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91화
딸기밭의 불청객(1)
-슥. 슥슥. 슥!
방 안에 사각사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의 주인공인 은율이는 흰 종이 위에 연필을 열심히 움직였다.
오늘은 안드라스가 주관하는 받아쓰기 시험이 있는 날.
이 시험을 위해 은율이는 최근에 노는 시간도 줄여가며 공부에 열중했다.
본인은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거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나와 안드라스의 얼굴에는 훈훈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어려운 문제를 보면 여우 귀를 축 늘어뜨리고, 그러다 뭔가를 알아내면 다시 귀를 쫑긋! 세웠다.
귀만 지켜보고 있어도 시험의 난이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은율이가 어떤 성적을 받든 상관이 없었다.
물론 좋은 성적을 받으면 기쁘겠지만.
그보다 본인이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어 보람을 느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은율이는 끝까지 답을 쓰고 연필을 내려놨다.
“다 했어.”
“그럼 확인해 보겠습니다.”
안드라스는 책상 위의 시험지를 가져가 정답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은율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안드라스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내가 시험을 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나도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안드라스는 한참 동안 조용히 시험지를 확인하더니,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오! 대단합니다. 제가 낸 문제를 전부 맞히셨군요.”
“정말?”
은율이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만점입니다. 어려운 문제도 몇 개 있었는데 모두 정답입니다. 정말 잘했습니다.”
“와아!”
은율이는 두 손을 번쩍 들며 크게 기뻐했다.
그러고는 만점을 받은 시험지를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곧장 나에게로 달려왔다.
“아빠, 아빠! 나 만점 받았어. 잘했지?”
작은 여우 소녀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빨리 칭찬해 줘’라는 눈빛을 마구마구 보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양손으로 번쩍 안아 올렸다.
“오구구, 우리 은율이는 정말 대단하네?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정말 천재야, 천재!”
“에헤헤.”
은율이는 칭찬 세례를 부끄러워하면서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래도 얼굴에서는 기쁨의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자∼! 공부를 가르쳐준 선생님한테도 감사하다고 인사해야지.”
“응!”
나는 은율이를 다시 바닥에 내려줬다. 쪼르르 안드라스 앞으로 가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제가 감사받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수업을 열심히 들어줘서 제가 더 고맙죠.”
“아니야, 선생님이 잘 가르쳐줘서 만점 받을 수 있었어.”
“하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니 정말 기쁩니다.”
안드라스는 커다란 손을 들어 사랑스러운 제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줬다.
은율이도 자연스럽게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나 리아네 언니한테 다녀올게.”
은율이는 우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방을 뛰쳐나갔다.
빨리 만점 받은 시험지를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안드라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은율이…… 정말 많이 변했네요.”
“그렇죠. 정말 많이 변했어요.”
상처 입은 채 나에게 발견되어 처음 농장으로 왔을 때, 이런 관계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두컴컴했던 창고에서 은율이가 처음으로 마음에 문을 열어주고. 점차 끈끈해졌던 관계가 지금에 이르렀다.
이 농장에서…… 아니,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
그리고 이제 은율이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농장 식구들의 마음속에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안드라스 씨도 많이 변하셨어요.”
“제가 말입니까?”
“네! 처음 만났을 때는 약간 어두운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느낌이 없거든요.”
“그러고 보니 시현 님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군요. 굉장히 놀라셨었죠.”
아아…… 생각난다.
안드라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의 첫인상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마족에 대한 내성이 별로 없을 때여서. 커다란 덩치에 어두운 분위기가 꽤 무섭게 다가왔다.
겉모습과 다른 속내를 안 지금은 그때의 오해가 미안할 정도였다.
“그리고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것도 굉장히 민망해하셨잖아요?”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거창한 호칭이라 느꼈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많이 기뻐하시던데요?”
그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티가 났습니까? 생각보다 가르치는 일이 즐겁더군요.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보람도 많이 느꼈습니다.”
“그 마음 잘 알죠.”
“생각보다 이런 일이 적성에 맞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도 잘 가르쳐 주셨잖아요. 만약에 선생님이 되셨다면, 아주 좋은 선생님이 되셨을 거예요.”
나의 칭찬에 그는 쑥스러운 듯 손을 내저었다.
둘이서 정답게 대화를 나누던 그때.
-삐이익! 삐이익!
날카로운 경고음이 안드라스에게서 흘러나왔다.
“뭐, 뭐죠?”
“제가 딸기밭 저장고에 설치한 침입자 경보 알람입니다.”
“경보 알람이요?”
“네. 그런데 이상하군요. 지금은 한창 수인 마을 분들이 일하고 있으실 시간인데…….”
그의 말대로 지금은 수인들이 딸기에서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저장고에 침입자가?
“혹시 오작동일 수도 있으니, 제가 직접 확인하러 다녀와야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요. 어차피 은율이 시험이 끝나면 딸기밭에 가려고 했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내려가 보죠.”
우리는 딸기밭으로 가기 위해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 *
딸기밭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규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와! 시현이랑 덩치 큰 마족이다, 뾰!」
“안녕, 규리야. 혹시 딸기밭에 이상한 일 없었어?”
「이상한 일, 뾰? 앗!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엄청 시끄러웠다, 뾰!」
“시끄러웠다고?”
「응응! 누가 싸우는 것 같았다, 뾰!」
잠시 규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멀지 않은 곳에서 잔뜩 화가 난 고함이 들려왔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이 목소리는…… 레빌 아저씨 목소리잖아?
