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56화
농장의 새로운 직원(4)
“으헉!!”
베르딕가의 마족, 엘프리드가 요란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어요?”
“도대체…… 여긴…….”
엘프리드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아이들은 이미 리아네와 함께 돌아갔고, 주변에는 나와 누워 있는 마족뿐이었다.
옆에 있던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제가 물어보고 싶은데요? 갑자기 쓰러져 계셔서 방금 치료사를 부르려고 하던 참이었거든요.”
“…….”
“다행히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아 보이네요.”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싸늘해진 표정으로 그를 추궁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설마 아이들에게 위협을 가한 건가요?”
“위협을 가한 적 없어! 단지 수련을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를 해주려 했을 뿐이야. 근데 그 악마 같은…….”
“악마 같은?”
“…….”
엘프리드는 황급히 말을 멈췄다.
말은 숨겼을지 몰라도 핼쑥해진 표정까지 숨길 수 없었다.
대놓고 티가 나는 그의 행동에 금방 뭔가를 눈치챘다.
“아꿍아, 아꿍아! 어디 있어? 이리 와봐!”
“자, 잠깐?! 지금 누굴 부르는 거야?!”
그는 크게 당황하며 나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내 목소리는 또렷하게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무우우우!
나의 부름을 알아들은 아꿍이가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엘프리드 쪽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윽?!”
오호? 일이 그렇게 돌아간단 말이지?
나는 악당처럼 사악하게 눈을 빛냈다.
아꿍이를 번쩍 들어 올려 엘프리드 쪽으로 들이밀었다.
“흐아아악?! 하지마! 으아악?!”
엘프리드는 내가 마치 흉기를 들이민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30초 정도 그의 모든 비명 패턴을 듣고 난 후에야 아꿍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그는 비명을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미리 소개해 줄 걸 그랬네.”
“너…… 이 자식…….”
일그러진 그의 표정과는 다르게, 나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걸렸다.
“자∼. 일주일 동안 너무 편하게 쉬었다. 그죠?”
“나는 쉬는 게 아니야! 수련을…….”
“아아.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이런 말 들어보셨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
“일주일 동안 잘 먹었으니. 이제 선배인 저와 함께 빡세게 농장 일 배워볼까요? 신입 씨?”
* * *
남의 약점을 잡아서 이득을 취하거나, 협박하는 행동은 당연히 비겁하고 옳지 않은 행동이다.
그렇지만!
복수를 통해 느껴지는 상쾌함과 달콤함은 그 죄책감마저도 희미하게 만들었다.
“신입! 마구간 청소 좀 해놓을래?”
“창고에 장비들 쌓아둔 거 있지? 그거 다 씻어놓고 햇빛에 말려놔. 하는 김에 창고 정리도 해놓고.”
“농장 앞에 풀이 너무 많이 자랐더라. 풀들 좀 뽑아놔. 울타리 근처도 정리해 놓고. 어디까지 해야 하냐고? 뭘 물어봐 당연히 전부 해야지.”
진짜 빡세게 굴렸다.
평소에 힘든 농장 일부터, 귀찮아서 미뤄둔 일까지. 전부 다 엘프리드에게 맡겼다.
물론 처음에는 내 명령에 반발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작은뿔, 아꿍이.
이 두 녀석만 엘프리드의 근처에 풀어놓으면 모든 게 알아서 해결됐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그를 작은뿔과 아꿍이는 미친 듯이 쫓아다녔고. 얼마 못 가서 금방 항복 의사를 드러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일주일 동안 무시당하며 받았던 서러움이 한 방에 씻겨 내려갔다.
* * *
농장에는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시 평화로운 농장으로 돌아온 것과 함께 몇 가지 달라진 점도 생겨났다.
엘프리드가 농장 식구들과 함께 식사하게 된 것도 변화 중의 하나였다.
처음에는 이런 식사 자리가 굉장히 어색했는데, 지금은 엘프리드도 다른 농장 식구들도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신입. 리아네 씨가 그릇 치우는 것 좀 도와줘.”
“알았어.”
엘프리드는 내 지시에 따라 묵묵히 식탁의 그릇들을 정리했다. 처음 농장에 도착했을 때와 180도 달라진 모습에 안드라스와 카네프는 놀라움을 표했다.
“정말 몰라보게 달라졌군요.”
“너, 애를 얼마나 갈궜길래 저렇게 얌전해진 거야?”
“갈구다니요. 그렇게 심하게 대하지는 않았어요.”
“심하지 않기는. 저번에 야쿰한테 쫓기면서 내지른 비명이 내 방까지 생생하게 들리더라.”
“…….”
조금 양심에 찔렸다.
