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126화
위기의 딸기밭(2)
좋지 않은 상황을 전해 들은 우리는 급하게 엘든 마을로 향했다.
바쁘게 움직여 도착한 마을의 입구.
그곳에서부터 평소와 다른 싸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마을의 입구를 지나 가장 큰 공터로 향했다.
평소에 상인들이 가져온 물건을 내려놓고 거래하던 장소인데, 지금은 무장한 병사와 기사들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끌려 나와 어른들의 품에 안겨 벌벌 떨고 있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기사 중 한 명이 우리를 발견하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주변의 수인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기사의 물음에 안드라스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슈나르페 가문의 안드라스라고 합니다. 표식을 보니 셀베르크 가문에서 오신 분들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슈나르페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이번에는 기사 쪽에서 움찔 몸을 떨었다. 기사의 주변에서 위협적인 기세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흠, 흠! 슈나르페 가문의 귀한 분인 줄 모르고 실례를 했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길…… 말씀하신 대로 저희는 셀베르크 가문의 소속이 맞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셀베르크 가문의 기사님들이 왜 이곳에 오신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곳을 다스리는 셀베르크 가문의 일이라, 저는 함부로 외부인에게 발설할 수가…….”
“그건 제가 직접 설명해 드리지요.”
병사들과 기사가 일사불란하게 물러서더니 금발의 귀공자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 특유의 오만함과 여유로움이 물씬 풍겨 나왔다.
엘프리드가 처음 농장에 왔을 때 분위기랑 비슷하네. 나이도 비슷해 보이고…….
금발의 마족은 아주 자연스럽게 안드라스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셀베르크 가문의 소영주, ‘글라디온’이라고 합니다. 슈나르페 가문의 유구한 명성을 잇고 계신, 제르무어 부단장님을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는 알아듣기도 힘든 거창한 말을 매끄럽게 소화해냈다. 안드라스는 이런 대화가 익숙한지, 곧바로 상대방의 인사에 응답했다.
“셀베르크 가문의 소영주님이셨군요. 저도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슈나르페 가문의 안드라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귀하신 부단장님께서 누추한 이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셀베르크 가문의 소영주 글라디온.
그는 안드라스의 등장에 놀랍다는 듯 말했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여유로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마치 여기에 올 줄 미리 알았다는 것처럼…….
“이곳 마을의 주민분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봤습니다. 혹시 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칼디니움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의 범인을 조사하는 중이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라면…….”
“예. 정체를 숨기고 칼디니움에 침입한 세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도시의 뒷골목 지역에 방화를 저지르고 도망쳐 큰 피해를 준 중죄를 저질렀거든요.”
“…….”
“그리고 그 침입자들이 이 더러운 수인 놈들과 연관이 있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이신 영주님의 권한을 넘겨받아 직접 그 침입자를 찾아내러 왔습니다.”
세 명의 침입자.
글라디온이 말하는 침입자가 우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상황에 주변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가장 믿음직스러운 안드라스도 표정에서 난감함이 묻어나왔다. 지금의 상황이 쉽지 않다는 증거였다.
글라디온의 입가에 미소가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지금부터 재미있는 구경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병사들은 당장 그 건방진 놈을 끌고 와라!”
“예!”
“예!”
명령을 들은 병사 몇 명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포박당한 누군가를 거칠게 끌고 와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엘든 마을의 촌장 라구스였다.
“크흑!”
땅바닥에 부딪힌 충격에 그의 입에서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글라디온은 차가운 얼굴로 라구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가 이 마을의 촌장이라고 그랬지? 나도 이 냄새 나는 곳에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빨리 그 침입자의 정체를 말해.”
“윽…… 아까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그 침입자들이 이 마을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털어놔라.”
“……모릅니다.”
“이 건방진 짐승 새끼가!”
-퍼억!
“컥!”
글라디온은 라구스를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포박된 라구스는 쏟아지는 폭력을 맨몸으로 감내해야 했다.
쉽게 끝나지 않는 발길질과 고통에 찬 숨소리.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며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내가 나서려 하자 안드라스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안됩니다, 시현 님.”
“이 모습을 보고만 있으라고요? 저놈들이 찾는 건 우리잖아요?”
“우리가 나서면 일이 더 복잡해집니다.”
“그럼 라구스 씨는 어쩌고요?”
“시현 님, 지금 그가 어떤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그의 말에 따라 아직도 맞고 있는 라구스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스윽…….
그 짧은 순간 라구스는 나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고갯짓의 의미를 알아채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저 수인은 시현 님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저런 폭력에도 침묵을 유지하는 거고요.”
“으윽…….”
-퍼억…… 퍽!
-털썩!
무자비한 폭력에 버티지 못한 라구스가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아빠!”
지켜보고 있던 헤론이 뛰어나와 라구스의 상태를 살폈다. 글라디온은 그 모습을 아니꼽게 바라보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저놈이 촌장의 아들인가 보군. 저놈도 당장 포박해라.”
