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93화
딸기밭의 불청객(3)
어쩌다 보니 미루의 손에 이끌려 집 안까지 들어오게 됐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불편하게 안 있으셔도 돼요. 어차피 엄마랑 저밖에 없거든요.”
미루야, 이 나이쯤 되면 타인의 집을 방문하는 게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단다.
아무 때나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리는 일은 말 그대로 어렸을 때나 가능한 일.
엘프리드도 어색해하는 건 나와 다를 바 없었다.
미루는 그저 내가 집에 찾아 왔다는 사실이 기쁜지 계속 싱글벙글한 상태였다.
“저기 미루야. 어머니는 어디 계셔?”
“방 안에서 쉬고 있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말하고 올게요. 엄마∼!”
나와 엘프리드를 남겨두고 미루는 후다닥 달려갔다.
덩그러니 집 한가운데 남겨진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집안을 둘러봤다.
밖에서 보았던 허름한 외관과는 다르게, 집안은 굉장히 깔끔한 느낌을 줬다.
일반적인 가정집에서 느낄 수 있는 따스한 분위기가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찬찬히 둘러보던 중 식탁 위에 빈 술병과 먹다 남은 음식을 발견했다. 금방 누군가를 떠올리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저씨! 엄마한테 이야기했어요. 같이 들어가요.”
금방 나타난 미루가 우리를 집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니 고양이 수인이 침대에 기대어 앉은 채 우리를 맞이했다.
“시현 님이신가요?”
“네, 제가 임시현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미루의 엄마, ‘아델라’라고 해요.”
자신을 아델라라고 소개한 그녀는 한눈에 부모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미루와 많이 닮았다.
다른 점이라면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를 뿜뿜하는 미루와는 달리, 그녀는 매우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가졌다.
“옆에 계신 분은?”
“으음, 나는 엘프리드…… 다.”
엘프리드의 어색한 대답에도 아델라는 환하게 웃었다.
“엘프리드 님이셨군요. 귀한 분들이 오셨는데 일어나지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몸이 좀 불편해서…….”
“괜찮습니다. 불쑥 찾아온 저희가 더 실례죠.”
적당히 인사를 나누는 사이 아델라의 모습을 좀 더 살펴볼 수 있었다.
이곳의 위치를 알려줬던 토끼 부인의 말대로 그녀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아프셨던 때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루에게 과자를 주려고 오셨다고요?”
“네, 매번 모습을 보이던 미루가 안 보여서, 실례를 무릅쓰고 직접 찾아 왔습니다.”
“실례라뇨. 오히려 딸이 더 신세를 지고 있는 걸요. 매번 과자도 나눠주시고, 딸기밭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시고, 저번에 만드신 샌드위치도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아! 그러셨군요.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미루도 그걸 느꼈는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가 가져온 과자랑 사탕인데 미루랑 같이 드셔보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귀환 손님이 오셨는데 저희는 별로 대접해 드릴 게 없어서 민망하네요.”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그럴 순 없죠. 미루야, 엄마 대신에 손님들에게 따뜻한 차라도 준비해 주겠니?”
“응! 알았어. 아저씨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미루는 쪼르르 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엘린, 너도 가서 좀 도와줘.”
“윽! 제가요?”
“아니면 네가 남아서 어머님이랑 대화하고 있을래?”
“……갔다 올게요.”
엘프리드까지 나가고 방 안에는 나와 아델라만 남게 되었다.
“시현 님, 조금만 더 가까이 와 주시겠어요. 계속 올려다보려니까 목이 좀 아프네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근처에 있던 탁자에서 의자 하나를 빼, 침대 근처에 놓았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온 나를 반짝이는 눈으로 살펴봤다.
그 모습이 정말 미루와 똑 닮아 있었다.
“이렇게 실제로 뵈니까 신기하네요. 미루에게 시현 님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제 이야기를요? 혹시 나쁘게 말하지는 않던가요?”
“전혀요. 시현 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미루가 시현 님을 만나고 난 뒤에 정말 많이 밝아졌어요.”
“그런가요? 저는 처음 봤을 때도 항상 밝고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델라는 조금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항상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겠죠. 아픈 엄마를 돌보려면 다른 어른들에게 무조건 좋게 보여야 했을 테니까요.”
