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69화
수확 그리고 보상(6)
우리는 이기석을 따라 호텔 상층부의 중식 음식점에 도착했다.
확실히 내가 평소에 이용하던 중국 음식점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황금색과 붉은색 위주의 고급스러운 실내장식에 중국을 연상케 하는 갖가지 문양이 고풍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가게 안쪽에서 남자 직원이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오시는군요.”
“오랜만입니다, 매니저님. 늦게 예약 전화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급하게 중요한 손님을 대접하게 되어서…….”
“아닙니다. 본부장님의 전화라면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야지요. 따라와 주세요.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가게 매니저의 공손한 안내를 받으며 가게 안쪽으로 향했다. 조용한 통로를 지나 아늑한 느낌의 방으로 들어섰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식당의 직원들이 아주 친절한 미소와 함께 테이블에 식사 세팅을 해줬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바로 음식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바로 불러주십시오.”
매니저는 직원들과 함께 조용히 방을 나섰다.
“늦게 예약을 하려다 보니 코스 요리는 제가 미리 주문해 놨습니다. 따로 드시고 싶은 메뉴가 있으시면 추가로 주문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아는 중국 요리가 몇 개 없어서…….”
“급한 게 아니었다면 야경이 좋은 방에서 대접해드릴 수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다음에는 꼭 더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아까 운전하시던 분은 같이 식사 안 하시나요?”
“아! 그 친구는 따로 저녁값을 줘서 다른 식당으로 보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혼자서 다른 식당에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좋은 곳에서 대접받는 건 알겠는데, 왠지 부담스럽고 거북했다.
잠시 후, 차례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채 요리로는 게살 스프가 나왔다.
처음 먹어본 음식인데 부드러운 게살 식감과 향이 너무 좋았다.
뜨끈한 국물이 뱃속에 퍼져나가면서 본격적으로 식욕을 북돋아 줬다.
코스 요리의 첫 음식을 맛봤을 뿐인데, 왜 비싼 가격을 받는지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로 불도장, 상어지느러미찜, 전가복…….
이름만 겨우 들어본 고급 요리들이 줄줄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모두 처음 먹어본 음식인데도 이질감이나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느끼하고 기름지다고만 생각했던 중국 음식에 대한 편견이 한 방에 깨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좋은 음식을 먹으니 집에 계시는 어머니 생각이 났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어머니를 꼭 모시 고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스 요리를 맛본 지 1시간이 다 되어갈 때쯤, 이기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현 씨, 괜찮으시다면 아까 못한 이야기를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크흠, 그럼 다시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사실 오늘 이렇게 시현 씨를 찾아오게 된 큰 이유는 바로 ‘혹한의 쐐기 마석’ 때문입니다.”
또다시 언급된 ‘혹한의 쐐기 마석’.
안드라스에게 어느 정도 설명을 듣긴 했지만, 그것의 대단함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기석이 이렇게 조심스럽게 언급하는 모습을 보면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기석 본부장님. 죄송한데 ‘혹한의 쐐기 마석’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인가요?”
내 질문을 받은 이기석이 놀란 표정으로 발레리안 쪽을 바라봤다.
마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묻는 것 같은 시선에 발레리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혹한의 쐐기 마석’은 마왕님이 지키고 있는 아라크단의 왕좌에서 생산되는 마석입니다. 지구와 마계를 통틀어 가장 희귀하고 귀한 마석이죠.”
“그 가치가 높은 만큼 마왕성에서도 아주 엄격히 취급하기 때문에 구하기 매우 어려운 보물입니다.”
발레리안도 틈틈이 이기석의 설명을 보충했다.
“아주 높은 등급의 아티팩트 제작에 필수적으로 사용되고, 무기나 방어구 제작, 마석 관련 연구에 귀중한 연구 재료로도 사용됩니다.”
“으음. 생각보다 쓸모가 많네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많은 수요량에 비해 공급량은 압도적으로 모자랍니다. 그래서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에서도 항상 ‘혹한의 쐐기 마석’을 선점하려고 안달이 나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 슬슬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아주 희귀하고 활용도가 높은 ‘혹한의 쐐기 마석’. 모든 나라에서 공급량이 부족해 허덕이는 상황인데, 그 마석의 교역 권한을 덜컥 내가 가지게 됐다.
간단히 바꿔 말해 가장 중요한 칼자루를 내가 쥐고 있는 셈이었다.
이기석의 목소리가 더 간절해졌다.
“시현 씨의 교역 권한과 1% 소유권 소식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모든 나라에서 어떻게든 시현 씨를 끌어들이려고 접근할 겁니다.”
“제가 인정받은 소유권은 겨우 1% 정도인데, 큰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요?”
내 질문의 대답은 발레리안 쪽에서 흘러나왔다.
“마왕성에서 생산하는 양의 1%입니다. 지구에 공급되는 마석이 전체의 15∼25%인 것을 생각하면 절대 적은 수치가 아닙니다.”
“발레리안 씨의 말이 맞습니다. 이 문제에 가장 민감한 미국과 중국이라면 그 1%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을 겁니다.”
“으음, 그건 조금 무서운 이야기네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제가 특수 요원에게 납치당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이야기에 옆에 있던 발레리안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시현 씨에 대한 어떤 위협 행위도 저희 쪽에서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시현 씨는 전혀 그런 걱정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리안 씨.”
발레리안이 너무 정색하면서 대답하니, 고마운 걸 떠나서 살짝 뻘쭘한 기분이 들었다.
이기석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끊어졌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갔다.
“시현 씨, 혹시 소유권을 가지게 된 마석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생각해 두신 방향이 있으십니까?”
나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당장 오늘 아침에 출근할 때만 해도 그런 마석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구체적인 계획이나 방향성을 세워뒀을 리 없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생각하는 방안들에 대해서 들어보시겠습니까?”
