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87화
마계농장 야유회(4)
우리가 엘프리드를 따돌렸다고?
나는 굉장히 당황한 표정으로 엘프리드를 바라봤다.
취하긴 했어도 그의 눈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슬쩍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펴봤다.
안드라스와 리아네도 당황해서 허둥거리고 있었다.
서로 무언의 시선을 주고받으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따돌림에 대해서는 전혀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우리 중에 다른 사람을 괴롭힐 만한 사람이……?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의심의 눈초리가 자신에게 모여들자 카네프는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아주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의 결백함을 우리에게 어필했다.
답답함까지 느껴지는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카네프도 전혀 짚이는 부분이 없는 듯했다.
모두가 따돌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어쩔 수 없이 엘프리드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총대를 메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엘프리드? 우리가 너를 따돌렸다는 게 무슨 말이야?”
“말로는 같은 식구라고 하지만, 저는 식구처럼 대해주지 않잖아요?”
“……?”
“모두 아직 저를 손님처럼 생각하는 거 알고 있어요. 진짜 식구라면 그렇게 부르지 않을 테니까요.”
엘프리드의 이야기에 안드라스와 리아네가 몸을 움찔 떨었다.
나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베르딕 공자’라고 불렀습니다. 귀족 가문 간에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를 따랐습니다.”
“저도 ‘공자님’이라고 불렀어요.”
“으음…….”
확실히 친근감이 느껴지는 호칭은 아니었다. 엘프리드의 말대로 손님을 대하는 쪽에 가까웠다.
“하, 하지만 딱히 나쁜 의도로 그렇게 부른 게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호칭이었고, 그 외에 어떻게 불러야 할지 잘 몰라서…….”
“저도 마찬가지예요. 불편하게 생각하실 줄은 몰랐어요.”
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하며 변명했다.
그들도 엘프리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전혀 모른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카네프를 바라봤다. 그는 뻘쭘한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어…… 나는 애초에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는데?”
“하아…….”
으아아!
이러면 진짜 따돌림을 한 것 같잖아?!
엘프리드가 농장에 잘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농장에 있을 때는 무리 없이 지내는 듯 보였으니까. 그래서 내가 없을 때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서로 어색함이 많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세 사람에게 살짝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모두 잘못을 아는지 황급히 내 눈길을 피했다.
“근데 나는 아니지 않아? 나랑은 친하게 지냈잖아?”
“선배한테도 서운한 점이 있어요.”
“나한테?”
“검술 수련을 도와드리려고 해도, 매번 싫어하면서 도망가려고만 하시잖아요.”
“야이씨! 그건 따돌리는 게 아니라 검술 수련이 너무 빡세니까 그런 거지!”
“저는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저번에는 아끼는 검도 빌려드렸는데…….”
“으윽…….”
서운한 듯 중얼거리는 모습에 나도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우리들의 반응을 본 엘프리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축 처진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처음 농장에 와서 제가 무례하게 행동한 건 후회하고 있어요. 변명처럼 들리실진 몰라도, 그때의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제 실수로 가문에서 쫓겨나고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곳에 왔으니까요.”
그의 진솔한 이야기에 모두가 숨죽이고 집중했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힘들게 농장일을 하면서 뭐가 문제인지 깨달았어요. 아마 시현 선배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수도 있었겠죠.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으…… 음.”
솔직히 엘프리드를 골려주려는 나쁜 의도로 했던 일이기에 고맙다는 말이 조금 껄끄러웠다.
엘프리드의 진심이 느껴져서 더욱 그랬다.
“많이 늦었지만, 무례한 행동들에 대해서 사죄할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엘프리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술에 반쯤 취해서 꺼낸 이야기 일지라도, 진심 가득한 그의 속 이야기에 모두 놀란 듯 보였다.
모두가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이번에도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은율이였다.
은율이는 옆에 있던 의자에 올라서더니, 고개 숙인 엘프리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
상황을 제대로 아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기소침한 엘프리드를 위로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엘프리드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은율이의 환한 미소를 보고 그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너…… 정말로 외로웠었구나…….
이렇게 말을 꺼내기 전까지 혼자 끙끙댔을 모습을 상상하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옛날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이미 전부 잊어버렸으니까.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렇죠?”
“물론입니다. 과거의 모습보다는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가 중요하죠.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시현 님 말대로 전부 잊었어요. 평소에도 열심히 농장일을 도와주시는 모습 보기 좋다고 생각했어요.”