일주일간 쌓였던 불만을 폭발시켰을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되돌아보니 심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렇게까지 야쿰을 무서워할 줄은 몰랐죠.”
“베르딕 셋째 공자가 유달리 무서워하는 편이긴 해도, 보통의 마족은 대부분 비슷한 반응일 겁니다.”
“야쿰 귀엽지 않아요?”
“너나 귀엽지. 다른 마족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아마 마계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놈은 너뿐일 거다.”
“요즘은 리아네 씨도 많이 가까워졌는데…….”
“리아네 양은 이제 익숙해진 경우에 가깝습니다. 저도 시현 님이 없었다면 그렇게 가까이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두 마족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 마음이 씁쓸해졌다.
정리를 끝낸 엘프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킨 대로 정리 다 끝냈어.”
“으…… 응. 수고했어.”
엘프리드는 마치 다음 할 일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와…….
정말 많이 변하긴 변했구나.
처음 봤을 때 보였던 불안정하고, 금방이라도 끓어오를 것 같던 기세는 사라지고, 지금은 잔잔한 호수처럼 침착하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오늘 오후에는 텃밭을 둘러보러 가볼까.”
카네프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방에 뒹굴거리러 갔고.
리아네는 집안일, 안드라스는 며칠 전부터 작업 중인 보존 마법을 설치를 위해 딸기밭으로 향했다.
나와 엘프리드는 장비를 챙기고 농장 건물을 나섰다.
텃밭으로 걸음을 걷던 중, 반가운 꿀벌 한 마리가 곧장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
엘프리드가 움찔하며 꿀벌을 경계했다.
나는 금방 달콩이를 알아보고 다가서며 손을 뻗었다.
달콩이는 안정적으로 손바닥 위에 내려앉아 인사를 건넸다.
-부우우웅!
“달콩아! 오랜만이다.”
귀엽게 인사하는 달콩이를 나도 반갑게 맞아줬다.
오랜만에 보는 토실토실한 꿀벌 엉덩이를 쓰다듬어주니, 달콩이는 기분 좋은 듯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설마…… 이 꿀벌도 키우는 거냐?”
“아. 달콩이? 키우는 건 아니고. 여러 가지로 도와주는 고마운 친구야. 달콩아, 내 말 맞지?”
-부우웅!
“…….”
꿀벌과 교감하는 나를 보며 엘프리드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교감을 나누던 달콩이가 다시 날아올랐다.
따라오라는 듯 주변을 맴돌다가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엘프리드를 이끌고 달콩이가 날아간 방향으로 따라갔다.
그곳에는 내가 만들어놓은 벌집 상자들이 있었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얘들아, 잠깐만. 벌집 상자 좀 열어볼게.”
내가 주변 넓은 범위에 교감 능력을 사용하자, 상자 안에 있던 꿀벌들이 차례로 빠져나왔다.
상자 안에는 꿀벌들이 채취해 온 벌꿀이 그득그득 채워져 있었다.
다른 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또 이렇게 많이 채워놓은 거야? 너희들 먹을 몫은 남겨두는 거지?”
내 어깨에 내려앉은 달콩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이렇게 꿀을 잔뜩 가져다주고, 딸기밭을 분주히 날아다니며 꽃의 수분도 도와주는 꿀벌들. 정말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번 고마워. 잘 먹을게.”
-부우웅.
“여왕님한테 나 대신 안부 전해줘.”
달콩이는 다른 꿀벌들과 함께 다시 꿀을 찾으러 떠났다.
나는 엘프리드의 도움을 받아 미리 갖춰놓은 장비들로 벌집 상자에서 꿀을 채취했다…… 아니, 꿀은 채밀한다고 하던가?
통에 벌꿀이 가득 담기면서 달콤한 냄새와 꽃향기가 물씬 풍겼다.
꿀벌들이 열심히 모아준 벌꿀을 한 방울까지 소중하게 통에 담았다.
뚜껑을 담은 뒤, 꿀을 옮기는 데 사용했던 주걱을 엘프리드에게 내밀었다.
“이걸 왜 나한테…….”
“맛 좀 보라고. 꽤 많이 남아 있는데 버리면 아깝잖아.”
“…….”
멍하니 바라보던 엘프리드는 조심스럽게 주걱을 입가로 가져갔다.
-할짝…… 할짝! 할짝! 할짝!
한 번 꿀을 맛보더니 보더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신없이 주걱을 핥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벌집 상자 정리를 끝내고 우리는 다시 텃밭으로 향했다.
「어? 시현이다, 뾰!」
「안녕이다, 뾰!」
“안녕, 얘들아.”
