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98화
딸기밭의 불청객(8)
수십 명의 붉은 어금니 조직원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마차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딸기를 맛보기 위해 모여 있던 사람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어금니 놈들이야.”
“저렇게 모여든 걸 보니, 또 사고 칠 생각인 모양이구먼.”
“뭘 가만히 보고 있어? 당장 안 꺼져?”
“너희들한테는 관심 없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알아서 가라.”
조직원들은 협박하며 사람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힘없는 일반 주민들은 기겁하며 물러났고, 꽤 실력 있는 용병들도 더러운 꼴 보기 싫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비켜섰다.
“아, 아저씨! 놈들이 와요!”
“이제 어떻게 하죠?”
마차 위에 그렉과 헤론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레빌은 담담한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지시했다.
“계획대로니까 당황하지 마. 너희들은 마차의 말을 데리고 인파에 섞여서 이곳을 빠져나가. 굳이 놈들이 너희까지 붙잡으려 하지는 않을 거다.”
“그럼 아저씨는요?”
“당연히 이곳에 있어야지. 내가 놈들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어야 그 세 사람에게 더 시간을 벌어줄 수 있으니까.”
“저쪽은 수십 명이나 몰려왔는데 어떻게 버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레빌의 단호한 태도에 두 사람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두려움과 불안함에 떠는 와중에도 쉽사리 마차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레빌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 명씩 가볍게 머리를 두드려주면서,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이 정도면 너희들의 역할은 충분히 한 거야.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저씨…….”
“아저씨…….”
“얼른 가! 너희들이 남으면 오히려 방해야. 우리가 약속했던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어.”
두 사람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레빌의 말대로 남아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분하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꼭 오셔야 해요!”
레빌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그렉과 헤론은 마차를 이끌던 말을 데리고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놈들의 목표는 뻔하지. 마차에 실린 딸기…… 그리고 나!’
어느새 조직원들이 크게 원을 그리며 마차를 둘러쌌다.
잠시 후, 그들 사이에서 발리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오랜만이야, 레빌! 이렇게 또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건 나도 동감이야, 발리크!”
서슴없이 발리크의 이름을 부르자, 부하 조직원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하지만 레빌은 사방에서 덮쳐오는 압박감에도 표정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네놈들이 납치한 미루는 어딨지?”
“어허, 왜 이렇게 급하실까? 물건부터 먼저 확인하는 게 순서 아닌가?.”
발리크는 마차에 실린 딸기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레빌은 마차의 짐칸에서 딸기가 담긴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 당당하게 걸어가 상자를 내려놓았다.
조직원 중 한 명이 잽싸게 상자를 챙겨 발리크의 근처에 내려놓았다.
“호오! 이게 그 유명한 딸기란 말이지?”
발리크는 유혹에 이끌리듯 딸기를 집어 들었다.
탐스럽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딸기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와앙! 덥석!
그는 여러 개의 딸기를 한꺼번에 집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게걸스럽게 딸기를 먹어치운 뒤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피어났다.
“이런 맛이었군. 확실히 귀족 놈들이 환장할 만해.” “물건을 확인했으면 당장 인질을 데려와.”
“아…… 인질? 그런데 어쩌지? 나는 인질을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 말이야.”
“딸기를 가져가고 싶은 게 아니었나?”
“딸기는 당연히 내가 가져가야지. 널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준 다음에 말이야.”
“…….”
“얘들아, 슬슬 준비해라. 딸기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
마차를 둘러싸고 있던 조직원들이 음흉한 미소와 함께 한 발, 한 발,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비열한 새끼…….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큭큭, 칭찬으로 듣지.”
레빌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며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멈춰!”
포위하던 조직원들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레빌의 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아티팩트가 들려 있었다.
“더 이상 다가오면 딸기는 물론이고, 이 주변까지 한꺼번에 날려버릴 거다.”
“무슨 헛소리야!”
“킥킥! 죽기 싫어서 헛소리를 내뱉는군.”
헛소리라며 모두 비웃었지만, 발리크는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끼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역시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의심이 들었던 찰나의 순간.
레빌의 눈동자가 자신의 옆에 있던 딸기 상자로 향하는 걸 눈치채고,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꾸욱!
-콰아아아앙!!
“으아아악!”
“크허헉!”
“이게 뭐야?!”
상자 근처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영문을 모르는 조직원들이 폭발현장을 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흙먼지가 걷히고, 폭발에 휘말렸던 조직원들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중에는 발리크도 있었다.