“…….”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복잡미묘한 심정이 됐다.
아픈 어머니를 혼자 돌보기 위해 미루는 얼마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왔을까?
집안이 어려워졌을 때, 아이가 얼마나 위축되고 압박을 받는지, 직접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이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있으니……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그런데 시현 님을 만난 뒤로는 많이 변했어요. 미루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웃고 기뻐하는 날이 많아졌거든요. 아이 아빠가 살아 있을 때처럼이요.”
“그런가요?”
“네, 정말이에요. 그래서 항상 미루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떤 분일지 많이 궁금했어요.”
그녀는 밝게 웃으며 기대어 있던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두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손에서 따뜻하면서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기분 좋은 포근함에 내 얼굴에는 금방 편안함이 깃들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면 꼭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딸을 아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뇨…… 저도 제가 좋아서 한 일이에요.”
“그리고…….”
“……?”
아델라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 동생이 딸기밭에서 사고를 칠 뻔했다고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시현 님.”
“아…….”
쩝. 알고 계셨구나.
정작 잘못을 저지른 본인은 뻔뻔하게 구는데, 다른 가족들이 잘못을 비는 상황.
당연히 나도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불편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괜찮습니다. 피해가 발생한 것도 아니고. 이미 실수라고 해명했으니까요.”
“저는…… 무서워요. 혹시나 동생이 시현 님께 더 큰 잘못을 저지를까 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레빌 아저씨나, 라구스 씨에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어렵게 사는 두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수심이 가득한 그녀에게 계속 괜찮다는 말을 되뇌며 위로하려 노력했다.
방문 밖에서 미루와 엘프리드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잠시 후 찻잔을 담은 쟁반을 가지고 두 사람이 돌아왔다.
나와 아델라는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을 맞이했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어휴! 글쎄 이 마족 오빠가 주전자도 쓸 줄 모르더라고요.”
“모, 모르는 게 아니야! 가문에서 사용하던 거랑 달라서 잠시 헷갈렸을 뿐이야.”
“찻잎도 넣을 줄 몰라서 막 한 움큼씩 넣으려고 했잖아요?”
“그…… 그건 많이 넣으면 좋은 건 줄 알고…….”
“모르면 모른다고 해요. 쓸데없이 자존심 부리면 아무것도 못 배우잖아요.”
“으…… 응. 그렇게 할게…….”
똑 부러지는 미루의 말에 엘프리드는 쩔쩔매며 대답했다.
두 사람이 보여주는 재미있는 장면에 나와 아델라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네 사람은 따뜻한 차와 함께 가져온 과자를 나눠 먹었다.
미루는 평소보다 더 밝은 모습으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어머니에게 나를 소개한 것이 굉장히 기쁜 모양이었다.
방금 차를 만들며 조금 친해졌는지, 엘프리드도 가끔 미루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델라는 딸의 신난 모습을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지병으로 체력이 약해진 아델라의 안색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방을 나서기 전, 아델라는 나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금방 그 눈빛의 의미를 이해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제야 그녀는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완전히 침대에 몸을 뉘었다.
집을 나서는 나와 엘프리드 뒤로 미루가 쪼르르 따라붙었다.
“아저씨, 마족 오빠! 배웅해 드릴까요.”
“배웅은 무슨…… 괜찮아.”
나는 미루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씩씩하게 해나가고 있는 미루의 모습을 보니 정말…….
“떽!”
“……?”
“아저씨!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지금 저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게 아니라…….”
“동정심으로 더 많은 도움을 받고 싶었다면, 벌써 예전에 아픈 엄마에 관해 이야기했을 거예요.”
고양이 소녀는 당찬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너구리 영감님 가게도 나쁘지 않았지만, 아저씨 딸기밭에서 일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열심히 일해서 언젠가 엄마의 병도 제 손으로 꼭 낫게 해드리고, 집도 멋지게 다시 꾸밀 거예요. 그리고…… 가능하면 삼촌도 같이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아저씨에게는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나머지는 제힘으로 해내고 싶어요…… 하늘나라에 계신 아빠도 제가 그러길 바라실 거예요.”
머리를 망치로 세게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미루를 동정하며, 미루가 어렵게 지켜온 일상과 행복을 하찮게 취급할 뻔했다.
