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50화
놀라운 성장(1)
“흥흐흥∼! 흐흥!”
은율이는 내 손을 잡고 좋아하는 노래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신이 난 온몸의 들썩임이 잡은 손을 통해 느껴질 정도였다.
과거에 자신의 마음을 꽁꽁 숨기려는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보통 아이처럼 은율이도 순수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게 됐다.
별것 아닌 것 같은 변화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보호자로서는 그 작은 변화가 너무 소중하고 고마웠다.
아침 일찍 야쿰을 돌보고 식사를 끝내면, 이렇게 은율이와 함께 텃밭으로 향하는 게 새로운 농장의 일과가 됐다.
특히 은율이가 텃밭에 가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항상 같이 놀던 아기 야쿰들이 약간 서운해할 정도였다.
-부우우우웅!
텃밭으로 향하던 길에 꿀벌 한 마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제는 날갯소리마저 익숙해진, 처음 교감을 나눴던 그 꿀벌이었다.
“안녕? 달콩아?”
‘달콤’이라는 단어에서 만들어진 ‘달콩이’라는 이름을 부르자 꿀벌은 내 손바닥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리고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손바닥 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것이 달콩이가 친밀함을 나타내는 인사였다.
“달콩아! 달콩아!”
이번에는 은율이가 두 손을 모아 활짝 펼쳐 보였다. 그러자 달콩이는 은율이의 작은 손 위에서도 똑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손 위에서 느껴지는 간질간질한 느낌에 은율이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달콩이는 우리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더니, 마치 따라오라는 듯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달콩이를 따라 도착한 곳은 텃밭 근처에 만들어 놓은 작은 벌통이었다.
벌통의 입구를 살짝 열어보니 아주 진한 꿀 냄새가 물씬 피어올랐다.
벌통 안에는 꿀벌들이 채워놓은 꿀로 가득 차 있었다.
“와아! 벌써 이만큼이나 모아준 거야?”
-부우웅! 부우웅!
내가 꿀벌들과 교감을 통해 마음의 불안함을 없애준 뒤로, 달콩이를 포함한 꿀벌들이 농장으로 찾아왔다.
꿀벌들은 허락도 없이 농장 건물에 벌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아주 당연하게 카네프의 철거 명령이 떨어졌다.
은혜를 갚기 위해 한 행동이었겠지만.
온종일 붕붕거리는 꿀벌의 날갯소리를 듣는 것은 나조차 그렇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농장 건물이 아닌, 텃밭 근처에 벌통을 따로 만들어 주었다.
꿀벌들은 영리하게 그 행동을 알아보고 벌통에 꿀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꿀벌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작지 않은 벌통이 금방 가득 차버렸다.
조만간 새로운 벌통을 더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달콩아, 고마워!”
-부우웅!
달콩이는 내 주변을 한 바퀴 빙글 돌고는 어디론가 날아갔다.
나는 벌통을 조심스럽게 닫아놓고 다시 은율이와 함께 텃밭으로 향했다.
벌통 굉장히 가까워서 금방 텃밭의 입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귤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요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냐, 뾰!」
요정은 귀엽게 볼을 부풀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하. 미안. 규리야, 중간에 달콩이를 만나서 말이야.”
「흥!」
자기보다 달콩이를 먼저 만났다는 이야기에 요정은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내가 요정에게 지어준 이름은 ‘규리’, 말 그대로 과일 귤에서 따온 이름이다.
특이하게 요정에게는 이름을 붙인다는 개념이 없어서, 내가 그녀에게 따로 이름을 붙여줬다.
조금 대충 만든 감이 있지만, 그래도 규리는 자신의 이름을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토라진 규리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은율이가 먼저 나섰다.
“규리야, 이거 같이 먹을래?”
「그게 뭐냐, 뾰?」
“아빠가 준 사탕이야.”
은율이는 내가 항상 챙기는 과일 사탕을 내보이며 규리의 관심을 끌었다.
토라진 요정의 표정은 금방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변해 사탕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규리는 거의 자신의 머리만 한 사탕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나는 사탕의 끝부분을 살짝 깨트려 작은 조각을 만든 뒤, 규리에게 건넸다.