“너희들 엄청 무르구나? 나는 아직도 눈앞에서 퇴물 취급한 걸 똑똑히 기억…….”
“사장님은 말하지 말고 맥주나 드세요!”
사장님의 쓸데없는 한마디를 빠르게 차단했다.
덕분에 굳어 있던 엘프리드의 표정에 조금씩 웃음이 스며들었다.
“이렇게 말 나온 김에 엘프리드의 호칭을 정리하는 게 어떨까요?”
“그게 좋겠습니다.”
“어떻게 불러드리는 게 좋을까요?”
새로운 호칭이라…….
제일 무난한 건 공자님 호칭을 빼고 이름을 부르는 거려나?
“저…… 괜찮으시면 ‘엘린’이라고 불러주실래요?”
“엘린?”
“네, 어렸을 적에 가족들끼리 사용하던 애칭이에요.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엘린…… 엘린…… 나쁘지 않은데?
확실히 엘프리드 공자님보다는 친근한 느낌이야.
“그럼 앞으로 ‘엘린’이라고 부르기로 하죠. 앞으로 잘 부탁해, 엘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엘린 군.”
“잘 부탁드릴게요, 엘린 님.”
“엘프리드 보다는 부르기 편해서 좋네. 잘 부탁한다.”
모두에게 인사를 받은 엘프리드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도, 나도!”
은율이도 손을 번쩍 들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잘 부탁해, 엘린 오빠!”
마지막 인사까지 들은 엘프리드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동시에 지금껏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잘 부탁해.”
“응! 앞으로 나랑 많이 놀아줘야 해.”
“물론이지.”
“헤헷!”
은율이와 약속을 하고 다시 시선을 우리 쪽으로 보냈다.
“다른 분들도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엘프리드의 인사와 함께 야유회는 다시 떠들썩해졌다.
* * *
“농장에 따로 작업실을 만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작업실이요?”
“네, 몇 가지 도구와 환경만 있으면, 농장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제가 직접 만들 수 있습니다.”
농장을 개선하기 위한 의견으로 안드라스가 작업실을 만들 것을 건의했다.
“굳이 작업실까지 필요할까요?”
나의 회의적인 태도에 안드라스는 다시 설명충 모드가 되어 이야기를 쏟아냈다.
“무슨 말씀을! 작업실만 있으면 정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농장에서 사용하는 대부분 장비를 손볼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 새롭게 딸기잼 공방을 계획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분명 거기에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으음…….”
“그리고 작업실에 필요한 비용은 제가 다 부담하겠습니다.”
비용까지 모두 부담하겠다는 적극적인 모습에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어떤 것 같으세요?”
“그냥 마법사단에서 못하는 딴짓을 여기서 하려는 것 같은데…… 아냐?”
“저, 절대 아닙니다. 전부 농장의 발전을 위해서 건의하는 겁니다.”
잠시 의심을 보내던 카네프는 맥주를 홀짝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저놈이 뺀질거리지만 않는다면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하겠지.”
“어떻습니까, 시현 님?”
카네프까지 저렇게 말할 정도면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안드라스 씨를 믿고 진행해 보도록 하죠.”
“하하하!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안드라스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작업실 만드는 김에 수련장도 만들죠?”
“수련장은 왜? 공터에서 하는 거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죠! 더 제대로 된 환경이 필요하다고요.”
엘프리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저랑 수련하기 싫으신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끄응, 알았어. 수련장 만드는 것도 생각해 보자.”
내 약속을 듣고 나서야 엘프리드는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차라리 이렇게 된 김에 축사도 더 늘려볼까?
초롱이도 출산하고 나면 새로운 아가들 보금자리도 필요할 텐데.
그러고 보니 딸기밭의 저장고도 더 지어야 하네. 으으…… 딸기잼 공방도 준비해야 하고…….
갑자기 여러 가지 일 생각이 떠오르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에이! 복잡한 일 생각은 나중에 하자!
나는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며 어지러운 머릿속을 비워냈다.
“시현, 나도 개선했으면 좋겠는 일이 있는데?”
“뭔데요, 사장님?”
“앞으로 물건 들여올 때, 가능하면 맥주도 좀 같이…….”
카네프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맥주 이야기를 꺼냈다.
어지간히 맥주가 마음에 들었는지 평소 같지 않은 신중한 모습이었다.
“그 정도는 뭐…… 다음부터는 적당히 맥주도 가져올게요.”
