 모종을 구하고, 어떤 식으로 해나갈지 구체적인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준호 형! 나중에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천족은 딸기 모종을 마계로 가져가는 것에 관해서는 다행히 문제 삼지 않았다.
대신 꽤 많은 양의 영혼석을 대가로 지급해야 했다.
신중하게 딸기를 심을 땅을 고르고, 필요한 도구들과 준비물을 하나씩 준비해나갔다.
그리고 2주 정도 지났을 때.
마계 농장에서의 첫 농사 준비가 완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