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68화
수확 그리고 보상(5)
따뜻한 커피 향이 방안을 은은히 맴돌았다.
“흐음.”
이기석 본부장은 혼자서 따뜻한 커피 향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쌓이는 업무 때문에 여유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자리지만, 그는 바쁜 와중에도 매일 이렇게 시간을 내어 티타임을 가졌다.
집에서는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실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바쁜 일과 중에 자신을 리프레쉬하게 하고, 일의 효율성을 늘리기 위한 자신만의 생활 루틴이었다.
부하 직원들도 이런 그의 습관을 잘 알기에 웬만해서는 절대 방해하지…….
-콰앙!
“본부장님! 본부장님! 큰일 났습니다.”
“…….”
이기석 본부장의 미간에 급격히 주름이 생겨났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책상 위의 안경을 가져다 썼다.
소중한 휴식시간을 방해한 부하 직원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부하 직원은 그의 목소리에 담긴 은은한 분노를 눈치채고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인페리스 사무실, 그러니까 마족 발레리안에게서 서류가 도착했습니다.”
“또 발레리안?”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발레리안은 말도 잘 통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유연한 태도로 협조해 주던 고마운 존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굵직굵직한 사건에 엮이면서 이기석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그래, 임시현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면서부터였어.’
왠지 이번에도 비슷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커피 향처럼 그를 맴돌았다.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부하 직원이 가져온 서류를 받아들었다.
쭉쭉 서류를 읽어내려가던 그의 눈이 한번 살짝 커졌다.
-그간 임시현 씨가 마계에서 보인 눈부신 활약으로…….
-……그리하여 마왕님께서 임시현 씨에게 새로운 칭호를 내리셨습니다.
‘새로운 칭호라…….’
마계로 넘어간 지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에스테르의 지위를 얻더니, 이번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칭호까지 받았다.
이기석도 마계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계에서 넘어온 존재가 저 정도로 신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몇 번 복잡한 일이 있긴 했어도.
나라를 위해 일하는 공무원으로서 임시현의 활약은 당연히 기껍게 느껴졌다.
‘칭호를 받은 정도면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겠군.’
그다지 큰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자신의 휴식시간을 방해한 부하 직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 생각 없이 서류를 넘기던 중.
머리에 직접 박히듯 한 단어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혹한의 쐐기 마석…….’
그리고 그 앞뒤로 적혀 있는 글들을 확인하자마자 이기석의 눈은 찢어질 정도로 크게 떠졌다.
-임시현 씨에게 혹한의 쐐기 마석 교역 권한을 부여…….
-마왕성의 마석 생산량 1%를 임시현 씨의 소유권으로…….
“이런 미친…….”
이기석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도저히 서류의 내용을 믿을 수 없어서 몇 번이고 똑같은 부분을 다시 읽었다.
“이거 정말 발레리안이 보낸 서류 맞지?”
“네, 확실합니다. 저도 몇 번이나 확인하고 가져오는 겁니다.”
“으으음…….”
그의 머릿속은 수많은 정보와 그에 따른 경우의 수로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엄청난 경험을 자랑하는 그도 지금의 상황을 쉽게 파악하기 힘들 정도였다.
“오늘 내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어…… 오전에는 중요한 일정은 없고요. 오후에는 회의 일정 하나, 길드 재정 안정평가 보고서 직접 확인하신다고 하셨고. 국회의원, 길드 대표님들과 저녁 약속…….”
“모두 캔슬시켜. 당장!”
“네?!”
“지금 그런 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네가 가져온 서류 다른 사람이 보지는 않았겠지?”
“네, 제가 확인해서 바로 보고드리러 온 겁니다.”
“좋아, 그러면 나는 일단 병가 처리하고 퇴근한 거로 해놔. 그리고 너는…… 아니다. 너도 같이 병가 쓰고 나 따라와.”
“…….”
부하 직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의 의지는 중요치 않았다.
이미 이기석의 눈에는 쉽게 막을 수 없는 의지가 철철 흘러넘쳤다.
“저희 그러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디겠어? 서류의 내용을 정확히 확인해 보려면 서류를 보낸 사람에게 직접 물어봐야지.”
“약속도 안 잡았는데 이렇게 바로 가도 될까요?”
이기석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자켓을 입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팔자 좋게 예의 차리고 있을 시간 없어. 그쪽에서 만나줄 때까지 무조건 기다린다.”
“…….”
부하 직원의 직감적으로 굉장히 귀찮은 일에 휘말렸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 * *
-짝. 짝 짝.
“축하드립니다. 시현 씨!”
퇴근하고 인페리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발레리안은 다짜고짜 축하 인사를 보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축하 인사에 대답했다.
“리안 씨도 알고 계셨어요? 뭔가 좀 쑥스럽네요.”
“아마 제가 제일 먼저 알았을 겁니다.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 많지 않았다면 농장으로 찾아가 함께 축하를 드렸을 텐데. 정말 아쉽네요.”
“바쁘신데 당연한 일이죠.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하하하, 안타깝지만 시현 씨와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네요.”
“……?”
“저 말고도 시현 씨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고 싶으신 분이 계시는데. 혹시 만나보시겠습니까?”
발레리안의 말에 나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쪽 세계에서 마계의 일로 축하해 줄 만한 사람은 몇 명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아니면 서예린 정도?