나는 그의 목소리를 따라 급하게 움직였다. 안드라스도 내 뒤를 따랐다.
급하게 뛰어간 곳에는 레빌이 누군가의 멱살을 양손으로 잡아 거칠게 휘두르고 있었다.
“레빌 아저씨?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시현 왔구나.”
“네, 딸기 저장고에 침입자 경보 알람이 울려서 급하게 내려왔어요.”
“으음…….”
레빌은 내 눈치를 보며 일단 화를 억눌렀다.
평소 같았으면 반갑게 인사했을 수인들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쭈뼛거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경보 알람의 오작동은 아닌듯했다.
“오호! 저분이 딸기밭의 주인이신가 보군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레빌에게 멱살을 잡혀 있던 고양이 수인이 살갑게 인사했다.
같은 고양이 수인인 레빌에 비해 좀 더 날렵하고 호리호리한 모습이었다.
딸기밭에 일을 나오는 수인의 얼굴은 다 알고 있는데, 그는 완전히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정중한 인사에 나도 답을 하려는데, 레빌이 다시 한번 거칠게 그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시현에게 허튼수작 부리지 마, 데릭!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야!!”
그는 극도로 흥분하며 ‘데릭’이라는 이름의 수인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릭은 오히려 능청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아! 정말 오해라니까요. 레빌 형님, 왜 이렇게 흥분하고 그러세요.”
“흥분 안 하게 생겼어? 일하러 왔다는 녀석이 왜 딸기 저장고에 얼쩡거려?”
“그냥 궁금해서 둘러봤다니까요.”
“내가 너의 꿍꿍이를 모를 것 같아? 딸기를 훔치러 온 거잖아?”
“큭큭, 증거 있어요? 증거 있냐고요?”
“이 미친 새끼!”
흥분한 레빌이 주먹을 들자 주변에 있던 수인들이 우르르 그를 에워쌌다.
“레빌, 진정 좀 하게.”
“시현 님도 계시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저 자식, 수작 부리는 거 못 보셨습니까?”
“알았으니까, 일단 말로 해, 말로!”
수인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레빌은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 반면에 데릭은 여유롭게 웃으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저장고의 경보 알람이 울린 이유는 저 ‘데릭’이라는 수인 때문인 것 같았다.
“시현 님,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포코 영감님!”
포코 영감이 내게 다가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영감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오늘 처음 딸기밭에 온 녀석이 저장고의 입구를 건드린 모양입니다. 자기 말로는 호기심에 열어보려고 했답니다.”
“괜찮습니다, 뭐…… 실수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저 ‘데릭’이라는 분은 못 보던 분이네요. 새롭게 마을에 오신 분인가요?”
“원래 엘든 마을에서 살았던 친구입니다. 돈을 벌겠다고 도시로 나갔었는데, 최근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같은 마을 사람인데 레빌 아저씨는 왜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거죠? 대화를 들어보니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으음…… 그게…….”
포코 영감은 망설이면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시현 님, 저는 저장고에 설치한 알람의 상태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야기 나누고 계시죠.”
“감사합니다. 안드라스 씨.”
안드라스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와 단둘이 남게 되자 포코 영감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데릭…… 저 친구가 도시에서 안 좋은 무리와 어울려 다녔다더군요. 레빌의 말로는 질 나쁜 범죄도 여러 번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저 두 사람은 어렸을 때는 아주 친한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데릭이 저지르는 일들을 보고 레빌이 먼저 인연을 끊었다고…….”
“그래서 실수에도 레빌 아저씨가 저렇게 화를 냈던 거군요.”
“실수가 아니야!”
레빌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분이 덜 풀렸는지 숨을 씩씩거렸다.
“저 녀석 분명히 딸기를 노리고 여기 온 게 분명해.”
“진정하세요. 저장고에 피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 저놈은 내가 잘 알아. 애초에 이곳에 못 오게 막았어야 했는데…….”
그는 얼굴을 구기며 분통을 터뜨렸다.
평소보다 훨씬 감정적인 모습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와 옷을 잡아당겼다.
-스윽!
“어? 미루 왔구나!”
“죄송해요, 아저씨…….”
미루는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내게 말했다.
처음 보는 미루의 쳐진 모습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세를 낮춰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
“으응? 아니, 미루가 왜 죄송해?”
“데릭 삼촌은 저를 따라온 거예요.”
“삼촌?”
-끄덕끄덕.
“저 녀석은 미루 엄마의 남동생이야. 정확히는 외삼촌이지.”
“그러니까 저분이 미루를 따라온 거야?”
“네. 제가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서 따라왔어요.”
“으음.”
“저장고에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 괜찮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삼촌의 잘못을 대신 사죄했다.
나는 미루를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줬다.
자기가 삼촌의 나쁜 행동을 막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것 같았다.
그런 어른스러운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아마 삼촌의 평소 나쁜 행실을 알기에 더 죄책감을 느끼는 거겠지…….
슬쩍 고개를 돌려 문제의 수인을 바라봤다.
그는 전혀 죄책감 없는 얼굴로 마을 사람들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저, 저! 쓰읍…….
무책임한 그 모습을 보니 입맛이 썼다.
오늘 안드라스와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을 첫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지만.
조카가 삼촌 대신 사죄하게 만들고,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시시덕거리다니!
데릭이라는 수인에게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딸기밭에 불청객이 찾아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