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57화
농장의 새로운 직원(5)
스스로 너무했다는 생각을 한 뒤로는 엘프리드를 억지로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정말 도움이 꼭 필요한 일에만 그의 손을 빌렸다.
그것만으로도 농장 일이 아주 수월해져서 큰 도움이 됐다.
억지로 일을 시키지 않아서 남는 시간이 꽤 많았는데, 그는 대부분 시간을 멍하니 흘려보냈다.
처음 왔을 때, 미친 듯이 수련에 매달렸던 것과는 꽤 상반된 모습이었다.
엘프리드가 농장 생활에 익숙해진 것만큼, 우리도 그의 존재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생각보다 훨씬 성실했던 탓에, 떠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래저래 시간이 흘러.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엘프리드의 농장 생활이 점점 끝나가고 있었다.
* * *
-쪼르르륵.
예쁜이의 젖에서 꿍유가 흘러나와 통에 담겼다.
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남아 있는 젖의 양을 파악했다. 그에 맞춰서 꿍유를 짜냈다.
이제는 나와 예쁜이 모두 젖 짜는 일에 너무 익숙해졌다.
피곤하지 않도록 빠르게 작업을 마무리하는 건 기본이었고. 그날 젖의 양이나 상태에 따라 예쁜이의 컨디션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자! 끝났다. 예쁜아, 수고했어.”
끝났다는 신호와 함께 배를 두드려주자 예쁜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우우우.
예쁜이는 커다란 머리를 내 쪽으로 들이밀며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였다. 언뜻 보면 애교를 부리는 모습처럼 보여도 조금은 달랐다.
나는 금방 그 차이를 눈치챘지만, 일부러 모른 척 다른 소리를 했다.
“아이구, 오랜만에 애교부리고 싶었어? 그럼 오랜만에 예쁜이랑 놀아줘 볼까.”
-부우우우!
내가 다른 소리를 하자. 예쁜이는 조금 짜증이 난 울음소리를 냈다. 더 장난을 치면 진짜 화를 낼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어. 이제 장난 안 칠게.”
나는 항복 의사를 드러내며 뒷주머니에 챙겨뒀던 딸기를 꺼내 들었다. 그제야 예쁜이 눈에 짜증이 사라졌다.
손바닥에 딸기를 올려 건네주자 금방 입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에는 아쉬운지 혀로 빈 손바닥을 할짝거렸다.
야쿰 모두가 어찌나 딸기를 좋아하는지.
마음 같아서는 모두 배불리 먹이고 싶지만, 아직은 그렇게 많은 딸기를 구할 수 없었다.
조만간 확장한 딸기밭에서 수확이 시작되면 야쿰에게 넉넉히 딸기를 챙겨 줄 생각이었다.
-부우우우.
“허허. 이 녀석 봐? 아까는 빨리 딸기 안 준다고 짜증 내더니. 지금 이렇게 애교부리면 좋아할 것 같아?”
-부우우. 부우우!
아까 짜증 냈던 것을 말하며 짐짓 화난 척을 했다. 그러자 예쁜이는 애교를 있는 대로 다 부리기 시작했다.
조금 얄밉긴 해도 귀여운 걸 어쩌겠는가?
나는 어쩔 수 없이 예쁜이의 애교를 받아주다가 축사를 빠져나왔다.
머리 위에 있던 해가 어느덧 많이 기울어 붉은 기운을 품기 시작했다.
슬슬 퇴근할 준비를 하던 와중에.
멀리서 바위에 혼자 앉아 어딘가를 바라보는 엘프리드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스스럼없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이, 신입! 여기서 뭐 해?”
여러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한 달 동안 가장 많이 부대끼다 보니, 지금은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정도가 됐다.
“…….”
엘프리드는 내 쪽을 바라보고는 마치 ‘너였냐?’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아무것도 없는 들판을 바라봤다.
나는 그의 옆에 슬쩍 걸터앉으며 가볍게 말을 걸었다.
“좋겠네? 내일이 되면 드디어 돌아가는 날 아냐?”
“맞아.”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엄청 돌아가고 싶어 하던 거 아니었어?”
“…….”
엘프리드는 멍한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확실히 그의 표정에서는 전혀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문득 엘프리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떠올렸던 의문을 지금 물어보기로 했다.
“신입, 너 도대체 이 농장에는 왜 온 거야?”
