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20화
은빛 방문자(3)
내 입에서 처음으로 ‘아빠와 딸’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단순히 그 단어를 입에 올렸을 뿐인데도 나의 마음가짐은 더욱 단단해졌다.
아니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아빠가 되겠다는 거죠? 은월족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맞아요. 은월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은율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어요.”
“그건…….”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옷.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까지. 작고 사소한 일까지 다 알고 있어요. 은월족 여러분들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겠지만, 저만이 은율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도 있어요.”
나의 진심을 담은 말에 아니스와 나미라의 얼굴에 고민과 망설임이 생겨났다. 하지만 다우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은월족의 아이가 분명하거늘, 왜 우리가 당신들의 허락을 맡아야 한단 말이오? 더 이야기할 것도 없소. 당장 그 아이를 우리에게 돌려주시오!”
결국, 다우르는 농장의 또 다른 괴물을 일깨우고 말았다.
-촤르르르륵!!
카네프의 손에서 시작된 푸른 사슬들이 순식간에 은월족 사람을 에워쌌다. 사슬 하나하나에 담긴 무시무시한 기운에 세 사람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누구 허락을 맡아야 하냐고? 당연히 내 허락이지.”
“으윽…….”
“허튼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이 농장에서 제 발로 걸어나가고 싶다면 말이야.”
다시 한번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안드라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카네프 님, 일단 위협을 멈추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직은 나눠야 할 이야기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상태로 물어보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겠어?”
“어찌 됐든 은율 양의 가족분들입니다. 은율 양을 생각해서라도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쳇.”
카네프는 내 품에 안겨 있는 은율이를 슬쩍 보더니, 푸른 사슬들을 사라지게 했다. 은월족 사람들의 표정이 약간은 편안해졌다.
“은월족분들. 저희는 아직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습니다.”
“……뭔가요?”
안드라스의 정중한 요청에 잠시 망설이던 아니스가 되물었다.
“은율 양의 진짜 가족이라는 사실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보인 행동은 약간 의문이 생깁니다.”
“……?”
“당신들이 정말로 은율 양을 가족으로써 돕기 위해서 찾아온 겁니까?”
“당연히 돕기 위해 찾아온 겁니다.”
그녀의 대답에 안드라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들은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는 것처럼 행동하시는 겁니까?”
“……!”
“은율 양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없이, 어떻게든 은월족으로 데려갈 생각만 하시는군요.”
“…….”
“만약에 제가 여러분이었다면. 조금 더 은율 양과 대화를 나누려 시도하고, 이 농장의 사람들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내려 노력할 겁니다.”
그들은 안드라스의 논리적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가 그들의 안색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여러분들은 은율 양을 돕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은월족으로 데려가는 일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
“…….”
“…….”
세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유지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안드라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진짜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습니다. 당신들은 은율 양을 데려갈 자격이 없는 분들입니다. 조용히 돌아가 주시죠.”
“우,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어요. 은월족에게 아주 중요한 달의 무…….”
“시끄러! 더는 대화할 가치도 없어 보이네. 마지막 경고다. 지금 당장 농장에서 떠나.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 제 발로 찾아온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다시 한번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순간.
-부우우우우!!
-부우우우우!!
밖에서 야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울음소리를 알아듣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산이 시작되려나 봐요.”
나는 은율이를 안은 채 농장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른 농장 식구들도 우르르 나를 따라 나왔다.
* * *
초롱이가 있는 축사 근처에 많은 야쿰들이 포위하듯 자리했다. 그들의 긴장한 모습을 보니 이미 출산이 시작된 것 같았다.
축사 안으로 가기 위해 안고 있던 은율이를 리아네에게 맡기려 했다. 그러자 은율이는 내 옷을 꽉 붙잡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빠랑 같이 있을래…….”
조금 전의 일 때문인지 너무나도 표정이 불안해 보였다. 짧은 고민 끝에 은율이도 함께 데리고 가기로 했다. 나는 뒤따라온 농장 식구들을 바라보며 인사를 남겼다.
“저 다녀올게요.”
“저희도 여기서 응원하고 있을게요, 시현 님!”
“힘내요, 선배!”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갔다 와라.”
무미건조한 카네프의 응원을 마지막으로 나는 축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뒤쪽에서 은월족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축사를 지키고 있던 야쿰들이 내가 다가가자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 마지막으로 입구를 지키고 있던 큰뿔이가 짧게 울음소리를 냈다.
-부우우.
“그래, 걱정하지 마. 금방 귀여운 아기들을 볼 수 있을 거야. 나도 최선을 다해볼게.”
큰뿔이를 지나 축사 안으로 들어섰다.
“초롱아, 괜찮아?”
-부우우…….
옆으로 반쯤 누운 채 힘들어하는 초롱이의 울음소리.
그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털을 쓰다듬었다.
“괜찮을 거야. 내가 옆에 계속 있어 줄게.”