“크으윽!”
엄청난 반사신경으로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있었던 탓에 폭발의 충격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죽일 듯 레빌을 노려봤다.
“이 자식이…….”
“어때? 이제 좀 거래할 마음이 드나?”
빈정거림이 담겨 있는 질문에 발리크는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반면 레빌은 다시 주도권을 가져왔다는 것을 느끼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성문을 통과하던 세 사람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 친구들이 미루를 구할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해!’
* * *
“무, 뭐야? 이 새끼들 어떻게 들어온 거야?”
“이놈들 좀 막……. 으악!”
붉은 어금니의 비밀 본거지에서는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다급한 외침이 계속 뒤섞여 울려 퍼졌다.
이곳에 외부의 침입자가 올 거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직원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우수수 쓸려나갔다.
몸이 제대로 풀린 엘프리드, 그리고 안드라스의 빈틈없는 지원. 두 마족의 호흡을 겨우 뒷골목 수준의 조직원들이 막아낼 리 없었다.
나는 뭐…….
뒤에서 아꿍이를 안고 열심히 응원했다.
파죽지세로 적의 본거지를 돌파하던 도중.
-무우우! 무우!
“아꿍아, 뭔가 찾았어?”
-무우!
다시 흔적을 찾았는지 아꿍이가 나를 바라보며 울음소리를 냈다.
바닥에 아꿍이를 내려놓자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쫓았다.
본거지 가장 깊은 곳, 크고 화려한 방문이 있는 곳 앞에 아꿍이가 멈춰 섰다.
-무우! 무웃!
“이 방문 뒤에서 뭔가 느껴지는 모양이에요.”
-덜컥, 덜컥!
직접 열어보려 했지만, 방문은 안쪽에서 잠긴 듯했다.
“선배, 물러서세요.”
엘프리드는 바로 검을 꺼내 들었다. 나는 문 앞에 있던 아꿍이를 안아 들고 뒤로 물러섰다.
-샤아악!
-끼이이익!
예리한 검날이 번쩍이자마자, 방문은 본래 쓰임새를 잃어버리고 저절로 길을 내주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익숙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미친…… 어떻게 여기까지?!”
“아저씨!”
데릭과 손이 묶여 있는 미루였다.
“미루야!”
우리가 다가서려 하자, 데릭은 다급히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씨이이!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친혈육인 조카에 목에 단검을 들이미는 데릭.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그의 행동에 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선배, 저놈이 삼촌인 것 맞죠? 진짜 최악이네요.”
“저도 동감입니다.”
엘프리드와 안드라스는 데릭을 자극하지 않게 하려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욕심부리지 말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너희들 조금이라도 움직여봐. 이 단검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니까!”
“아저씨…….”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미루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데릭……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하나뿐인 조카를 인질을 잡으면서까지?”
“시끄러워! 네가 무슨 상관이야!”
“…….”
“다 너 때문에 엉망이 된 거야. 그 빌어먹을 딸기밭 그리고 온통 시현 님! 시현 님! 시현 님!! 수인도 아니면서 왜 남의 마을에 간섭질이야!”
데릭을 시뻘게진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 눈동자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빨리 거기서 비켜! 내가 나갈 때까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땐 정말 재미없을 줄 알아.”
너무나도 불안정해 보이는 데릭의 모습에 안드라스와 엘프리드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무리하게 제압하려다 잡혀 있는 미루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죠?”
“그냥 보내주는 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나는 조용히 아꿍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무우?
천천히 데릭 쪽으로 다가갔다.
나의 과감한 행동에 엘프리드와 안드라스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이, 이익! 다가오지 말라고 했지? 내, 내가 못 할 것 같아?”
나는 데릭의 말은 전혀 듣지 않았다. 그저 교감 능력으로 그의 주변에 흘러나오는 감정의 파편들을 하나씩 읽어나갔다.
질투, 원망, 좌절, 괴로움…….
그중에 가장 큰 감정의 파편은 공포와 불안이었다.
내 온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데릭을 향한 분노가 그 기운을 타고, 마치 커다란 거미줄처럼 상대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작은 감정의 파편들은 내 거대한 분노의 기운에 휩쓸려 산산이 부서져나 갔다.
오로지 공포와 불안만이 데릭을 가득 채워나갔다.
그는 극심한 공포심에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을 떨었다.