“네, 들어보겠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세 가지 정도의 선택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업과 거래를 하는 방법입니다. 금전적으로 많은 이득을 취하고 싶으시다면 이게 가장 깔끔한 방법입니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 그 ‘혹한의 쐐기 마석’이라는 게 얼마나 비싼가요?”
이기석은 머릿속으로 잠시 계산을 하더니 담담하게 답변을 내놨다.
“시현 씨가 가진 양이라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수백억 규모는 될 겁니다.”
“…….”
“워낙 거래되는 양이 적어서 정확한 가격을 추정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가격은 비슷할 겁니다.”
말 그대로 억 소리가 나는 금액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놀라운 금액을 들으니 마석의 가치가 마음속 깊이 와닿았다.
“두 번째는 국가와 거래하는 방법입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도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금전적인 이득보다는, 국가에서만 제공해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혜택이 핵심입니다. 마지막은 마석을 직접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직접 사용한다고요?”
“네. 기술자를 고용해 마석을 아티팩트로 만들거나, 방어구 또는 무기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과정은 다소 복잡하겠지만, 잠재적인 가치를 키워보시겠다면 이 방법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의 설명을 끝까지 듣고 나니 오히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서민 경제에 익숙한 나로서는 과하게 커다란 액수였고, 모든 면에서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저 농장에서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커지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의 복잡한 표정을 본 이기석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시현 씨가 한국에서 마석의 거래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해주신다면 이 나라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물론 다른 국가와의 거래가 시현 씨에게 더 큰 이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도 최선을 다해 많은 혜택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흐음…….”
그의 진심이 담긴 부탁에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물론 많은 이득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발레리안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자신의 생각을 말해줬다.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하세요. 다만 시현 씨께서 한국에 계속 남으실 생각이라면, 이기석 씨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발레리안의 긍정적인 의견에 이기석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리고 꼭 한꺼번에 마석을 처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를 들면 일단 절반의 분량은 남겨두시고 나머지만 내놓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의 현실적인 조언에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이나마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이기석 본부장님, 어떤 혜택을 주실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 있나요?”
“물론입니다.”
이기석 본부장은 내 요청에 따라 자신이 해줄 수 있는 혜택들에 관해서 설명했다.
공식적으로는 가족까지 혜택을 볼 수 있는 의료, 복지, 연금 혜택을 강조했고.
비공식적으로는 마석 판매처에 대한 정보 제공, 신변 보호를 위한 정보기관의 협조, 그리고 이기석 자신의 인맥으로 지원할 수 있는 최대한을 약속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세금에 관한 제안이었다.
“원래라면 시현 씨가 마계에서 마석을 가져와 판매하게 되면, 공식적으로는 꽤 높은 관세에 소득세까지 추가로 포함됩니다. 이것을 최대한 낮춰드리겠습니다.”
“어…… 그럼 탈세 아닌가요? 불법적인 일은 좀…….”
내가 탈세를 언급하며 거부감을 드러내자 이기석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절대 불법은 아닙니다. 일종의 편법을 이용해 세율을 낮추는 회피 방법입니다. 시현 씨는 워낙 특별한 케이스라 아직 이런 쪽의 세법과 제도가 미흡합니다. 그래서 생길 수 있는 손해를 막아드리겠다는 겁니다.”
“으음…….”
“이런 방식으로 뛰어난 각성자나, 계약자를 잡아두는 방식은 이미 여러 나라에서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암묵적인 면책권을 주는 곳도 있다고 하더군요.”
허어…… 면책권이라니…….
놀란 표정의 나와는 달리 발레리안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이런 쪽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불법적인 방법을 이용해서 더 큰 이득을 드릴 수도 있지만, 저 역시 그런 제안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최대한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
이기석은 할 말을 다 끝냈는지 평온한 모습으로 침묵을 지켰다. 아마도 나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발레리안도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나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식사가 끝나고 마지막 후식이 나올 때까지, 섣불리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후식으로 나온 예쁜 접시에 담긴 과일들과 아이스크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기석 본부장님.”
“예, 시현 씨.”
“일단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저, 정말입니까?”
“대신 제 소유권으로 인정된 물량의 30%! 그 정도만 제공해 드릴게요. 나머지 물량의 처분은 나중에 따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30%라는 조건에 이기석의 얼굴에 살짝 실망감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만면에 밝은 웃음을 띠며 나의 선택을 환영했다.
“감사합니다. 그 선택이 절대 후회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차가웠던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발레리안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살짝 속삭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선택을 하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리안 씨.”
어려운 선택을 끝마쳐서 그런지, 후식으로 나온 과일과 아이스크림이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 시현 씨, 추가로 제안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
“혹시 길드에 가입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길드요?”
내가 생뚱맞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짓자 이기석이 추가로 설명을 덧붙였다.
“시현 씨가 서류상으로는 아직 무직 상태인 거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괜찮아도 나중에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공식적으로는 백수였지.
백수라는 자각과 함께, 지난번 대출할 때 고생했던 일이 떠올랐다.
돈을 벌고 있어도 계속 백수라는 점이 솔직히 마음에 걸리긴 했다.
“아무래도 길드원이라는 신분이 있으면 서류상으로는 일을 처리하는 데 훨씬 수월합니다.”
“그렇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아는 길드에 조건 없이 가입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면 혹시 친분이 있는 길드가 따로 있으십니까?”
친분이 있는 길드라…….
이기석의 물음에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우리 집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여성 각성자.
걔가 소속된 길드의 이름이 아마 가디언즈 길드였지?
길드에 들어간다면 아무래도 잘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이 좋을 것 같았다.
“가디언즈 길드는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