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55화
농장의 새로운 직원(3)
“베르딕 가문에서 사람을 보낼 줄이야. 그것도 가문의 삼남이라…….”
카네프는 베르딕 가문에서 온 마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옆에 있는 안드라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베르딕 가문이 유명한 가문인가요?”
“그렇습니다. ‘아라크단의 왕좌’를 수호하는 다섯 가문 중의 하나입니다. 저와 발레리안의 가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새삼스럽게 안드라스를 바라봤다.
항상 농장에 오면 구박받는 모습만 봐서 그런지, 그도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이라는 게 순간 신기하게 느껴졌다.
“거기다 베르딕 가문은 뛰어난 검술로 유명합니다. 현재 마왕성의 기사 단장도 베르딕 가문 출신입니다.”
“오…… 그래서 검을 차고 있는 거군요.”
“베르딕 가문의 일원이라면 대부분 검을 몸에서 떨어뜨려 놓지 않으니까요.”
뒤에서 우리가 잡담을 나누는 사이.
베르딕가 마족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카네프에게 건넸다.
“이건 뭐야?”
“할아버님이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윽…… 그 지독한 영감탱이가 나한테?”
“제게는 가문의 큰 어른이십니다. 말씀을 가려주십시오.”
“이 정도면 충분히 가려서 말한 거야.”
대충 대꾸한 카네프는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편지를 읽어내려갈수록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뭔가 굉장히 골치 아픈 일을 떠안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쩐지 마왕성에서 빨리빨리 일을 처리한다 했더니. 가문에서 사고 친 놈을 보내왔네.”
“…….”
“뭐, 어쨌건 베르딕 가문 출신이면 실력은 있을 테니, 호위 임무 정도는 문제없겠지.”
베르딕가 마족은 내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호위 임무가 저 뿔도 없는 남자를 지키라는 겁니까? 거부하겠습니다.”
“뭐?”
“할아버님의 명으로 이곳에 왔지만, 저런 볼품없는 자를 지키기 위해서 검을 들고 싶지 않습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황당한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게 그 유명한 ‘0고백, 1차임’ 같은 느낌인가?
내가 지켜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졸지에 내가 매달린 꼴이 돼버렸다.
어쩐지 처음부터 느낌이 쎄하더라니…….
카네프와 안드라스도 황당한 표정을 짓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행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한때 무적이라 불렸던 당신이 이런 농장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베르딕가 마족의 일갈에 방 안의 분위기가 살짝 싸늘해졌다.
“와…… 깡다구 좋네요. 사장님한테 저런 말을 하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이러다가 큰일이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잘 말려야죠.”
아무리 저 마족이 무례하고, 재수가 없다고 해도, 일단 살려는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나와 안드라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올 폭풍을 대비했다.
“틀린 말은 아니네. 나도 예전에 비하면 훨씬 느긋하게 지내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
“호위 임무도 맡기 싫다는 거지? 그럼 방 하나 내줄 테니까, 거기서 조용히 한 달만 지내다가 돌아가.”
“……?!?!”
이건 또 무슨 일?
예상했던 살벌한 폭풍이 아니라 따스한 훈풍에 어리둥절해졌다.
평소 사장님 성격 같았으면 곧바로 무자비한 쇠사슬을 꺼내 들었어야 정상인데…….
“베르딕가 애송이, 대신 하나만 명심해라. 나에게 함부로 행동하는 건 상관없지만, 다른 농장 식구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마라.”
“…….”
오오. 사장님!
드디어 우리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녀석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는 이 농장에서 나밖에 없으니까. 명심해!”
……그럼 그렇지.
잠시나마 감동할 뻔했던 마음이 곧바로 차게 식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야기는 끝난 것 같으니 나가보겠습니다.”
그는 카네프에게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쌩하고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마지막까지 재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사장님! 저렇게 막 나가고 재수 없는 마족을 여기에 한 달 동안이나 둔다고요? 갑자기 왜 그렇게 너그러워지신 거예요? 뭐 잘못 드셨나.”
“그런 거 아냐! 나도 몇 대 쥐어박고 당장 돌려보내고 싶다고. 하지만 이것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그는 아까 읽던 편지를 손으로 팔랑거렸다.
“아주 예전에 지독한 영감탱이한테 빚을 진 게 있어. 편지에 그걸 들먹이면서 한 달 동안만 저놈을 여기서 맡아달라더군.”
“도대체 그 지독한 영감탱이가 누군데요?”
“베르딕 가문의 전대 가주님이십니다. 카네프 님이 단장직을 맡고 있던 시절에 큰 도움을 받았었죠.”
아무래도 저 편지와 관련해서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듯했다.
“사고를 쳐서 여기에 잠시 보낸 것 같은데. 좀 귀찮겠지만 한 달만 참아. 그 뒤에는 억지로 묶어서라도 내보낼 테니까.”
그 싸가지 없는 마족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카네프의 사정을 무시할 수도 없었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 *
농장의 점심 식사 시간.
가장 상석에 카네프를 중심으로. 오른편에는 나와 은율이, 왼편에는 안드라스가 자리했다.
평소 같았으면 리아네도 함께 식사를 했을 텐데. 원래 그녀의 식사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녀는 베르딕가 마족의 식사 시중을 하러 갔기 때문이었다.
나는 비어 있는 자리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냥 여기서 같이 먹으면 되는데. 꼭 그렇게 방에서 식사해야 하나? 귀족은 원래 다 이런 거예요?”
그 마족이 오고 일주일.
우리는 내부적으로 베르딕가의 마족을 농장의 손님으로 대접하기로 했다.
