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19화
은빛 방문자(2)
은월족 방문자들을 농장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일단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실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방문자 셋이 나란히 자리에 앉았고, 내가 그 반대편에 자리했다. 안드라스는 빈자리가 있었음에도 앉지 않고 나를 지키듯 뒤쪽에 섰다.
그리고 자리를 잡은 또 한 사람.
카네프는 가장 상석인 자리에 앉아 불편한 기색을 마구 뿌려댔다.
“사장님. 여기 계시려고요?”
“왜? 내가 지내는 곳인데. 어디에 있던 내 마음이지.”
“그건 맞는데…….”
혹시나 아까처럼 문제를 일으킬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저는 이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임시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안드라스, 카네프의 짤막한 소개를 했다. 상대편에서도 자연스럽게 소개가 이어졌다.
“다시 한번 소개해드리면 저는 은월족의 아니스라고 합니다. 이분은 저의 숙부님 ‘다우르’ 그리고 이분은 저희를 도와주고 계시는 ‘나미라’입니다.”
아니스는 카네프와 신경전을 벌였던 남자를 ‘다우르’, 옆에 여우 수인 여성을 ‘나미라’라고 소개했다.
아무래도 아까 있었던 신경전의 영향으로, 서로의 소개는 굉장히 무미건조하게 이뤄졌다.
“…….”
“…….”
서로의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잠시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은월족 방문자들은 먼저 말을 꺼내주길 바라는 눈치였고, 이쪽에서는 나 말고 입을 열 사람이 없어 보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을 정리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은월족 아이를 찾아오셨다고 하셨죠?”
“네, 언니의 아이를 찾고 있어요.”
아니스가 침착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그럼 아이의 부모님께서는 어디에……?”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아아…….”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말하는 아니스의 표정도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안타까운 소식을 늦게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조카가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아차렸고요.”
“어떻게 여기를 알고 찾아오셨나요?”
“이 근처로 언니 부부가 도망쳐 왔다는 걸 알고. 이 지역에서 계속 조카의 흔적을 찾아다녔어요. 그러다 황금시계 상단의 상인이 어느 수인마을에서 은월족 아이를 봤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막힘없이 이곳을 찾아오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딱히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럼 은율이…… 아니, 은월족 아이는 어떻게 혼자 남게 된 건가요?”
“저희 부족의 복잡한 사정을 모두 설명해 드릴 수는 없지만, 모종의 이유로 조카를 노리는 자들이 있어요. 언니 부부는 그들에게서 조카를 지키려다가 그만…….”
“…….”
무거운 이야기가 계속되던 도중.
조용히 문이 열리면서 리아네가 따뜻한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엘프리드와 은율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월족 사람들은 은율이를 보자마자 놀라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 아이가 어렸을 때와 정말 똑같구나.”
“맞아요. 언니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네요.”
“작은 아가씨가 벌써 저렇게…….”
감정적으로 격해진 그들과는 다르게, 은율이는 엘프리드의 다리 뒤에 숨으며 낯선 사람들을 경계했다.
“은율아, 이리 와!”
내가 부르자 작은 여우 소녀가 쪼르르 달려와 내 곁에 달라붙었다. 은월족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얼굴을 내 품에 완전히 묻어버렸다.
나와 은율이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리아네는 약간 어색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메이드로서 정중한 자세로 손님을 대접했다. 향긋한 차 향이 주변을 메우기도 전에 아니스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임시현 님이라고 하셨죠? 저 은월족 아이와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처음 만난 건…….”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은율이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작은뿔 덕분에 은율이를 만났었지.
작은뿔의 뒤를 따라 도착한 작은 바위틈. 그사이에 웅크리고 있던 작은 아기 여우.
이제는 조금 흐릿해진 그 모습을 떠올리자 내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은월족 사람들에게 처음 만났을 때의 일부터, 농장으로 데려와 함께 지냈던 일들을 천천히 들려주었다.
은월족 사람들은 물론이고, 농장의 식구들, 그리고 은율이도 고개를 들어 이야기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한번 침묵이 찾아왔다. 은월족 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은율이는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은월족 사람들을 힐끔힐끔 살펴봤다.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칠 것 같으면, 화들짝 놀라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임시현 님.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먼저 고맙다는 이야기를 드릴게요. 아무래도 임시현 님이 구해준 저 아이가 우리가 찾던 ‘미우’인 것 같아요.”
“미우?”
여우 수인이 나서서 설명했다.
“작은 아가씨가 부모님에게 받은 이름이에요. 그분들이 그 이름을 지으실 때 저도 옆에 있었어요.”
미우…… 미우…….
은율이의 친부모가 지어준 이름.
나는 굉장히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미우’라는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다시 한번 제 조카 미우를 구해주셔서…….”
“은율이야.”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카네프가 불쾌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네?”
“저 아이의 이름은 미우가 아니라 은율이라고.”
“…….”
주변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다.
카네프의 단호한 대답에 아니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다우르가 인상을 찡그리며 대신 대답했다.
“방금 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거요? 저 아이의 친부모가 지은 이름이라고 하지 않소?”
“그게 친부모가 지은 이름인지, 니들이 거짓말로 지어낸 이름인지 어떻게 알아?”
“지금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요?!”
“그럼 여우 귀에 꼬리만 달고 오면 다 믿어줘야 한다는 거야?”
다시 한번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으으. 아빠…….”
은율이가 몸을 떨면서 내게 안겨 왔다.
“사장님!”
“숙부!”
나와 아니스가 각자 두 사람에게 적당히 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크흠…… 흠.”
“쳇!”
두 사람은 무서워하는 은율이의 눈치를 보며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내가 카네프를 말리기는 했어도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사장님이 조금 날카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저도 여러분이 은율이의 진짜 가족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은월족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지 않나요?”