텃밭에서 요정들이 나를 발견하고 인사를 걸어왔다.
엘프리드도 농장에 지내면서 규리의 모습을 많이 보아서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딸기밭 잡초 뽑는 법은 저번에 알려줬지? 너는 이쪽 가운데부터 끝까지 하고 있어. 나는 나머지 하고 있을게.”
“알았다.”
엘프리드는 텃밭용 장갑과 모종삽 하나를 들고 내가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어? 겁쟁이 마족이다, 뾰!」
“겁쟁이 마족?”
「저번에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 다니는 걸 봤다, 뾰! 엄청 겁쟁이인 것 같다, 뾰!」
「나도 봤다, 뾰!」
아무래도 아기 야쿰들에게 쫓기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요정들에게 놀림당하는 엘프리드가 안쓰러워서 일부러 다른 화제를 꺼냈다.
“너희들 사탕 먹을래?”
일할 때면 항상 가지고 다니는 과일 사탕을 꺼냈다.
요정들이 먹기 편하도록 손으로 작게 조각내줬다.
「사탕 좋아, 뾰!」
「고맙다, 뾰!」
요정들이 사탕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나도 텃밭 이곳저곳을 움직이며 잡초를 제거했다.
잠시 쉴 때마다 엘프리드 쪽을 살폈다.
그는 어설프지만 쉬지도 않고 꼼꼼하게 잡초를 제거해나갔다.
처음에는 그냥 거만하고 게으른 귀족 집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억지로 시킨 일도 성실히 해나가는 모습에 조금 다르게 보였다.
지금의 인상은 ‘싸가지는 좀 없어도 성실한 녀석’ 정도?
엘프리드가 농장에 계속 있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시현, 시현!」
요정들이 부르는 목소리에 그 생각은 금방 의식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건 뭐야, 뾰?」
“고맙게도 꿀벌들이 가져다준 벌꿀이야.”
통의 뚜껑을 살짝 열어 보여줬다.
그러자 요정들이 흥분해서 모여들었다.
「우리도 시현을 도와줄 수 있다, 뾰!」
「잠깐만 기다려봐, 뾰!」
모여든 요정은 꿀이 담긴 통 위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에서 반짝이는 가루가 꿀 위로 떨어졌다.
반짝이는 가루가 꿀에 천천히 스며들더니.
달콤한 향기가 더욱 진해지고, 기분 좋은 꽃향기가 은은히 퍼져 나왔다.
“고마워. 얘들아.”
「헤헤, 시현이 좋아해 줘서 다행이다, 뾰!」
감사 인사에 요정들은 기뻐하며 내 주변을 날아다녔다. 그러던 중 한 요정이 내 오른쪽 뺨에 뽀뽀했다.
「앗! 시현한테 뽀뽀했다, 뾰!」
「나도 뽀뽀할 거다, 뾰!」
한 요정이 불러일으킨 뽀뽀 열풍은 모든 요정이 나에게 뽀뽀하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질투심 많은 규리가 봤다면 아마 엄청 화를 냈을지도?
텃밭 일을 끝내고. 우리는 요정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농장 건물로 향했다.
엘프리드는 정말 열심히 일했는지, 얼굴과 옷 곳곳에 흙먼지가 가득했다.
“자, 이거 받아.”
“……?”
“아까 텃밭 둘러보면서 잘 익은 딸기만 골라서 담았어. 나중에 씻고 난 다음에 맛 좀 봐.”
텃밭의 딸기가 담긴 작은 자루를 건넸다.
엘프리드는 물끄러미 그 자루를 내려다보더니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줘?”
“아니, 뭐…… 잘해주는 건 아니고. 최근에 너무 힘들게 일을 시켰나 싶어서…….”
내 변명 아닌 변명에 엘프리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실소이긴 해도 농장에서 처음 보는 그의 웃음이었다.
“야쿰이 날 쫓게 해놓고, 즐겁게 지켜보던 사람이 할 걱정은 아닌 것 같은데?”
“…….”
양심이 찔려서 아무런 말도 대답하지 못했다.
내 반응에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린 엘프리드는 딸기 자루를 쓱 낚아채 갔다.
“괜한 걱정하지 마. 딱히 네가 괴롭혀서 그런 것도, 일이 힘들어서 그런 것도 아니니까.”
“……?”
“그저 힘들고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야.”
혼잣말하듯 낮게 읊조리는 그의 얼굴에서 허무함과 동시에 후련한 감정이 느껴졌다.
“딸기는 잘 먹을게.”
엘프리드는 손에 든 딸기 자루를 흔들어 보이며 먼저 걸어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엘프리드라는 녀석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녀석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시간이 흘러 엘프리드가 온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