-할짝!
「왁! 여기서 달콤한 과일 맛이 난다, 뾰!」
처음 사탕을 맛본 요정은 방금까지 자신이 토라졌다는 것도 까먹고, 정신없이 사탕을 핥기 시작했다.
사이좋게 사탕을 나눠 먹는 은율이와 규리를 두고서 텃밭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텃밭은 정말 몰라볼 정도로 크게 변했다.
요정들이 도와준 뒤부터 딸기는 무럭무럭 자라나서 어느덧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그 성장이 빠른지.
아침 먹고 확인했을 때와 점심 먹고 확인했을 때의 변화가 확연히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의 성장세면 조만간 딸기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은 보기 좋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입에 사탕을 문 규리가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시현, 딸기는 언제 더 심어줄 거야, 뾰?」
“으음. 지금 당장은 힘들 것 같은데.”
「안 된다, 뾰!! 더 많은 딸기가 있어야 새로운 영역으로 만들 수 있다, 뾰!」
“끄응…….”
텃밭의 새로운 문제는 요정이 더 많은 딸기를 심기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지금 텃밭 규모와 비교도 되지 않을 크기로.
딸기를 심는 건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것을 관리할 여력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작은 텃밭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요정의 영향으로 잡초도 빨리 자라나서 매일 뽑아줘야 했고, 딸기의 성장도 너무나 빠르다 보니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이 정도 작은 크기의 텃밭을 관리하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규모를 더 늘렸다가는 농장의 다른 일은 손도 댈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계속 규리의 요청을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마을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확실하게 모르지만, 요정에게 있어서는 꽤 중요한 일인 듯했다.
“조금만 참아줘, 규리야.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까.”
「알았다, 뾰! 그럼 시현을 믿고 기다리고 있겠다, 뾰!」
“사탕 더 줄까?”
「헤헤. 고맙다, 뾰!」
새로운 사탕을 꺼내주자 규리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일단 규리를 안심시켜준 뒤에 나는 혼자 생각에 빠져들었다.
더 많은 딸기를 심는다…….
밭을 확장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일손.
머릿속으로 조금씩 그렸던 계획을 떠올리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마차를 탄 나와 리아네가 엘든 마을의 입구에 들어섰다.
마을은 아침부터 상인을 맞이하기 위해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해졌다.
우리는 생기 넘치는 마을의 풍경을 지켜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뭔가 신기하네요. 처음 이 마을에 온 게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이렇게 변하다니.”
“시현 님의 말대로 확실히 달라졌어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활기가 넘치네요.”
달라진 건 마을의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정말 많이 변해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이미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어른들과는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는데.
상인들이 다시 마을을 방문하게 된 시점을 기준으로 그 약간의 거리감마저 사라졌다.
지금은 마주치는 주민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줬고, 눈에는 반가움과 호의가 가득했다.
특히 더 많은 경계를 받았던 리아네에게도 부정적인 시선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시현 님 오셨군요? 리아네 양도 잘 지내셨습니까?”
멀리서 라구스가 우리를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어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라구스 씨. 바쁘신 것 같은데 괜히 방해한 것 같네요.”
“아무리 바빠도 마을의 은인을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죠.”
라구스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상인의 행렬이 마을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번에 봤을 때와 조금 달라진 행렬의 모습에 의문을 표했다.
“어? 평소보다 용병들이 엄청 많은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거기다 장비의 상태를 보아하니 실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라구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상인 행렬을 이끌던 에르긴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달려왔다.
“시현 님! 오랜만에 인사드리겠습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오랜만이에요. 에르긴.”
딸기 거래로 굉장한 이득을 보았기 때문인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정중하면서 친밀감이 넘쳤다.
“근데 오늘은 저번보다 용병이 좀 많은 것 같네요.”
“그게 이래저래 주목을 받게 돼서 안전에 신경을 더 썼습니다. 딸기에 대한 소문이 커지는 바람에 나쁜 마음을 품는 자들이 늘었거든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하하! 이 정도는 충분히 각오 한 일입니다. 그리고 주목받는 만큼 달콤한 이익이 있다는 뜻이니, 상인이 되어서 절대 참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에르긴은 오히려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웃어 보였다.