[대상은 극심한 공포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대상의 정신력이 완전히 바닥났습니다.]
[마수가 아닌 대상에게 ‘정신 제어’를 사용합니다.]
[‘정신 제어’가 불완전한 형태로 발동됩니다.]
개미굴에서 정신 제어를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 느껴졌다.
알람이 설명한 것처럼 불완전하게 데릭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으어억……. 어억, 컥!”
데릭은 나에게 통제되어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나는 데릭의 몸을 꼭두각시 조종하듯이 천천히 움직였다.
‘정신 제어’가 불완전하게 발동된 탓에 몸을 움찔거리며 반항하려 했지만, 나의 통제 아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의 의지에 따라 데릭은 천천히 미루를 풀어주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미루에게 나는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미루야.”
“으으…….”
“이제 무서워할 필요 없어.”
미루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조금씩 앞으로 나섰다.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내 앞에 다 와서는 거의 뛰다시피 안겨들었다.
-와락!
“미루야,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훌쩍…… 네. 괜찮아요.”
나는 묶여 있는 미루의 손을 풀어주면서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오래 묶여 있었던 탓에 손목에 빨갛게 쓸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저씨…….”
“응, 그래.”
“저는…… 훌쩍, 삼촌을 막고 싶어서…… 흑! 그런데…… 아무 생각도 안 나고…… 훌쩍, 아저씨 생각밖에 안 나서……. 내 힘으로 하겠다고 해놓고……. 흐흑, 결국 민폐만 끼치고…….”
미루는 울음을 참으며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갔다.
불안함 때문일까? 숨이 차오르는 와중에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미루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품 안의 작은 소녀에게서 수많은 감정이 전해져왔다.
죄책감, 슬픔, 후회…….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어두운 감정들이었다.
다시 한번 기운을 끌어올렸다.
아까와는 정반대의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미루의 온몸을 감쌌다.
내 기운은 미루의 어두운 감정들을 녹여나갔다.
하나씩 사라지는 감정의 조각들. 마지막으로 가장 크고 단단한 하나의 감정만이 남았다.
그것은 커다란 불안감이었다.
혹시 내가 말썽을 부리면 어른들에게 미움받지 않을까?
내가 미움을 받아서 엄마가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어른스럽던 미루의 마음속에는 항상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불안감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괜찮아, 미루의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흑! 하지만…….”
“꼭 착한 아이일 필요 없어. 가끔은 억지로 떼를 써도 되고, 유치하게 변덕을 부려도 좋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나를 의지해 줄래?”
내 물음에 미루의 커다란 불안감이 조금씩 깨어져 나갔다. 그리고 억지로 참고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흐윽……. 흐아아아앙!!”
미루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흐아앙!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 그래.”
“계속…… 흑, 아저씨 기다렸는데…….”
“미안해. 조금 더 빨리 오지 못해서.”
이제야 평범한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슬쩍 미소가 피어났다.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며 울음을 달래줬다.
“끄어억……. 컥!”
뒤에서 정신이 반쯤 무너져내린 데릭의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착하고 여린 아이를 인질로 삼을 생각을 하다니……. 마음속에서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에게서 뻗어 나온 거대한 기운이 또 한 번 데릭을 감쌌다.
그의 몸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크게 떨었다.
힘겹게 버티고 있는 데릭의 정신이 느껴졌다.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물풍선같이 위태위태하고 불안정했다.
가볍게 손에 힘을 주면 터져버리는 물풍선처럼, 데릭의 정신도 쉽게 붕괴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쓰레기 같은 놈에게 용서가 필요한 걸까?
내가 독하게 마음을 먹고 처리해야 미루가 더 행복해지는 게 아닐까?
나의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맴도는 순간.
-꾸욱꾸욱.
작은 고양이 손이 나의 옷을 잡아당겼다.
아래를 내려보자 미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도 내 행동을 막고 싶은 것 같았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끄덕끄덕.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합당한 벌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미루의 생각을 무시하면서까지 억지를 부릴 순 없었다.
나는 조금 허탈한 표정으로 데릭 주변에 기운을 거둬들였다.
그의 몸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아……. 그래. 내가 너의 죄를 벌하지는 않을 거야.
대신 너는 배신한 마을 사람들과 가족의 앞에서 다시 한번 나서야 할 거야.
그제야 미루는 안심한 표정으로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미루는 긴장이 풀렸는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잠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히 안아 들었다.
나의 마음에도 조용히 평화가 찾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