“뭐야? 왜 이렇게 쉽게 허락해?”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네프는 오히려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일터에 술을 가져오는 게 싫은 것도 있었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왠지 사장님은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심하게 부리실 것 같아서…….”
“나를 뭐로 보고!”
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내가 성격이 지랄 같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어도, 주도(酒道)에 관해서는 항상 깔끔했다고!”
“그러게요. 정말 놀랍네요.”
깔끔한 주도도 놀랍지만.
본인의 성격이 지랄 같다는 걸 아시는 것도 참 놀랍네요.
“그럼 앞으로 계속 맥주 마실 수 있는 거지?”
“네. 대신 아무 때나 막 드시면 안 돼요? 일과가 끝나고 저녁에만 드셔야 해요?”
“물론이지! 걱정하지 마.”
카네프는 맥주를 얻어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자신감 넘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견을 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조용히 있는 리아네에게 시선을 돌렸다.
“리아네 씨는 따로 원하는 거 없어요?”
“저요? 음…… 저는 없어요.”
“그런가요? 나중에라도 필요하신 게 있으면 꼭 말해주세요.”
“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시현 님.”
테이블 위에 준비됐던 음식들이 줄어들고, 야유회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었다.
“이제 슬슬 음식도 떨어져 가는 것 같으니까, 마지막으로 모두 건배 한번 할까요?”
“그거 좋지! 모두 잔 들어!”
나의 제안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캔맥주를 높게 들어 올렸다.
“으으…… 히잉…….”
은율이도 같이 건배가 하고 싶었는지, 과일 쥬스를 머리 위로 끙끙대며 들어 올렸다.
나는 웃으며 나머지 한쪽 팔로 은율이를 안아 올렸다.
그제야 은율이의 잔도 높게 들어 올려졌다.
농장의 책임자인 카네프가 건배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오히려 내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농장의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으음?
이거 내가 건배사를 해야 하는 분위기인가?
눈치껏 분위기를 파악하고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 일단 오늘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으음…… 농장에서 여러분과 많은 시간을 함께한 건 아니지만, 모두 의미 있는 날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가면서 찬찬히 모두와 눈을 마주쳤다.
형식적이고 재미없는 건배사지만, 모두가 내 말에 집중해서 들어줬다.
그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다음에 또 이런 즐거운 자리를 기대하면서…… 농장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모두 즐겁게 외치며 건배를 함께했다.
3개의 캔맥주와 2개의 과일 주스가 경쾌하게 맞부딪쳤다.
“꺄하하하!”
은율이는 처음 해보는 건배가 재미있었는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남은 맥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있을 때, 옆에서 엘프리드의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내 맥주 어디 갔지?”
그의 손에는 과일 주스가 들려 있었다.
은율이의 손에 아직 과일 주스가 남아 있으니, 나머지 과일 주스를 마시던 사람은…… 리아네 씨?
-꿀꺽꿀꺽!
내 시선에 리아네가 시원하게 캔맥주를 원샷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와아! 맥주 굉장히 잘 마시네.
저렇게 좋아하시면서 왜 참고 있으셨던 거지?
깔끔하게 캔맥주를 비워낸 그녀.
눈을 감고 있는 리아네의 표정에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를 감싸는 분위기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리아네 씨?”
“…….”
“리아네 씨……?”
“뭘 쳐다봐?”
“……?”
“술 마시는 용마족 처음 봐?”
“……?!”
날 선 태도와 시선.
그리고 그 안에서 전해지는 끓어오르는 듯한 감정.
평소에 차분한 리아네의 모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맛있는 걸 참고 있었다니…… 멍청한 녀석!”
-콰직!
리아네는 빈 맥주캔을 한 손으로 무참히 찌그러뜨렸다.
넘쳐흐르는 박력에 보고 있던 내가 움찔할 정도였다.
가끔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던 난폭한 기운에 완전히 동화된 것 같았다.
반쯤은 농담으로 지칭했던 리아네 누님이 진짜로 나타난 느낌?
리아네는 찌그러뜨린 맥주캔을 대충 털어버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이봐, 거기 너!”
“네?”
“그래, 아까 나한테 원하는 게 없냐고 물었지?”
“그랬…… 죠.”
그녀의 미소가 점점 의미심장 해졌다.
“야유회…… 이렇게 끝나면 너무 심심하지 않겠어?”
“……?”
아무래도 야유회는 쉽게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