그의 진실한 모습은 어떤지는 몰라도, 상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진짜인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작은 아가씨와 함께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은율이요? 요즘 새로운 관심사가 생겨서요.”
은율이는 지금 텃밭에서 규리와 놀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엘든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루가 실망하기도 했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작은 아가씨가 좋아할 만한 인형과 장난감을 챙겨왔는데…….”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일단 가져온 딸기 먼저 받으실래요?”
나는 리아네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딸기 상자를 꺼내 에르긴에게 건넸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상자를 받아들고는 찬찬히 딸기의 모습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옆에 있던 직원에게 건네며 지시를 내렸다.
“신선함이 유지될 수 있도록 설계한 짐칸에 빨리 넣으세요. 내용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몇 번이고 확인해야 합니다.”
“네. 에르긴 님.”
딸기 상자 주변에 직원 수십 명이 달려들어 조심스럽게 짐칸으로 향했다.
에르긴은 딸기가 짐칸에 안전하게 보관된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흠흠. 딸기는 잘 전해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제 차례군요.”
그가 손을 튕기자 뒤에서 대기 중이던 직원이 묵직한 자루 두 개를 건넸다.
“이전에 딸기를 판매하고 얻은 이익을 배분했습니다. 대략 8,000골드 정도 됩니다.”
“헉, 8,000골드?!”
옆에서 듣고 있던 라구스가 금액에 놀라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나는 이미 얼마나 비싸게 딸기가 팔렸는지 알고 있었고, 동시에 8,000골드가 얼마나 큰 돈인지 실감이 안 나서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절반은 보석으로, 나머지 절반은 금화로 준비해 드렸습니다. 원하신다면 전부 보석이나 금화로 교환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건네받은 자루 한쪽에는 보석, 나머지 한쪽에는 금화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대충 확인을 끝내고 자루를 리아네에게 건네줬다.
에르긴은 슬슬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현 님,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말씀해 주신다면 최대한 준비해 보겠습니다.”
“따로 더 필요한 건 없고 조금 의논하고 싶은 게 있거든요. 라구스 씨도 같이 이야기 좀 나누시죠.”
“저도 말입니까?”
나는 에르긴과 라구스를 불러모았다.
“다른 게 아니라 딸기에 관해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요.”
“……?”
“……?”
“직접 키우는 딸기밭을 조금 늘려볼까 하거든요. 그래서 두 분에게 조언을 좀 구하려고…….”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에르긴은 눈을 번뜩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투자금? 장비? 거래처? 말씀만 해주세요.”
그는 지금 당장에라도 직접 딸기밭을 매러 갈 기세였다.
“아뇨. 그렇게 거창한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고. 저나 리아네 씨만으로는 딸기밭을 전부 관리할 수 없어서, 일손을 좀 구해볼까 해서요.”
그리고 라구스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어나갔다.
“괜찮으시면 라구스 씨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가능하면 엘든 마을 주민들의 손을 좀 빌리고 싶은데요.”
“저, 저희 마을 사람들을요?”
그는 내 제안에 굉장히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네. 물론 일당은 챙겨드릴 거고요. 가능하다면 밭일에 경험이 있으신 분이 도와주셨으면 좋겠네요.”
“…….”
“시, 시현 님?! 일꾼이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경력도 확실하고 값싼 일꾼들로…….”
“아뇨. 괜찮아요. 저는 엘든 마을 사람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라구스 씨, 어떠세요? 가능할까요?”
“…….”
멍한 표정을 짓던 라구스의 눈동자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라구스 씨?!”
“죄송합니다. 이렇게 저희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신 분은 처음이라…… 조금 감동받았습니다.”
“라구스 씨…….”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게 중요한 일을 저희에게 맡기셔도?”
“물론이죠. 애초에 여기서는 제가 믿고 맡길 만한 분이 없어서.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는 거예요.”
“그렇…… 군요.”
라구스는 빨개진 두 눈에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내게 다짐했다.
“시현 님, 맡겨주세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게 정말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해요. 잘 부탁드릴게요.”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라구스는 굳게 내 손을 맞잡았다.
한편 에르긴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엄청나게 불안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