나는 자세를 낮춰 시선을 맞추고 미루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미안해, 미루야.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
내 진심 어린 사과에 미루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살짝 까치발을 들어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아저씨는 특별하니까 금방 용서해 드릴게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알았죠?”
“알았어. 고마워, 미루야.”
“헤헷!”
나는 미루와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것을 느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미루의 집을 떠나 마차로 돌아가는 길.
“선배, 미루는 정말 대단하네요.”
“그러게. 나도 깜짝 놀랐어.”
우리는 아직도 당찬 미루의 모습을 떠올리며 감탄하는 중이었다.
나는 가족이 어려웠던 상황을 직접 겪어봤기에, 미루의 저런 당당한 모습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말없이 길을 걷는 나에게 엘프리드는 대뜸 이상한 소리를 했다.
“시현 선배.”
“왜?”
“지금 선배가 무슨 생각 하는지 맞춰볼까요?”
“……?”
그의 황당한 제안에 황당한 얼굴로 쳐다봤다.
하지만 이어진 엘프리드의 말에 ‘황당’은 ‘당황’으로 순식간에 변했다.
“어떻게 하면 저 고양이 소녀를 티 안 나게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죠?”
“윽…….”
정말로 생각을 읽힌 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겨우 참아냈다.
“아니, 너 독심술이라도 쓰는 거야?”
“하아…… 독심술 같은 게 아니라 선배는 사람이 너무 알기 쉽다고요. 아마 농장 식구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걸요.”
“쩝…… 그렇게 티가 많이 나?”
“그럼요. 딱 사기꾼들이 좋아할 만한 느낌이라고요.”
나는 꽤 심각하게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뭔가 생각지도 못한 자신의 약점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선배님은 좀 적당히 할 필요가 있어요. 모든 일을 그렇게 책임지려고 하니까 항상 머리가 복잡해지는 거예요.”
“그런가…….”
녀석의 말대로 너무 오지랖을 부리는 건가.
진지한 충고에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엘프리드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왜 또 그렇게 시무룩해져요. 적당히 하라는 거지, 선배가 잘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
“미루라는 여자애가 말한 것처럼, 진짜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면 되잖아요. 뭐…… 저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같이 도와줄게요.”
확실히 엘프리드의 말대로 내가 너무 많은 걸 책임지려고 한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저 농장에 고용돼서 일하는 사람일 뿐이니까…….
마을 사람들이 공자님이라 부르며 대접하고, 추켜세워주니까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하니 조금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눈치를 보던 엘프리드도 한결 편안한 표정을 했다.
“고맙다. 선배 생각해 주는 건 역시 우리 엘린밖에 없어.”
“으윽! 고마운 건 알겠는데, 이상한 호칭 좀 쓰지 마시죠? 굉장히 소름 돋거든요.”
“어허! 하늘 같은 선배가 귀여운 후배를 부르는데 거부를 해? 이 자식 혼 좀 나야겠어!”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엘프리드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유치하게 머리는 왜 헝클어뜨려요! 자, 잠깐! 계속 이러시면 내일 검술 수련 두 배로 늘립니다!”
“큭큭! 그 정도는 감당해야지. 귀여운 후배가 상대 안 해준다고 또 울면 안 되니까.”
“그, 그만!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리고 야유회 때 술 취해서 했던 이야기를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예요?!”
“언제까지 우려먹긴, 당연히 평생 우려먹어야지. 너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으면 그 애한테도 다 이야기해 줄 거다.”
자신의 평생 흑역사가 확정되자, 잔뜩 뿔이 난 엘프리드는 검을 뽑아 들 기세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당연히 나는 아이처럼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선배고 뭐고, 당장 이리 와!”
“에헤! 싫은데?”
다 자란 남자 두 명의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우리의 술래잡기는 마차에 도착하고, 그 주변을 수십 번 돌고 나서야 겨우 종료될 수 있었다.
참고로 엘프리드는 다음 날 정말로 검술 수련을 두 배로 빡세게 진행했다.
지독한 놈…….
땅바닥을 마구 구르며 생각했다.
야유회 때 이야기는 자식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에게도 꼭 전해줘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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