내 질문에 아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겠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미라, 나 좀 도와줘.”
“네, 아니스 님.”
아니스는 나미라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손에서 새하얀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나미라의 이마로 쑥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
빨려 들어갔던 새하얀 기운이 작은 구슬의 형태로 아니스에게 되돌아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구슬을 집어 들었다.
“직접 보여드릴게요. 미우의 친부모님을!”
그녀가 구슬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자, 구슬이 작은 파편으로 나뉘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작은 파편들은 허공에 무언가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와아……”
몽환적이고 신비한 현상에 은율이가 눈동자를 빛냈다.
허공에 붉은색 머리칼, 여우 귀와 꼬리를 가진 남자와 은월족 여자가 생생히 그려졌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작은 아기가 안겨 있었다.
첫 번째 장면 외에도 두 사람이 행복하게 아기를 돌보는 모습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한눈에 작은 아기가 은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옆에 은율이는 허공의 장면들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장면 속 아기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알 수 없지만, 은율이는 장면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했다.
다른 농장 식구들도 허공의 장면들이 무얼 뜻하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카네프는 아직도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저것만 가지고는 아직…….”
“아니에요. 저 장면 속의 사람들은 정말 은율이의 친부모님이에요.”
“…….”
은율이가 나를 처음 아빠라고 불렀던 날.
그날 새벽에 나는 은율이의 기억을 보았었다.
기억 속에서 보았던 부모님과 함께 있던 여우 수인.
그 수인 중에 방금 이마에서 구슬을 꺼낸 나미라의 모습도 존재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은율이의 가족이 맞는 것 같았다.
“이제 저희를 믿으실 수 있으신가요?”
“…….”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미우를 돌봐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 은혜는 은월족의 이름을 걸고 잊지 않을 거예요.”
“…….”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아니스의 다음 말이 너무나도 두렵게 느껴졌다.
“아껴주신 만큼 정도 많이 드셨겠지만, 이제 미우는 저희가 돌보도록 할게요. 돌아가신 언니 부부도 그걸 원하고 있을 거고요.”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미 수없이 그렸던 상황이었음에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슬픔이 나를 뒤덮었다. 너무나도 은율이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진짜 가족들에게 억지를 부려도 되는 걸까? 은율이가 진짜 가족과 함께 하는 게 더 좋은 일이 아닐까?
눈앞의 진짜 가족 앞에서 내가 계속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족도 아니고,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인데…… 나의 욕심 때문에 혹시 은율이가 불행해진다면…….
“야!”
“……?!”
카네프의 부름에 다시 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너 뭘 고민하는 거야?”
“그러니까…… 진짜 가족분들에게…… 은율이가 행복해지려면…….”
나는 횡설수설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평소에 혼자 똑똑한 척하면서 여기저기 오지랖 부리더니, 자기 일에는 왜 이렇게 멍청해?”
“……?”
“저놈들 눈치는 왜 봐? 진짜로 봐야 할 곳을 바라보란 말이야!”
카네프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곳에 벌벌 떨고 있는 작은 여우 소녀의 보였다.
마치 돌 틈에 숨어서 떨고 있던 것처럼…….
폭풍우 치는 밤, 지저분한 창고 구석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것처럼…….
은율이는 그렇게 내 옆에서 떨고 있었다.
아…….
이 멍청한 놈…… 멍청한 놈!
이렇게 무서워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두려워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했는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버린 은율이의 모습에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어쩌면 두려웠던 걸지도 몰랐다.
은율이가 진짜 가족과 함께해야 더 행복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하지만 지난날 내가 했던 다짐들이 떠오르면서, 그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 깨달았다.
다시는 외롭게 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언제나 행복하게 웃을 수 있도록 해줄 거야.
머릿속에 복잡했던 생각들이 깔끔하게 치워졌다.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한 감정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아니스 님, 그리고 다른 은월족 분들. 죄송해요.”
“네? 그게 무슨…….”
“깨달았어요. 여러분이 진짜 가족이라는 사실은 중요치 않아요. 애초에 가족이라는 말에 진짜, 가짜가 어디 있겠어요?”
나는 떨고 있는 은율이를 품 안으로 이끌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떨림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미안해, 은율아. 내가 멍청한 짓을 할 뻔했어. 미안해.”
“흐윽…….”
은율이는 품 안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이번엔 정말로 약속할게. 절대 외롭게 두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믿어줄래?”
은율이는 작은 두 손으로 내 옷을 꼭 잡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다시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이 행복한 감정을 절대 놓고 싶지 않았다.
“말도 안 돼요! 미우는 제 조카예요. 당연히 우리가 데려가야 해요!”
“은월족의 아이는 당연히 은월족이 키워야 하는 법! 당신이 무슨 권리로 그 아이를 데리고 있겠다는 거요?!”
은월족 방문자들이 흥분해 소리쳤다.
“권리요? 당연히 저에게도 권리가 있죠.”
내가 은율이와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면. 항상 마음속으로 작은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이 순간 진짜 부모와 가족들은 은율이를 잃어버려 고통스러워하지 않을까? 혹시 내가 그들의 행복을 빼앗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은율이는 아빠라고 불렀지만, 나는 항상 스스로 보호자라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리고 그게 진짜 가족을 위한 예의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그건 비겁한 자기합리화에 불과했다.
나중에 겪을지도 모르는 이별이 두려워 도망쳤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정말로 은율이와 약속했으니까.
은율이의 친부모님들을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제 피하지 않겠습니다.
은월족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은율이의 친부모님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왜냐하면 은율이는 제 딸이고, 저는 은율이의 아빠니까요.”
그제야 카네프의 입가에 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다른 농장 식구들도 따뜻한 시선으로 나와 은율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은 여우 소녀의 떨림도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