내 질문에 엘프리드의 눈동자가 잠시 선명해졌다.
“왜 왔냐고?”
“그래. 딱 봐도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가문에서 사고를 쳐서 잠시 쫓겨난 거야.”
“사고?”
“진검을 든 대련 중에 자신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입혔거든.”
“으음…….”
“상대는 겨우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나의 처분을 두고 가문에서 말이 많아졌어. 그때 할아버님이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지.”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분위기에 나의 표정도 저절로 굳어졌다.
오히려 엘프리드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솔직히 처음에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거기다 카네프 님을 직접 만날 기회였으니…….”
“사장님? 사장님은 왜?”
“어렸을 적부터 존경하고, 닮고 싶다고 생각한 마족이니까.”
“푸흡!”
사장님이 존경하고, 닮고 싶은 인물이라니!
진지한 분위기임에도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엘프리드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표정을 잠시 일그러뜨렸지만,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반응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나 역시도 지금 카네프 님의 모습은 실망스러우니까.”
“그럼 예전에는 달랐단 말이야?”
“물론이지. ‘무적의 카네프 단장’이라 불리면서, 한때는 전대 마왕님과 동급으로 보는 사람도 많았어. 거기다 흥분한 야쿰 무리를 홀로 되돌려 보낸 일은 지금도 많은 마족이 기억하는 전설이지.”
“오오…….”
엘프리드는 이야기하면서 처음으로 즐거운 표정을 보였다. 정말로 카네프라는 인물을 존경한 모양이었다.
“하아아. 그런데 이런 후미진 농장에서 한량 같은 모습으로 지내고 계실 줄이야. 거기다 볼품없고 맹한 모습의 에스테르까지…….”
“…….”
신랄한 인신공격에 당장 야쿰 삼 남매를 모두 출동시킬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솔직히 네가 받은 에스테르의 지위도 카네프 님의 후광 덕분에 받았다고 생각했었어. 겉모습만 봐서는 도저히 마왕님의 에스테르라고 인정할 수 없었거든. 하지만 이곳에 지내면서 조금씩 그 이유를 알겠더라.”
그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야쿰에게 인정받은 존재가 정말로 있을 줄이야. 야쿰이 귀엽다고 끌어안는 사람은 마계에 너밖에 없을 거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도 당연히 믿어주지도 않을 거고.”
“크흠. 큼.”
뭔가 뿌듯하면서도 민망한 기분에 괜히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정신없이 일하고 나니까 조금씩 보이더라고. 내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고,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뭐…… 지금이라도 잘못된 부분을 깨달았으면 된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나름대로는 정말 죽을 만큼 열심히 했었는데.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것 같아 좀 허무하네.”
허탈한 표정을 짓는 엘프리드.
그동안 미운 정이 들었는지, 그 안쓰러운 모습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축사 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나는 품에 아꿍이를 안은 채 되돌아왔다.
당연히 엘프리드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후다닥 물러섰다.
“뭐, 뭐 하는 거야?”
“이제 좀 익숙해지지 않았어? 한번 쓰다듬어봐.”
“갑자기 왜?”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것 같다며? 이거라도 한번 극복해 봐.”
“그게 무슨…….”
“홀로 야쿰을 막아낸 사장님을 존경했다면서. 그런데 너는 작은 아기 야쿰을 이겨낼 각오도 없는 거야?”
“…….”
엘프리드는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가 아꿍이를 향했다.
-무우우?
그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동자에서 결연한 각오가 엿보였다.
“끄응. 좋아. 쓰다듬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엘프리드는 아주 천천히 아꿍이를 향해 다가왔다.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 서서 천천히 팔을 뻗기 시작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짧은 시간에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해졌다.
결연했던 눈빛이 조금씩 흔들렸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응원이 전해졌는지 그의 손은 다시 아꿍이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엘프리드의 손이 아꿍이의 몸에 닿았다.
그 순간 잠시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그래도 손을 빼거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스으윽. 스으윽.
아주 천천히 쓰다듬는 어색한 손길.
다행히 아꿍이는 손길을 거부하거나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거봐! 별로 안 어렵지?”
-무우우우!
그 짧은 사이에 엘프리드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됐지만, 얼굴에는 해냈다는 성취감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아꿍이는 성공했으니까, 이제 예쁜이를 쓰다듬으러 가볼까?”
“……?!?!”
