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47화
꿀벌 대소동(2)
농장과 조금 떨어진 평지.
2주 전부터 틈틈이 땅을 고르고, 돌들을 치워내서 어설프게나마 텃밭의 모양새를 갖췄다.
퇴비를 구해서 미리 뿌려놓은 뒤에 딸기를 심을 이랑을 만들어뒀다.
농사를 짓는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작은 텃밭 크기일지라도, 새로운 뭔가를 시작한다는 설렘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늘은 드디어 구해온 딸기 모종을 텃밭에 심는 날.
어렸을 적에 어른들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과 급하게 인터넷과 자료를 뒤져본 게 전부였지만, 진지한 태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텃밭에 나와 은율이, 그리고 리아네와 안드라스가 모였다.
은율이는 자기도 딸기를 심고 싶다며 따라 나왔는데, 벌써 잔뜩 신나서 눈을 반짝거렸다.
자진해서 일을 도우려고 나온 리아네와 달리.
안드라스는 점심만 얻어먹고 가려다가, 카네프에게 붙잡혀 텃밭 일꾼으로 강제 차출당했다.
“자! 모두 준비는 끝난 것 같으니. 먼저 시범을 보여드릴게요.”
나는 모종이 담겨 있는 포트를 손에 들고, 그 안에서 조심스럽게 딸기 모종을 꺼내 들었다.
미리 만들어둔 이랑에 적당히 흙을 파내고 모종을 그 안에 집어넣었다.
적당히 물을 주고 모종이 고정될 수 있도록 흙을 덮어주면 끝!
“오오!”
구경하고 있던 세 사람은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본 것마냥 감탄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약간 귀엽게 느껴졌다.
“간단하죠? 심을 때 너무 가깝게 붙지 않도록 주의만 해주시면 돼요. 제가 봐 드릴 테니까 모두 직접 해보세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세 사람은 모종삽을 들고 텃밭으로 향했다.
심어야 할 모종이 많았기에 나도 다시 모종을 심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어디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안드라스였다.
그는 거의 땅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하며 아주 섬세하게 구멍 깊이를 조절하고 있었다.
큰 덩치에 안 어울리는 모종삽을 들고 끙끙거리는 모습이 굉장히 애처로웠다.
“안드라스 씨? 뭐 하시는 거예요?”
“아까 시현 님이 보여주셨던 구멍 깊이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제대로 깊이를 맞추는 중입니다.”
“끄응……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아닙니다. 조금만 더 하면 완벽하게 맞출 수 있습니다.”
안드라스는 흙 알갱이 하나하나까지 조절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흙 깊이를 구현해갔다.
뜯어말리려고 하다가 나름대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뒀다.
-퍼석!
“아앗!”
이번에는 리아네 쪽에서 짧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세요?”
“죄, 죄송해요. 제가 힘 조절을 못 했는지 모종이 전부 뜯어져 버렸어요.”
그녀의 손 위에는 흙과 완전히 분리되어 뜯어진 딸기 모종이 보였다.
“모종이 담겨 있는 포트에서 빼내실 때, 너무 힘으로 빼려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겉을 툭툭 쳐주면서 살살 빼내면 돼요.”
“네. 알겠어요.”
리아네는 메이드로서 가사는 아주 완벽히 해내면서도, 집안일을 제외한 다른 일에는 전혀 손재주가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가 모종 심는 일에 익숙해지도록 천천히 도와준 뒤.
뒤늦게 은율이를 생각해내고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척. 척.
-스으으윽.
예상외로 은율이는 아주 깔끔하게 딸기 모종을 심어나가는 중이었다.
입을 앙다물고, 모종삽으로 흙을 파내는 모습은 마치 장인의 잡업을 보는 것 같은 진지함이 가득했다.
아! 물론 귀여움도 빼놓을 수 없었다.
“와! 은율이, 엄청나게 잘하네? 나보다 더 나은 것 같아.”
“헤헤!”
내 진심이 담긴 칭찬에.
은율이는 얼굴에 흙이 묻은 줄도 모르고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웃으면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흙을 닦아줬다.
귀여운 여우 소녀가 뜻밖의 재능을 발견하면서, 텃밭에 모종을 심는 작업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됐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준비한 딸기 모종을 모두 심을 수 있었다.