“그분이 누구신데요? 제가 아는 분인가요?”
“직접 만나신 적은 없어도 대화는 나눠보셨을 겁니다. 지난번에 명함을 드렸었는데 기억나시는지요?”
명함? 명함……?! 아!
“기억나요. 백호 길드와 문제가 생겼을 때, 전화로 나서서 해결해 주신 분이죠?”
“맞습니다. 차원관리본부의 이기석 본부장님이십니다. 시현 씨를 직접 만나보고 싶으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분과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때 도움만 받고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드렸는데. 당연히 괜찮죠. 언제 만나고 싶다고 하셨나요?”
반가운 표정으로 약속에 관해 물었다. 발레리안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사실은 근처에서 시현 씨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
“아마 6시간 넘게 기다리셨을 겁니다.”
“엑?!”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라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 * *
“처음 만나 뵙습니다. 차원관리본부의 본부장 자리를 맡은 이기석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임시현이라고 합니다.”
이기석 본부장의 첫 느낌은 생각보다 젊다는 느낌이었다.
보통 고위 공무원의 이미지인 배가 불룩한 중년 아저씨가 아니라, 좀 더 샤프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저…… 리안 씨에게 듣기로 꽤 오래 기다리셨다던데…….”
“발레리안 씨가 말씀해 주신 모양이군요. 부담스럽게 해드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시현 씨도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
이기석은 편안한 목소리로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나로서는 그러기 쉽지 않았다.
훨씬 높은 연배와 지위를 가지신 분이 6시간 동안 기다렸다는데, 당연히 부담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이런 자리에 익숙한 발레리안이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백호 길드와 문제가 생겼을 때 도와주셔서 감사했었습니다.”
“저도 감사 인사를 따로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백호 길드 쪽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서예린에게 전해 듣기로 백호 길드의 싸가지 없는 놈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를 공격한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고, 부주의로 주변에 피해를 준 죄만 인정되어 약식 기소로 벌금형에 그쳤다고…….
“시현 씨께서는 이번에 마왕님께 새로운 칭호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마왕님의 인정을 받은 일이니 당연히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조금씩 대화를 이어나가며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졌을 때쯤, 발레리안이 먼저 운을 띄웠다.
“본부장님, 단순히 축하 인사를 전하러 오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셔도 될 것 같은데요.”
“……?”
발레리안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슬쩍 밑밥을 던졌다.
이기석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아주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짐작하고 계신 것 같군요. 너무 시간을 끄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이기석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순간.
-꼬르르륵…….
내 뱃속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일부러 노린 것처럼 아주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으아! 죄송합니다. 일을 끝내고 오면 항상 배가 많이 고파서…….”
“큭큭큭.”
나는 민망함에 고개를 숙이며 변명했고, 옆에 있던 발레리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불의의 일격으로 이야기를 가로막힌 이기석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제가 너무 성급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괜찮으시다면 저녁 식사를 함께하시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을 것 같군요. 시현 씨는 어떠세요?”
“저도 괜찮습니다.”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자 이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시현 씨, 혹시 중국 음식 좋아하십니까?”
* * *
세 사람은 사무실을 빠져나와 건물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식당까지는 이기석의 차량으로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이기석과 부하 직원이 앞 좌석, 나와 발레리안은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늦은 퇴근 시간에 겹쳐 정체되는 시내를 빠져나와, 차량은 쭉쭉 도로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1시간이 조금 안 되어 도착한 곳은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장식된 호텔 로비의 출입구였다.
내심 당황한 나는 발레리안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중국 음식 먹으러 가는 거 아니었나요?”
“맞아요. 아마 이 호텔에 유명한 중식당이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저희를 그곳으로 데려가려는 모양이네요.”
“제가 생각한 중식당이랑 좀 다른데요. 저는 짜장면 먹을지 짬뽕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고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여기서도 짜장면, 짬뽕 둘 다 판매하니까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중국 음식이라길래 당연히 짜장면, 탕수육, 군만두 세트로 파는 평범한 중국 음식점을 생각했는데. 갑자기 호화로운 호텔로 오게 됐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안은 그런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소리죽여 웃었다.
“도착했으니 내리시죠.”
이기석의 말대로 일단 차에서 내렸다.
앞장서는 그의 뒤를 따라 호텔의 로비로 입장했다.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에 우아한 장식품,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급 호텔의 분위기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내가 이렇게 호화스러운 대접을 받아도 되나 걱정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발레리안이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시현 씨,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안심시켰다.
“인간이든 마족이든, 결국 아쉬운 쪽이 고개를 더 숙이는 겁니다. 저는 시현 씨가 이기석 본부장에게 충분히 대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발레리안 씨…….”
“만약에 이기석 씨가 평범한 중국 음식점으로 시현 씨를 데려왔다면, 제가 절대로 용납 못 했을 겁니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말을 끝낸 발레리안은 특유의 매력적이고 시원한 미소를 보이며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깜빡였다.
나는 엄청나게 감동한 표정으로 발레리안을 바라봤다.
아까 키득거리며 놀릴 때는 솔직히 너무 얄미웠는데, 지금은 누구보다도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발레리안의 조언 덕분에 자신감을 되찾고 당당한 걸음으로 호텔의 내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