엘프리드는 기겁하며 고개를 격렬하게 좌우로 저었다. 너무나 정직한 반응에 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농담이야 농담. 자! 이거 받아.”
나는 옆에 놔뒀던 짐에서 꿍유 한 병을 꺼내 엘프리드에게 던졌다.
가볍게 유리병을 받아든 그의 얼굴에 의문이 생겨났다.
“마지막 작별 선물이야. 그동안 수고했어.”
“으…… 응. 고마워.”
“다음에 또 놀러 와. 그때는 정말 손님으로 대접해 줄 테니까. 아!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깍듯하게 선배라고 부르라고. 그럼 나 간다.”
멍한 표정에 엘프리드를 남겨둔 채, 나는 아꿍이와 짐을 챙겨 들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 * *
그날 밤.
엘프리드는 손님방 침대에 누워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까 야쿰을 쓰다듬었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멍한 그의 시선이 탁자로 향했다. 그 위에는 작별 선물로 받은 꿍유 한 병이 올려져 있었다.
엘프리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꿍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잠시 후,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깜짝 놀랐다.
웅혼하면서 뜨끈한 기운이 끊임없이 온몸을 일깨웠다.
그는 넘쳐 오르는 활력을 참을 수 없었다.
곧장 검을 챙겨 들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한동안 수련장으로 사용하던 공터에 도착했다.
맑은 밤하늘에 보름달이 주변을 은은하게 비췄다.
엘프리드는 거의 몇 주 만에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그리운 감촉,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천천히 검을 꺼내 들었다. 달빛에 반사된 검신이 아름답게 빛을 냈다.
마치 처음 검을 잡았을 때처럼, 엘프리드의 마음은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해졌다.
온몸의 근육들이 벌써 기대감으로 움찔거렸다.
-휘이이익!!
검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 흐름에 맞춰 몸의 모든 부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 검을 휘두르는 즐거움.
강해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집착하고, 분노하고, 증오하던 나날 속에서, 엘프리드는 순수하던 시절에 간직했던 즐거움을 모두 잊어버렸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엘프리드는 예전의 즐거움을 하나씩 되찾아가고 있었다.
부드럽던 검의 움직임이 점차 빠르고 격렬해졌다. 그에 맞춰 얼굴의 미소도 점점 진해졌다.
엘프리드는 그동안 쌓아뒀던 감정을 폭발시키듯 격정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숨이 차오르고 온몸이 부서지는 통증이 느껴졌다.
동시에 자신을 가로막는 답답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엘프리드는 껍데기를 깨려는 작은 생명처럼, 온 힘을 다해 모든 것을 내던졌다.
‘아…… 여기까지인가?’
진이 빠져 ‘포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뜻밖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무우우우!
왜일까?
아기 야쿰을 안고서 자신을 응원하던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엘프리드는 다시 이를 꽉 깨물었다.
마지막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온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챙!
자신을 감싸던 주변의 모든 것이 깨어져 나가는 느낌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금 온몸으로 느끼는 이곳이 염원하던 새로운 경지임을 깨닫고, 엘프리드는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하하하!!!”
한동안 공터에는 그의 웃음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 * *
“……너 뭐야?”
“갑자기 뭐냐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니, 네가 왜 아직 여기 있냐고? 오늘 새벽에 떠나는 거 아니었어? 거기다 왜 안 어울리게 존댓말이야?”
“아직 안 떠났으니까 여기 있는 거죠.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때는 깍듯하게 선배로 대우하라면서요.”
“어……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분명 오늘 떠날 거로 생각하고 멋진 이별 장면도 연출했는데, 출근해 보니 아직도 떠나지 않은 그의 모습에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거기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체적인 분위기도 달라 보였다.
귀공자 특유의 딱딱한 분위기에서, 지금은 주변에 여유가 흘러넘쳤다.
여유가 넘치다 못해 약간 능글맞게 보일 정도였다.
어제 내가 준 꿍유가 잘 못 됐나?
분명 신선한 꿍유였을 텐데…….
열심히 헛다리를 짚고 있는 나에게 엘프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 이 농장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카네프 님에게는 벌써 말씀드렸으니 문제없을 거예요.”
“…….”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시현 선배!”
“으…… 응.”
잠시 머릿속에 ‘왜 여기에 남기로 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겨났지만, 시원한 엘프리드의 웃음을 보고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선택을 반가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농장에 새로운 식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