텃밭에 딸기 모종이 가득 심어진 모습을 보니 뭔가 마음이 뿌듯해졌다.
텃밭 가득가득 열릴 탐스러운 딸기가 벌써부터 눈에 보이는 느낌이랄까.
리아네와 안드라스도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텃밭을 둘러봤다.
“직접 농사를 해본 건 처음이었는데, 힘들긴 해도 완성된 텃밭을 보니 뿌듯해지는군요.”
“안드라스 님은 이상한 짓 하시느라 얼마 하지도 않으셨잖아요?”
리아네의 말에 안드라스는 헛기침을 하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흠흠, 혹시 다른 동물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도록 결계를 치는 건 어떻습니까? 시현 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준비는 제가 해오겠습니다.”
“울타리도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흠흠. 그것도 준비해 보겠습니다. 준비할 게 많겠군요.”
두 사람은 이미 텃밭을 꾸밀 생각으로 가득했다.
-툭. 툭.
“아빠…….”
“응? 왜 그래?”
“딸기…… 언제 나와?”
“으음.”
은율이는 벌써 딸기를 보고 싶다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였다.
나는 은율이가 너무 실망하지 않을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은율이가 텃밭 일을 잘 도와주고, 그동안 착하게 지내면 금방 딸기가 자랄 거야.”
“응. 알았어.”
마치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위해 착한 아이를 다짐하는 것처럼, 은율이도 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불태웠다.
“이제 들어갈까요? 전부 흙투성인데 먼저 씻어야겠네요.”
나는 은율이를 품에 안은 채, 안드라스와 리아네를 이끌고 농장 건물로 되돌아갔다.
* * *
텃밭에 딸기 모종을 심고 며칠이 지났다.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텃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심히 심은 딸기 모종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시들었기 때문이었다.
리아네도 텃밭의 처참한 상황을 보며 당황했다.
“시현 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내가 모종을 잘못 심은 걸까? 아니면 비료를 너무 많이 줬나? 혹시 텃밭의 흙이 좋지 않았던 걸까?
머릿속에 원인에 대해 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농사라는 게 워낙 복잡한 일이다 보니, 내 미천한 농사 경험으로는 명쾌한 해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옆에서 울먹이는 은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딸기 다 죽어버린 거야?”
“…….”
“열심히 돌봐줬는데…….”
은율이는 며칠 동안 매일같이 텃밭에 나왔다.
정성스럽게 물을 주고, 조금이라도 자라 있으면 엄청나게 기뻐했다.
시들어 있는 딸기들을 보며 실망하는 은율이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리아네 씨, 은율이 농장 건물로 데려가 주실래요? 저는 조금만 있다가 갈게요.”
“알겠습니다. 시현 님.”
리아네는 은율이의 손을 잡고 농장 건물로 되돌아갔다.
가는 길에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아쉬운 마음을 표했다.
혼자 텃밭에 남자 쓸쓸한 고독감이 몰려왔다.
분명히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처참한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니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쪼그려 앉아 생기를 잃은 딸기 모종을 바라봤다.
하아아. 다시 살릴 수는 없겠지?
내가 부족해서 미안하다.
속으로 시들어버린 잎을 향해 사과를 하고 있을 때.
간질거리는 느낌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내가 도와줄까. 뾰?」
“……?”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텃밭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환청인가?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뾰! 여기야, 여기!」
“어?!”
다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다시 한번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전혀 상상하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오른쪽 어깨 위에 아주 작은 크기의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날 찾다니. 생각보다 멍청한 사람이다. 뾰!」
손바닥 안에 들어올 것처럼 작은 몸집, 반투명하고 커다란 두 쌍의 날개, 신비함과 귀여움을 뒤섞어 놓은듯한 존재였다.
“……요정?!”
정말 동화 속에서나 볼법한 요정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계속 멍한 표정을 짓자, 귤색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요정이 다시 한번 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도와줄까, 뾰?」
“도와준다니?”
「저기 시들어 있는 애들 때문에 슬퍼하고 있었잖아, 뾰?」
“으응. 그렇기 한데…….”
요정은 접었던 날개를 펼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시들어 버린 한 딸기 모종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샤라라락!