“예!”
병사들은 헤론을 강압적으로 짓누르며 손과 발을 묶었다. 쓰러진 라구스는 짐짝 치워지듯이 대충 옆으로 밀려났다.
“아버지가 말하지 못했다면 아들은 대신 뭔가를 알고 있겠지. 얼른 말해봐. 저기 쓰러진 아버지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으으으…….”
헤론은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도 기대와 다른 반응이 나오자 글라디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역시 말로 해서는 안 될 모양이군.”
그가 다시 한번 발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누군가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그랬다!”
레빌의 우렁찬 외침에 글라디온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그의 차가운 시선이 자연스럽게 레빌에게 향했다.
“내가 도시로 잠입해서 불을 질렀다.”
“네놈이?”
“그래! ‘붉은 어금니’ 놈들이 마음에 안 들어서 혼 좀 내줬지. 뭐, 불만이냐?”
그의 뻣뻣한 태도에 주변의 병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 미친놈이, 소영주님에게 어디서 버릇없이!”
병사들은 레빌을 억지로 땅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억눌리면서도 적대적인 눈빛으로 글라디온을 노려봤다.
글라디온은 잠시 그를 노려보더니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검은 고양이 수인, 네놈은 그때 성문 밖에서 미끼 역할을 하고 있었지?”
“…….”
“괜한 짓거리 하지 말고 어서 진짜 범인을 말해라. 너희들이 침입자들의 정체만 말한다면 지금까지의 무례함은 용서해 주겠다. 거기에 더해 적당한 사례금도 약속하지.”
글라디온은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레빌과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며 회유했다. 동시에 허리춤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마을 사람들 앞에 던졌다.
-짤랑!
주머니 안에서는 빛나는 금화가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에 쏠렸다.
그 행동을 본 안드라스와 엘프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드라스 선배, 저 자식…….”
“아무래도 침입자를 찾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인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이죠?”
내 물음에 안드라스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셀베르크의 소영주는 이미 침입자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이곳에서 우연히 우리를 마주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를 기다렸던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수인들에게 진실을 자백시키려는 거겠죠.”
글라디온의 여유로운 미소가 조금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레빌은 땅바닥에 떨어진 금화 주머니를 잠시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글라디온을 바라봤다.
“저 금화…… 진짜로 주는 거겠지?”
“당연하지! 이제 좀 입을 열 생각이 든 거야?”
“그래, 진짜 침입자의 정체에 대해 말해주지.”
글라디온은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레빌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칼디니움에 숨어들었던 침입자는…… 바로 너구리 영감님이야.”
“……??”
“저, 저, 미친놈이?!”
“큭큭…….”
사람들 뒤쪽에서 너구리 영감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몇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놀림당했다는 사실을 안 글라디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팔을 높게 들어 올렸다.
“이잇! 버러지 같은 놈이?!”
-빠아악!!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주먹에 레빌의 얼굴이 세차게 돌아갔다. 다시 고개를 돌린 레빌은 여유롭게 웃으며 침을 툭 내뱉었다. 붉은 핏물이 섞인 침이 금화 주머니 위로 떨어졌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절대 네가 원하는 대로 대답하지 않을 거야. 네놈들은 우리를 짐승 취급했을지 몰라도, 그분은 다르거든.”
“지금 네놈들의 입장을 모르는 것이냐? 나는 이 영지의 후계자고, 너희들은 영지에 빌붙은 쓰레기라는걸?”
“언제부터 영지의 후계자님께서 우리를 신경 쓰셨다고…… 이제 쓰레기들에게는 신경 끄고 돌아가시지?”
-뿌드드득!
글라디온의 입에서 이를 가는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를 발견한 그는 성큼성큼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 앞에는 캐시를 안고 있는 엄마 토끼 수인이 있었다.
“이리 내놔!”
“아악! 안됩니다! 제발 아이만은…….”
“으아아앙! 엄마!”
글라디온은 엄마의 품에서 거칠게 캐시를 뺏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레빌이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들려 했지만, 주변의 병사들이 재빠르게 무기를 들이밀며 그를 억압했다.
“이 비겁한 새끼!!”
“역시 짐승 놈들에게 대화를 시도한 게 잘못이었어.”
“으아아앙!”
캐시는 억센 손길에 울음을 터뜨리며 몸을 버둥거렸다. 글라디온은 단검을 아기 토끼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지금부터 셋 셀 거야. 그 사이에 누군가 입을 열지 않으면, 이 단검이 토끼 가죽을 손질하게 될 거야.”
“아악! 제발…… 제발 우리 아기를 놔주세요!”
캐시의 엄마가 울부짖으며 캐시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나…….”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현 님…….”
“선배…….”
내 옆에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둘…….”
“으아아앙! 꽁자님!”
나를 부르는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셋!”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글라디온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