“나도, 나도 계속 있을 거야!”
은율이는 어떻게든 힘을 전해주고 싶었는지,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초롱이를 응원했다.
-부우우!
우리의 응원이 통했던 걸까? 초롱이는 약간 힘을 되찾은 듯한 울음소리를 냈다.
예쁜이가 출산할 때와 마찬가지로 초롱이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진통을 겪어야 했다.
초롱이가 힘들어할 때마다 교감 능력으로 불안을 줄여주고, 깨끗한 물을 계속 가져다주었다.
미리 준비한 기분이 좋아지는 약초도 주변에 뿌려주며 고통에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은율이도 계속 내 옆에 붙어서 작은 일이라도 도우려고 노력했다.
나 대신 약초를 가져와 주기도 하고, 힘들어할 때마다 응원을 해주기도 했다.
그 덕분에 축사에 오기 전, 불안해하던 모습은 거의 다 사라졌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밤이 찾아오고, 별빛이 깊어지기 시작했을 때. 첫 번째 아기 야쿰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부우우우!
“그래, 초롱아. 천천히 숨 쉬면서.”
“초롱아, 힘내!”
천천히 아기 야쿰의 몸이 반쯤 빠져나오고, 쑤욱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미끄러져 나왔다.
미리 푹신하게 깔아놓은 바닥에 아기가 떨어졌다.
옆에서 기다리던 야쿰들이 달려들어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핥아 몸에 붙은 찌꺼기를 치워냈다.
그리고 금방 두 번째 아기 야쿰이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쉽게, 쑤욱하고 미끄러져 나왔다.
-부우우…… 부우우…….
출산을 끝낸 초롱이가 거의 탈진한 모습으로 힘 빠진 울음소리를 냈다.
“잘했어, 초롱아! 정말 잘했어!”
-부우우…….
“걱정 안 해도 돼. 아기들도 모두 건강하니까.”
아기들이 건강하다는 말에 초롱이는 한결 편해지는 모습이 됐다.
“아빠, 아빠! 얘들 좀 봐봐.”
은율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아기 야쿰들이 꼬물꼬물 움직이며 세상에 적응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보는 생명 탄생의 신비함은 몇 번을 보아도 마음을 아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너무 귀엽다.”
“그러게.”
“아빠, 만져보면 안 돼?”
“아직 너무 어린 아기들이라 함부로 만지면 안 돼.”
내 단호한 대답에 은율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억지를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견한 모습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쉬움을 달래줬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 조금만 있으면 직접 만져볼 수 있을 거야.”
꼬물대던 아기 야쿰들은 조금씩 일어서기 시작하더니, 본능적으로 어미의 젖을 찾아 움직였다. 초롱이도 자연스럽게 아기들이 젖을 마실 수 있도록 자세를 맞춰줬다.
은율이는 초롱이와 아기 야쿰들의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빠…… 나도…… 엄마랑 아빠가 저렇게 안아줬을까?”
“…….”
뭔가 어색한 질문에 내 마음은 바위를 얹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아니스가 보여줬던 은율이 친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르며 더욱 답답해졌다.
잠시 대답을 고민하던 나는 살포시 은율이를 껴안았다.
“물론이지. 은율이가 태어났을 때, 엄마랑 아빠는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아껴줬을 거야.”
“응…….”
은율이는 작게 웃으며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 * *
늦은 새벽.
카네프는 지난번 야유회 때 쓰던 의자에 앉아 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끝났네.”
그는 맥주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맥주 때문인지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른 농장 식구들은 기다리다 지쳐 근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도대체…… 저 사람의 정체는 뭐죠?”
뒤에서 아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네프는 고개를 돌리며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너희들 아직도 안 갔어?”
“…….”
은월족 세 사람은 담담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카네프는 다시 맥주를 홀짝이며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정체는 무슨 정체야. 그냥 농장에서 일하는 녀석이지.”
“어떻게 그 위험한 야쿰을 아무렇지 않게…….”
“나도 몰라. 그냥 저 녀석이 하는 일은 ‘그냥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갈 뿐이야. 큭큭!”
그는 뭐가 재밌었는지 잠시 혼자 키득거렸다.
세 사람은 열려 있는 축사 안에 임시현과 은율이를 바라봤다. 꼭 껴안은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다정한 아빠와 딸의 모습이었다.
“숙부.”
“왜 그러느냐?”
“우리가 저 남자에게서 미우를 데려갈 권리가 있을까요?”
“…….”
다우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여우 수인 나미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은월족에서 생활은 잘 모르지만, 그분들은 항상 미우 아가씨가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
“…….”
나미라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임시현과 은율이를 바라봤다.
“미우 아가씨는 이곳에서 너무 행복해 보여요. 어쩌면 아가씨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돌아가신 두 분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말을 들은 아니스와 다우르의 시선이 다시 축사로 향했다. 그들의 닫혀 있던 마음에 조금씩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