날아다니는 요정에게서 반짝이는 가루가 뿜어져 나오더니, 날갯짓에 따라 가루들이 딸기 모종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가루들은 아주 천천히 딸기 잎과 줄기로 스며들어 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딸기의 줄기와 잎이 생생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내가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이, 요정은 다시 내 어깨 위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자세를 취하며 물었다.
「마음에 들어, 뾰?」
“대단해!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여기에 있는 식물들은 대지의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뾰! 그래서 내가 기운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뾰!」
“그럼 앞으로도 계속 자랄 수 있는 거야?”
「그건 잘 모르겠다, 뾰! 하지만 한동안은 걱정 없을 거다, 뾰!」
텃밭을 다시 되살릴 방법을 찾은 것 같아 순식간에 얼굴이 밝아졌다.
“여기에 있는 다른 딸기들도 도와줄 수 있어?”
「나 혼자서는 못한다, 뾰! 마을에 있는 친구들이 도와줘야 한다, 뾰!」
기대감을 가지고 조금 더 도와줄 수 있는지 물으려는 순간, 요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고 싶으면 네가 우리를 먼저 도와줘야 한다, 뾰!」
“나보고 도와달라고?”
「그래! 부탁을 들어주면 마을의 친구들도 기꺼이 도와줄 거다, 뾰!」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요정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말했다.
「우리 마을을 망가뜨리는 나쁜 놈들을 혼내줘라, 뾰!」
“으음,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줄래?”
「그 녀석들은 매일 우리 마을에 찾아와서 이곳저곳을 망치고 돌아간다, 뾰! 지금 친구들은 망가진 마을을 힘겹게 복원하고 있다, 뾰!」
요정은 억울함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호소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전투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왜 나한테 부탁을 하는 거야?”
「당연히 덩치 큰 대장님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뾰!」
“덩치 큰 대장님? 그게 누군데?”
「덩치 큰 대장님은 엄청나게 크다, 뾰!」
“그리고?”
「털도 엄청나게 크다, 뾰!」
굉장히 일차원적인 요정의 설명에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다른 특징은 없어?”
「으으으. 아앗! 그리고 엄청 큰 뿔을 가지고 있다, 뾰!」
“큰 뿔? 아! 야쿰?!”
「맞다! 마족들은 그렇게 부른다, 뾰!」
신기하게도 내가 가진 ‘야쿰의 신뢰’ 덕분에 요정이 나에게 접근한 모양이다.
“야쿰이 너희 대장님이야?”
「그렇다, 뾰! 대장님이 있으면 나쁜 마수들이 우리 마을에 얼씬도 못 한다, 뾰!」
요정과 야쿰은 일종의 공생 관계인 것 같았다.
야쿰과 인연이 있다고 하니 또 은근히 가깝게 느껴졌다. 꼭 텃밭 문제가 아니라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한번 해볼게.”
「고맙다, 뾰!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거다, 뾰!」
* * *
나는 요정의 안내에 따라 마을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여기가 우리 마을이다, 뾰!」
요정이 안내한 곳은 넓은 들판에 꽃들이 엄청나게 피어 있는 곳이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 절로 감탄을 흘러나왔다.
이렇게 환상적인 장소가 가까이 있었는데, 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걸까?
나의 머릿속에 의문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바람에 실려 오는 진한 꽃향기에 취해 금방 잊어버렸다.
내가 한창 꽃 구경에 취해 있을 때, 요정의 뾰족한 비명이 들려왔다.
「저기! 저기다, 뾰!」
“어?”
「마을을 망가뜨리는 나쁜 놈이다, 뾰!」
다급한 외침에 나는 황급히 경계하며 둘러봤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있다는 거야?”
「저기! 저기다, 뾰!」
요정이 가리킨 곳에는 마을을 망가뜨리는 흉악한…… 흉악한?
으응??
-부우우웅!
노란색과 검은색 줄무늬의 복슬복슬한 털, 꽃의 꿀을 찾아 흔들리는 토실토실한 엉덩이, 덩치에 비해 앙증맞은 두 날개.
요정이 말한 마을의 흉악한 침입자는…….
“꿀벌?”
아주 귀여운 꿀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