싫다는 마족을 억지로 일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보다 그 마족의 요구가 지나치게 많고 번거로웠다.
리아네는 세탁이나 방 청소는 물론이고, 식사도 매번 그의 방으로 준비해야 했다.
나에게는 만든 요리의 재료가 마음에 안 든다며 다시 만들게 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수련할 곳을 만든다며 공터의 풀을 깎을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아, 물론 나는 어처구니없는 요구 모두 단칼에 거절했다.
손님으로 대접하는 거지, 상전을 모시겠다고 한 건 아니니까.
불만 가득한 내 모습에 안드라스는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부분 귀족은 평소에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들이라. 오히려 그게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안드라스 씨나 발레리안 씨는 안 그렇잖아요?”
“저희야 뭐. 워낙에 그런 걸 싫어하시는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안드라스는 말끝을 흐리며 카네프 쪽을 바라봤다. 나는 단박에 이해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참아. 한 달 되자마자 바로 쫓아낼 테니까. 너무 선을 넘은 행동을 하면 바로 나한테 보고하고.”
마음에 안 들면 마왕의 전령도 무시해버리는 카네프인데, 이렇게까지 참는 걸 보면 어지간히 큰 빚을 졌나 보다.
“아빠. 나 다 먹었어.”
“으응? 벌써 다 먹었어?”
“응. 나 밖에 놀러 나가도 돼?”
“그래. 대신 너무 멀리 나가면 안 돼. 항상 농장 건물이 보이는 곳까지만 가야 해. 알았지?”
내가 불평을 늘어놓는 사이, 식사를 끝낸 은율이가 먼저 식당을 빠져나갔다.
* * *
-휘익! 휘익!
농장 건물 뒤편의 공터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는 마족.
베르딕 가문의 삼남, ‘엘프리드 리온 베르딕’이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수련을 시작한 지 두 시간.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검을 휘두르던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들고 있던 검을 신경질적으로 땅바닥에 찔러넣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 일부분이 땅바닥에 박혀 들었다.
‘젠장,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없는데…….’
엘프리드가 농장에 온 지 일주일.
이곳에 있는 동안 수련에만 매진했지만,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빨리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감이 그를 더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 만들었다.
‘부족해! 더…… 더…… 검을 휘둘러야 해. 형님들에게 지지 않을 만큼…….’
엘프리드는 지쳐 있는 몸을 이끌고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집착과 불안감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가 다시 수련에 집중하는 사이.
주변으로 작은 발걸음이 조심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로 은율이, 아꿍이, 규리. 호기심 삼총사였다. 그들은 멀리서 엘프리드가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와! 신기하다, 뾰! 검이 너무 빨라서 막 휘어지는 것 같다, 뾰!」
“응응.”
-무우우.
셋은 마치 신기한 공연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허락받지 않은 관람객의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검에 집중하던 엘프리드는 누군가의 접근을 눈치챘다.
그 순간 집중력은 깨져버렸고, 동시에 수련을 방해받았다는 분노와 상실감에 아주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타인의 수련을 함부로 훔쳐보다니! 당장 앞으로 나서라!”
-털썩!
“아얏!”
「꺄아앗!」
날카로운 외침에 놀란 은율이가 비명과 함께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당황한 규리도 날개를 퍼덕이며 주변을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호기심 삼총사를 발견한 엘프리드는 검을 든 채로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격렬했던 수련의 여파로 호흡은 거칠었고, 두 눈에는 살짝 광기가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은 아이들에게 굉장한 공포심으로 다가왔다.
은율이의 눈에 조금씩 눈물이 차올랐다.
겁먹은 은율이를 지키려는 듯, 아꿍이가 앞으로 나섰다.
-무우우우!
“아꿍아…….”
아꿍이는 최대한 몸을 부풀리며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냈다.
물론 위협을 하려는 본인의 생각과는 달리, 굉장히 귀여운 모습이었다.
-우뚝.
그 모습을 본 엘프리드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꿍이는 자신의 위협이 통했다고 생각에 자신감에 차올랐다.
잠시 상대를 살피다가, 엘프리드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무우우우!!!
“아꿍아!”
-챙!
* * *
점심 식사가 끝나고 리아네와 함께 빨래를 널고 있는데. 갑자기 울음기 섞인 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 시현! 큰일 났다, 뾰!」
“갑자기 왜 그래? 무슨일이야?”
「검을 든 마족이…… 은율이가 울어서…… 쓰러졌다, 뾰!」
“뭐, 뭐라고?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규리의 횡설수설한 말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빨리 가야 한다, 뾰!」
“이런…… 리아네 씨 저 다녀올게요.”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일단 다급한 규리를 따라 우리는 빠르게 농장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주저앉아 있는 은율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은율아!”
“아빠!”
은율이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울먹이며 달려왔다.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어디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은율이 몸 곳곳을 살펴봤다.
“은율아, 괜찮아? 혹시 어디 다친 데 없어?”
“훌쩍, 으응. 괜찮아.”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은율이를 품에 꼭 안으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다급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주변을 둘러보자, 이곳이 베르딕가 마족이 수련하던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재수 없는 마족 놈이! 감히 은율이를?!
오늘 딱 걸렸어. 제대로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어.
“시현 님. 시현 님.”
“네?”
“저기…… 저기 베르딕 공자가…….”
“어딨어요?! 그 재수 없는 놈. 오늘 제가 제대로…… 응?”
리아네가 가리킨 곳을 보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무우우우!
“아꿍아……?”
그곳에는 재수 없는 마족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고, 그의 몸 위에 아꿍이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마치 악당을 쓰러뜨린 영웅과 같은 모습이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